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7일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

2011. 8. 27. 오전 7:4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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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27일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

 

 

모니카 성녀는 332년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의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녀는 비신자인 남편과 혼인하여 세 남매를 두었다. 모니카 성녀는 기도와 희생으로 남편을 개종시키고 방탕한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마니교에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노가 회개하여 세례를 받고 성인이 된 데에는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남다른 기도와 눈물이 있었다. 아들이 회개의 길로 들어선 지 얼마 뒤인 387년, 성녀는 쉰넷의 나이로 로마 근교에서 선종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오 25,14-30)

   ‘Well done, my good and faithful servant.
Since you were faithful in small matters,
I will give you great responsibilities.
Come, share your master's joy.'

   

  

 주인은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재산을 맡겼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맡긴 탈렌트의 양이 달랐다. 많이 받은 이는 많은 이윤을 남겼다. 그러나 하나를 받은 이는 우왕좌왕하다가 그 하나마저 빼앗겼다. 탈렌트는 능력이다. 주인의 뜻에 맞도록 사는 능력이다

 ☆☆☆

 

 탈렌트는 예수님 시대의 화폐 단위로, 한 탈렌트는 노동자 한 명이 이십 년 동안 일해야 받을 수 있는 품삯과 맞먹는 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무지무지한 금액을 비유에 등장시키셨습니다. 확실한 느낌을 가지라는 의도였을까요? 아니면 하느님의 은총이 그만큼 크다는 암시였을까요? 아무튼 다섯 탈렌트와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잘 활용하여 두 배의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를 받은 사람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왜 그랬을까요? 너무 적었기 때문일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가르침은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누구나 탈렌트를 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한 탈렌트도 엄청난 돈입니다. 아무것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 탈렌트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펼쳐 가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비유의 핵심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다섯 탈렌트와 두 탈렌트로 이윤을 남긴 종들에게 한 주인의 말입니다. 주인과 함께 나눌 기쁨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통하여 깨닫는 삶의 기쁨입니다.

☆☆☆

예수님 시대에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화폐 단위 한 탈렌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것으로, 환산하면 노동자가 6천 일을 일해야 얻을 수 있는 아주 큰 돈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특별히 타고난 소질이나 재능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탈렌트(talent)는 바로 여기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탈렌트를 소질이나 재능으로만 이해하면 왠지 불공평해 보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보듯이 누구는 다섯 탈렌트를 받았는데, 누구는 한 탈렌트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TV에 나오는 숱한 재주꾼들이나 주변의 재능 있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왠지 자신은 하느님께 받은 것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복음 속에 나오는 탈렌트를 세상 것으로 이해하면 불공평하다고 생각되며 불만스러워집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탈렌트는 세상의 허황된 것을 얻으라고 주는 재능과 다릅니다. 복음적 탈렌트의 본뜻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이 사랑의 능력으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희생하고 봉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탈렌트를 많이 받았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못 받았다고 불만스러워할 것도 없어집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그만큼 더 많이 희생해야 하고, 적게 받은 사람은 적게 받은 대로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다섯 탈렌트를 받고 두 배로 늘린 사람이나, 두 탈렌트를 받고 두 배로 늘린 사람이나 모두에게 주님께서는 똑같이 칭찬을 해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리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세상을 건설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탈렌트는 노력한 결과가 중요합니다. 그 대가는 공평합니다

 

 

