2011년 9월 14일 수요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이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찾게 되었다.
황제는 335년에 이를 기념하는 대성전을 예루살렘에 지어 봉헌하였다.
이후 십자가 경배는 널리 전파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9월 14일로 이 축일이 고정되었다.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3,13-17)
Just as Moses lifted up the serpent in the desert,
so must the Son of Man be lifted up,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may have eternal life.”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은 고달픈 광야 생활에서 오히려 이집트의 종살이를 그리워하며 모세에게 불평한다. 주님께서 불 뱀을 보내시자 백성은 모세에게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살게 한다. 하느님의 뜻을 거역할 때 죽음이 오지만,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주님 뜻을 따를 때 생명이 온다(제1독서). 성경에서 뱀은 죄와 죽음을 상징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죄와 죽음의 상징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쳐다보며 생명을 얻었듯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구원을 얻는다. 죄와 죽음을 올바로 바라볼 때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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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뱀은 옛날부터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데, 『성경』에 등장하는 뱀은 하느님과 적대적인 존재로 죄와 죽음을 상징하는 부정적인 동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뱀은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동물이고 하느님을 거슬러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죄로 저주를 받아 평생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어야 하는 가련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창세 3,1-15 참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싫다며 불평불만을 할 때도 불 뱀이 나타나 사람을 물어서 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모세는 하느님 말씀대로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습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기둥에 매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고 다시 생명을 얻었습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죄와 죽음의 상징인 뱀의 형상을 쳐다봄으로써 생명을 다시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기에도 끔찍한 십자가는 죄와 죽음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운명에 놓인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생명을 얻고 구원됩니다.
이냐시오 영신 수련 피정을 할 때면,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깊고 무거운지를 살핍니다. 그리고 마치 광야에서 구리 뱀을 쳐다보듯, 십자가의 주님을 관상하며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와 죽음의 고통을 대신 품고 계신 주님의 큰 사랑을 만나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였지요.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우리의 부끄러운 죄 너머에 주님의 은총 또한 풍성히 쏟아지고 있습니다. 단 하루도 죄짓지 않고 살 수 없는 우리지만 주님 십자가로 이렇게 숨 쉬며 살 수 있습니다. 원망의 눈물은 우리를 슬픔 속으로 더욱더 몰아넣지만 회개의 눈물은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니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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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생명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세상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분에게서 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은 끝에 가서는 모두 그분께 되돌아갑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이 그분께 돌아가지 않으려 하며, 그분의 뜻에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을 그저 바라보고만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몸소 부르시고 찾아오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때가 차자 당신의 외아드님을 인간에게 보내십니다. 그것은 당신의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아드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드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당신 사랑의 표현입니다. 거룩하신 아드님께서 지고 가시고 못 박히신 십자가는 곧, 인간을 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내어놓으실 수 있는 아버지의 대자대비하신 마음의 발로(發露)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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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사건’은 민수기에 나옵니다. 광야 생활에 싫증을 느낀 백성은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고생이 싫었던 것이지요.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보잘것없는 양식은 ‘만나’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매일 아침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적의 음식’이었습니다. 눈처럼 ‘하얀 만나’가 내려앉으면, 백성은 집으로 가져가 음식으로 만들어 먹었습니다. ‘눈과 입으로’ 체험하는 매일의 기적이었습니다. ‘만나’가 없었더라면 그들은 살 수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음식이 지겹다고 합니다. 기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깨우치시고자 시련을 내리십니다. ‘뱀’이 나타나 사람들을 해친 겁니다. 백성은 그제야 기적의 고마움을 깨닫게 됩니다. 모세는 구리로 만든 뱀을 기둥 위에 매달고, 그것을 바라보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뱀에게 물렸는데 ‘구리 뱀’을 쳐다본다고 어떻게 낫겠는가? 고통 속에서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모든 시련에는 주님의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내 생각만 내세우면 그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주님의 목소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구리 뱀’ 이야기의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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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큰 십자가는 성당에 있습니다. 작은 십자가는 집에 걸어 둡니다. 목걸이와 반지에도 십자가를 새깁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모든 것은 장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시련입니다. 억울함입니다. 마침내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합니다. 누군가를 위한 희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십자가를 모셔 두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삶은 방황합니다. 왜 이 고통을 주시는지, 어찌하여 이러한 시련에 부대껴야 하는지 불평하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의 민수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 생활에 싫증을 느낍니다. 보잘것없는 음식과 계속되는 여정에 넌더리를 내며 항의합니다. 고생하며 ‘시달려야 하는 이유’를 몰랐던 것이지요. 그러자 ‘불 뱀’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불평하는 이들은 뱀에 물려 죽어 갔습니다. 사람들이 뉘우치자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달아 올립니다. 그것을 쳐다보는 이들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민수 21장 참조).