할 수 있는 것 먼저 하세요

  -반영억라파엘신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맞은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각자의 그릇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모두가 다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하였다고 아쉬워합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받지 못했다고 투덜댑니다. 때때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만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될 것을 스스로 비교하여 놓고는 비참함을 맛보기도 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열을 가진 것에 감사하기보다 하나를 갖지 못한 것을 불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복음을 보면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 그리고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중 둘은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 두고 말았습니다. 각자의 능력대로 주었으니 할 수 있는 만큼 활용하면 되는데 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달란트를 주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기대가 있었을 터인데 그 바람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처음부터 주인의 동기를 오해하고 하고 있었습니다. 더 벌지 못한 것에 대해 잘못하였다고 하면 될 것을 가지고 오히려 뻔뻔스럽게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마태25,24) 하고 주인을 비난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구제불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마다 탈란트를 최대한 활용하기를 바라십니다. 각자는 자기가 받은 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결실을 맺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 할 수 없는 일을 꿈꾸는 일은 허상입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는 말씀은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잃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뻔히 잃을 것을 알면 어떻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작은 일에 성실하며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 큰일을 맡으면 그야말로 큰일을 내고 맙니다. 매사에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역량에 따라 귀한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귀한 열매는 주님과 함께 이루어지는 작은 일들의 연속으로 만들어집니다.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뜻

성당에서 유난히 큰 소리로 기도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빵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또 큰 소리로 기도하자 옆에 있던 이웃집 사람이 그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당신은 목소리를 낮추는 대신 빵이나 크게 만드시오, 그게 하느님의 뜻이오.”

 

<탈렌트의 비유>

- 송영진 모세 신부

8월 27일의 복음 말씀은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이야기에 세 명의 종이 등장하는데, 두 명은 받은 탈렌트로 돈을 벌어서 두 배로 만들고, 다른 한 명은 그냥 가지고 있다가 돌려줍니다. 돈을 더 번 두 사람은 칭찬을 받지만 아무것도 안 한 다른 한 명은 쫓겨납니다.

이 이야기에서 탈렌트는 ‘하느님의 숙제’를 뜻합니다. (탈렌트라는 단어의 뜻이 숙제라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받은 탈렌트로 돈을 더 벌어들이라는 것이 숙제입니다.

 하느님의 숙제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교황은 교황으로서 해야 할 숙제가 있고, 교구장은 교구장으로서 해야 할 숙제가 있고, 본당신부는 본당신부로서 해야 할 숙제가 있고, 일반 신자들은 일반 신자로서 해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직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직무를 포함해서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교황은 교황이기 때문에 더 많은 숙제를 받았고, 일반 신자들은 일반 신자이기 때문에 교황보다는 적은 숙제를 받았습니다. 나중에 각자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때, 교황이 더 많은 것을 제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은 일반 세상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받았다면 더 많은 결과물을 제출해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 남들이 더 많이 받은 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좋아할 것도 없습니다.)

 루카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를 보면, 인간 세상의 불공평함이 적나라하게 보이는데, 나중에 그 불공평함이 모두 공평하게 바로잡히게 됩니다.

부자는 라자로보다 훨씬 더 많이 받았지만(사실상 모든 것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한 일이 없기 때문에 나중에 저승(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되고, 라자로는 사실상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어서 나중에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어의 탈렌트는 원래는 당시의 화폐 단위이기도 하고, 무게 단위이기도 했습니다.이 단어는 영어의 talent(탤런트)가 되었는데, 보통 재주, 재능 등으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복음 말씀의 탈렌트의 비유에서는 재주, 재능보다는 ‘은총, 은혜’의 뜻이 더 강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혜가 많다는 것은 곧 나중에 제출해야 할 숙제가 많다는 뜻이다, 라는 것이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은혜가 아니라 재능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뜻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남들보다 재능이 많다는 것도 하느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 숙제는 선택이 아니고 의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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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이란 은총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이면서 동시에 받은 은총의 숙제를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어떤 소원을 빌기 전에 먼저 그 소원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그것이 그대로 고스란히 숙제로 남게 된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몸이 아파서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 기도가 이루어져서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면 그것은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 건강은 그대로 그 사람의 숙제가 됩니다.