우리 역시 십자가를 보면서 힘을 얻습니다. 삶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은총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하루에도 여러 번 십자 성호를 그으며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삶의 중심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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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교과서
-반영억 라파엘 신부-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8-9).
쳐다본 사람과 쳐다봐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지 않은 사람과의 운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사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면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6,24).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하고 고백했습니다. 성녀 줄리 빌리아르는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십자가는 여러분을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하면서 십자가를 가까이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니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았듯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왜 나만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 고 하소연합니다. 왜 나는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 속에서 십자가는 더 무거워 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는 언제나 첫 발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가 됩니다. 첫 발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성 요한 비안네).
사람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는 다르지만 모두가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난이 십자가일 수도 있고 오히려 큰 부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녀가, 남편이, 아내가, 동료가, 공동체의 일원이, 장상이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이, 언어의 습관이, 주변의 환경이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다듬고, 겸손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마침내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게 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게 해 주십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교과서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구원의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 현양축일에 사랑의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십자가!
http://cafe.daum.net/rara63/bmQo/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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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새 인생이 시작되는 희망의 자리>
-양승국신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정말 중요한 숙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십자가가 지닌 제대로 된 의미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십자가가 담고 있는 신비를 깨닫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나면 참으로 놀라운 은총 뒤따르는데, 그것은 바로 고통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신앙인,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당당할 수 있는 신앙인, 무거운 삶의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은총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정확한 개념 파악이 이루어진 사람의 하루하루는 매일이 천국으로 변화됩니다. 삶은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찬 경이로운 일상으로 변화됩니다. 매일 만나는 주변 사람들은 아름다운 하느님의 모상으로 거듭납니다.
십자가에 높이높이 매달리셨던 예수님, 사람들은 그의 몰골을 보고 기막혀했습니다. 너무나 끔직해서 혀를 내둘렀고, 치를 떨었습니다. 다들 철저한 실패의 인생으로 단정했습니다. 완벽한 패배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합니까? 예수님께서 매달리셨던 십자가는 더 이상 실패와 절망, 낙담과 좌절의 자리로 여기지 않습니다. 더 이상 십자가는 인생 종치는 자리, 삶이 끝나는 막장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보다 십자가는 새 인생이 시작되는 희망의 자리, 쇄신과 거듭남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새 출발의 자리, 작은 죽음을 통해 더 큰 생명을 획득하는 은총의 자리, 한 사람의 희생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축제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 이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람들은 곧 도래하실 메시아에게서 기대했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 모습은 다름 아닌 능력의 메시아였습니다. 권능의 메시아, 힘의 메시아, 정치적인 메시아, 암울한 현실로부터 해방시켜줄 승리의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그 모습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모습,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곳에 서 있는 낮은 자의 모습,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이의 모습, 결국 십자가 위에 높이 매달리신 가장 슬픈 모습의 메시아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앙을 이해하기 위한 최종적인 열쇠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살아가시면서 신앙의 의혹이 들 때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신앙생활 해나가시면서 여러 가지로 이해 안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정말 억울한 일, 정말 기가 막힌 일을 겪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역시 어쩔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희생이 일치를 이룬다
주님 현존을 두 눈으로 보아라
-배광하신부-
보라, 십자나무
보라
신구약 성경 강의록을 만드는 과정에서 구약의 가장 중요한 말씀을 나름대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구약성경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 사건입니다.
그런데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인간에게 동반자로 곁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대변해 주는 말씀으로 창세기의 야곱에게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교활하고 세속적 욕망과 집착이 강했던 사기꾼 야곱은 형의 복수를 피하여 도망갑니다. 그 외롭고 두려운 도피길에서 피곤에 지쳐 잠이 든 야곱의 꿈에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 15)
그런데 복음을 강의하면서 또다시 가엾은 인간과 함께 하신다는 예수님 동행의 말씀에 깊은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
그리고 창세기로부터 시작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긴 사랑의 편지인 성경 끝자락 요한 묵시록에서는 결국 인간을 떠나지 못하시는 절절한 하느님 사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묵시 21, 3)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찾아낸 하느님 인간 동행의 말씀은 공교롭게도 모두 “보라”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보는 것에서 시작되는 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하루에 151권의 책 분량에 해당하는 정보를 오감을 통해 받아들이고 처리한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시각을 통하여 83%, 청각을 통하여 11%의 정보를 처리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눈을 주신 까닭은, 눈을 통하여 당신의 위대한 업적과 창조의 놀라움을, 그 안에 인간을 위하시고 사랑하시는 현존을 ‘보라’하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보게 되면 세상은 온통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가득 찬 기적 안에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볼 수 있도록 만드신 그 은총의 눈을 우리는 감고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성경의 모든 증언을 통하여 하느님의 동행, 현존을 보았습니다.
때문에 모세는 단호히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주님께서 하신 이 모든 위대한 업적을 두 눈으로 보았다.”(신명 11, 7)
살아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을 향한 희망의 여정에 실패한 까닭은, 그들이 보았던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온갖 불평불만을 일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를 비롯한 탈출 1세대들은 가나안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보고도 보지 못한 의심의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실패한 구약의 불뱀 대신 신약의 십자가가 다시금 세워졌습니다. 낮엔 구름기둥으로, 밤엔 불기둥으로 현존하셨던 하느님 구원의 기둥이 십자가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를 대신한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이 십자나무에서 꽃피워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볼’ 것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다른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보면, 그 안에 구원의 길이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스스로 십자가에 들어 올려 진 까닭을 오늘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 그 구원의 은총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 15)
십자가가 위대한 까닭은, 첫 인간 아담으로부터 죄로 죽은 모든 인간들, 우주의 온갖 고통과 죽음이 이 십자가를 통하여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며 인간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 위로이시며, 고통의 길을 동행하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완성시킴과 동시에 고통과 죽음을 승리로 이끄셨다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때문에 십자가 밑에서 이 모든 광경을 목격한 백인대장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증언하며 말합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 27, 54)
참으로 십자가는 막혔던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 주며, 불신과 증오와 미움으로 얼룩진 인간과 인간을 용서와 사랑으로 연결시켜 주는 생명나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볼 때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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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고통의 변증법
-김찬선신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며 문득 30년 더 된, 그래서 까맣게 잊고 있던 군대 일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하사로 군 생활을 했습니다. 원해서 하사가 된 것이 아니라 신체 건강하고 대학 나왔다고 하사로 뽑힌 것입니다.
그런데 하사가 된다는 것은 큰 고통을 겪어야만 되는 것이고, 그래서 불행하고 운이 없다고 여겨지던 것이었습니다.
똑 같은 기간 군대 생활을 하는데 자기보다 군 생활을 조금 한 사람이 상급자가 되는 것을 상병이나 병장이 받아들이기 힘드니 졸병들을 시켜 어떻게 해서든지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의 괴로움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저의 선배 하사한테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매일 밤, 1-2시 쯤 술 먹고 들어와서는 잠자고 있는 저를 깨어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6개월을 그러하니 맞지 않으면 잠자리가 편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왜 하사가 되어가지고 병들한테 잘 해주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병들한테도 존댓말을 쓰고 한 번도 상급자로서 대우를 받으려들지 않고 시키지도 않았으며
가끔 하사들과 병들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지면 저는 하사들 편에 서지 않고 가운데서 뜯어말렸습니다.
그러니 저의 선임인 하사가 볼 때는 형편없는 하사였던 것이지요.
계속되는 구타에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였지만 그래도 제가 꺾이지 않으니 6개월 쯤 되어서는
그 선임 하사가 저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다른 부대로 전출되었습니다.
이때 이후 저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군 생활 14 개 월 만에 내무반장이 되었는데도
병들이 저의 지휘를 잘 따라주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제가 제대할 때 그 선임 하사가 일부러 찾아와 저에게 사과를 하고
사실은 저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에 왜 이 이야기를 길게 했느냐 하면 고통은 승리하였을 때 현양 받는 것임을 얘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심리학에서 새디즘과 매조히즘이 있습니다.
가학적 또는 피학적 성 도착증을 말함이지요. 그런데 십자가 현양은 고통을 받을 때 쾌감을 얻는
이 피학대성 만족과 다릅니다.
십자가를 현양하는 사람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고통이 싫습니다.