건강해진 몸으로 하느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병에 걸리지 않고 처음부터 건강했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 제가 이렇게 저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약속하는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말은, 소원을 안 들어주시면 그런 일들을 안 하겠다는 뜻이니까, 하느님을 상대로 흥정하는 것처럼 되고, 그래서 결코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이라고 조건을 달지 말고, 당장 그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습니다. 건강해진 다음에, 사업이 성공한 다음에, 시험에 합격한 다음에, ...... 다음에, .... 다음에 하지 말고, 지금 하라는 것입니다. 받기를 바라는 은총보다 이미 받은 은총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자꾸만 다음에, 다음에... 하다가 ‘죽은 다음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숙제 결과물을 제출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마태 25,14-30)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하늘 나라를 어떤 사람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가 돌아와서는 얼마나 더 많은 이익을 남겼는가에 다라서 보상을 해주는 이야기이다. 얼핏 들으면 얼마나 많은 이익을 남겼느냐에 따른 보상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에서 포상하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달란트를 많이 받은 사람이 더 유익하고 덜 받은 사람은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그리고 일반 사회에서처럼 성과에 다른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에 방법이야 어떻게 되든 많은 이익만 남기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많은 이익을 남기면 하느님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가난하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즉 얼마나 많은 물질적인 부를 누리느냐에 따라서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든지 아니면 축복을 받지 못하였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과연 그런 뜻인가? 아니다.
 
그러면 달란트란 무엇인가? 우선 달란트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달란트란 그 사람의 어떤 능력이나 재물의 축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복음에 이어서 나오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사랑의 행위를 말한다. 사랑은 하느님의 재산이다. 따라서 가난한 이웃에게 베푸는 나의 사랑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요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이처럼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나도 이웃에게 베풀어야할 사랑을 말한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이방인이었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4-36)라고 말한 사랑이다.

 

아무리 재능이 탁월해서 많은 일을 하고 그래서 많은 일을 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성 바오로의 말씀을 다시 한번 들어 보자.

 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8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고전13:1-13)

 

 

오늘 복음은 세 가지 시간대를 말하고 있다. 즉 과거는 우리가 달란트를 받은 시간이고, 현재는 우리가 받은 달란트를 사용하는 시간이고, 미래는 우리가 사용한 달란트에 대한 셈에 따라서 상을 받는 시간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지 하느님께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내가 달란트를 사용한 것에 대한 셈만 하실 뿐이다. 미래는 지금 여기에서 내가 사용한 것에 대한 평가일뿐 다른 것을 가지고 셈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왜 이런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일까? 오늘 우리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지금 내가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거나 아니면 잘못 사용하고 있다면 마지막 날까지 가지 말고 지금 교정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날에 가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미리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차 심판날에 예수님께서 어떤 문제를 내실 것인지를 미리 알려 주시는 것이고 그 때의 시험 답안지인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은 하나도 실천하지 않고 믿기만 하면 성당에만 왔다 갔다하면 죽음 후에 천국 즉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이런 신앙생활은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의 생각과 같이 잘못된 신앙생활이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 가서 주인님의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 하느님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그 어떤 사랑도 실천하지 않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바로 한 달란트를 받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가 받은 달란트만큼 사랑을 실천하면 된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많이 실천할 수 있는 좋은 환경, 좋은 자리에 있어서 많은 사랑을 실천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랑은 활동 범위가 좁고 또 여건이 여의치 못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기 능력껏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만큼 사랑을 실천하면 된다. 문제는 자기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얼마나 사랑으로 실천하였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하였는지 일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하였느냐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것을 얻을 것이다. "(마태 16,24-25) 라는 말씀이 바로 구체적으로 오늘의 말씀을 이야기 한 것이다.

 

사랑은 다른 이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재산인 사랑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일이고 그 사랑은 지금 여기에서 실천되어져야 한다. 그런 사람만이 이 다음에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는 축복된 말을 듣게 되리라

 

<눈물의 아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끝도 없는 자식의 방황과 탈선 앞에서 ‘죽을 고생’을 다 하는 어머니들을 저는 자주 만납니다.    어느 정도라야 하는데, 어떤 녀석들은 그 정도가 지나칩니다.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어떤 어머니는 자다가도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놀란 가슴이 이제 심장병으로 발전했습니다.

     수 백 개에 달하는 아이가 저지른 ‘건수’ 뒷감당하느라 어머니는 바쁩니다. 부지기수로 파출소로 불려갑니다. 몇 번이나 법정에 섭니다.

     그런 상황 앞에서 대개 ‘더 이상 안 되겠구나. 내 능력 밖인가 보다’ 하고 물러서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한 어머니는 끝까지 자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불려가는 곳 마다 눈물로 하소연합니다. 자식 때문에 너무 울어서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 ‘대단한’ 어머니를 생각할 때 마다 언젠가 분명히 좋은 날이 오리라고 확신합니다. 어머니가 자식 때문에 흘린 그 눈물을 하느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머니의 눈물과 기도와 정성이 결국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모니카 성녀 역시 아들 아우구스티노 때문에 날이면 날마다 눈물로 지새우던 어머니였습니다.

     비행과 범죄 쪽은 아니었지만, 아들 아우구스티오의 윤리적 방황과 타락, 마니교에의 심취는 어머니의 마음을 찢어질 듯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아들 아우구스티노 때문에 흘린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은 그 양이 엄청나 강물이 될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어머니 모니카가 흘린 눈물 때문에 아들 아우구스티노가 구원됩니다.

     오랜 기도와 눈물의 결실로 드디어 아우구스티오가 회심의 길을 걷기 시작하던 어느 날, 모니카는 덜컥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심으로 인한 기쁨에 모니카는 목전에 다가온 죽음조차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내게 있어서 세상 낙이라곤 이제 아무것도 없다. 현세의 희망(아들의 회심)이 다 채워졌는데 다시 더 할 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어 했던 것은 한 가지 일 때문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바로 그것이었단다. 하느님께서 과분하게도 내 청을 들어주셨구나.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하느님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니, 그럼 내 할 일이 또 무었이겠느냐?”

     급작스런 객지에서의 어머니 죽음 앞에 너무나 슬퍼 제 정신이 아니었던 아우구스티노에게 모니카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아들아, 내 몸뚱이야 어디다 묻든지 그 일로 해서 조금도 걱정하지 말거라. 한 가지만 너에게 부탁한다. 네가 어디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다오.”

     회심이전의 청년 아우구스티노의 품행이 아무리 ‘막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모니카는 절대로 그를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부드러운 태도로 아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아들을 위해 끊임없이 대속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였습니다. 아들이 짓는 죄를 대신 보속하기 위해 고신극기를 계속했으며,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자선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어느 날, 모니카는 한 주교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아들 문제를 털어놓습니다. 이야기 도중에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는 모니카를 바라보며 주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안심하십시오.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할 수 없습니다.” 

 믿어주시는 하느님      

 

 

-김인한 신부-

 신학생 시절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무료병원에서 일할 때, 심한 알콜 중독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고 퇴원을 하자마자 술에 취해 병원을 찾아와서 또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이가 그를 내쳤는데, 오직 한 수녀님이 ‘그래도 우리는 이 사람이 치유될 것을 믿고 받아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상 모든 이가 구제불능이라고 했던 그는 이제 중독에서 벗어나 아마 지금도 그 병원 앞마당을 쓸고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자비로운 주인의 비유, 사랑 가득한 주인의 비유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탈렌트를 받아서 쓰는 종이 아니라, 주인이 종들을 먼저 믿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충실한 종은 불리고, 불충한 종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지만, 어떻든 간에 주인이 먼저 그들을 믿고 탈렌트를 맡겼다는 것입니다.
불신하여 맡기지 못하고 떠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주님은 종들을 믿고 편안히 먼 길을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먼저 믿어주신 주님,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신 주님, 우리를 먼저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먼저
구원해주신 주님, 우리를 먼저 안아주신 주님. 그런 분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나 자신조차 나를 감당할 수가 없는데, 그런 나를 먼저 믿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을 우리는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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