고통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다른 점이며
자기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고통을 기꺼이 받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사랑 때문에 기꺼이 고통을 받고 사랑 때문에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통에 굴복하지 않는 自己愛가 있는 것이며 고통보다 더 강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해도 삶은 살 가치가 있다고 자기 삶을 사랑하는 것이요
고통 다음에는 반드시 고통도 어쩌지 못하는 자유로운 부활의 경지가 있음을 믿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고통 때문에 인생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 때문에 인생이 더욱 찬란해지고 사랑이 자라는 것임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과 고통은, 사랑은 고통을 감수하게 하고 고통은 사랑을 자라게 하는,
변증법 관계입니다.
-전삼용신부-
저희 집은 오산 비행장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항상 비행기의 굉음을 들으며 자라야했습니다. 다른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말하곤 하지만 저희 어머니는 저를 비행장 철책에 걸려있는 것을 가져왔다고 하셨습니다.
어렸을 때 물론 이런 말이 농담인 것을 알면서도 가끔 심하게 야단을 맞으면, ‘정말로 나는 주워온 아이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또한 제 이름을 ‘삼용’이라고 귀하지 않은 이름으로 지어주신 것을 비롯하여 많은 아버지들이 그렇듯이 표현을 잘 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시기는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가끔씩 들 때도 있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께서 저희를 위해 고생하신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어머니가 하루 종일 남의 밭에 나가 품을 팔 때, 우유와 빵을 간식으로 받으면 그것을 드시지 않으시고 잘 두셨다가 일 끝나고 돌아오셔서는 가게 하나 없어 군것질을 하지 못하던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저는 그 때 먹었던 우유와 단팥빵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또 어머니는 생선 머리만 맛있다고 드셨습니다. 물론 생선의 머리가 가장 맛있기는 하지만 풍족하지 못한 양 때문에 몸통은 우리를 주시고 머리만 드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삼겹살을 구워주셨는데 어머니는 배가 부르다며 우리가 드셔보라고 드리기 전까지는 입에도 대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때는 어머니의 그 맘도 모르고 우리가 다 먹어 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골에 살 땐 저희 집이 비만 오면 잠기는 그런 동네에 있었는데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던 아버지는 가족을 생각하며 사람들이 말리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생명을 무릅쓰고 불어난 냇가를 헤엄쳐 집에 돌아오셨습니다.
아버지는 지금도 다리를 저시는데 그 이유는 우리를 위해 겨울에도 일을 하시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지셔서 허리를 다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몸으로도 우리를 위해 계속 일을 하셨습니다.
아무리 부모님께서 우리에게 싫은 소리를 하신다고 하더라도 이런 기억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태어날 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사랑의 희생들을 바라보며 부모님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희생은 사람을 갈라지지 않게 연결시켜주는 접착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오늘 저를 찾아오신 한 형제님께서 미사시간에 특별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외우는 ‘하느님의 어린양’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받기 위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구약을 이해한다면 즉각적으로 ‘아! 우리 죄를 위해 피를 흘리고 돌아가셔야 할 희생제물이 오시는구나!’라고 이해해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어린양은 구체적으로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게 했던 희생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전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어린 양을 희생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하늘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로 자신의 옷을 깨끗이 빨아 빛나는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베드로 1서 1장 19절엔 이스라엘 백성이 죄로부터 해방 된 것은 “어린양의 피”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사 때,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어린양의 가장 명확한 의미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흠도 티도 없는 “속죄 제물”을 의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인류의 죄를 위하여 희생되기로 준비되어 계셨지만(1베드 1,20), 그 완성은 당신이 깨끗하게 만드신 인류와 혼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아담이 옆구리에서 피를 흘려 하와가 탄생하였고 둘이 한 몸이 되었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와 교회가 탄생하였고 그 교회와 한 몸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성경의 시작이 이 아담과 하와로 시작되지만 성경의 끝은 두 번째 아담과 하와인, 죽임을 당하신 하느님의 어린양과 교회, 즉 천상 예루살렘과의 혼인잔치로 끝맺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 창조 때부터 계획된 커다란 창조와 구원의 계획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셔야 함을 예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영원한 생명이란 바로 우리가 나온 원천인 그리스도와 혼인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영원하시기에 사람이 되신 하느님과 한 몸이 되지 않고서는 누구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연 피를 흘리는 희생적 사랑은 갈라졌던 관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당신과 하나로 연결시켜 주시되 하느님만이 지닌 영원한 생명까지도 누리게 해 줍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을 믿어야 하듯이, 십자가도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임을 믿어야합니다.
많은 교회 간판에,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씌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글로 표현하지 않고 십자가로 보여줍니다. 우리를 위해 고생을 하신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