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1일 연중 제6주간 토요일 - 마르코 9,2-13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1-7
형제 여러분,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3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4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믿음 덕분에 아벨은 의인으로 인정받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믿음 덕분에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5 믿음으로써, 에녹은 하늘로 들어 올려져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하늘로 들어 올리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늘로 들어 올려지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6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7 믿음으로써,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관하여 지시를 받고 경건한 마음으로 방주를 마련하여 자기 집안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세상을 단죄하고, 믿음에 따라 받는 의로움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 주님, 영원히 주님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 나날이 주님을 찬미하고, 영영세세 주님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주님은 위대하시고 드높이 찬양받으실 분, 그 위대하심은 헤아릴 길 없어라. ◎
○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 주님 업적을 기리고, 주님 위업을 전하리이다. 사람들은 주님 엄위의 찬란한 영광을 이야기하고, 저는 주님의 기적들을 노래하리이다. ◎
○ 주님, 주님의 모든 조물이 주님을 찬송하고, 주님께 충실한 이들이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주님 나라의 영광을 말하고, 주님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13
그때에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11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13 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유다인들은 엘리야 예언자가 종말에 다시 온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죽지 않고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준비’를 위해 온다고 답변하십니다. 그러면서 세례자 요한을 암시하십니다.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면 누구나 ‘엘리야’가 되고 ‘세례자 요한’이 됩니다. 우리 주위에도 엘리야는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하기 싫은 일’이 엘리야일 수 있습니다. 하기 싫은 교회 활동이 요한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 활동을 오해합니다. ‘하도 하라니까’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끌려가는 신앙생활입니다. 오히려 한 걸음 앞선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도처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엘리야와 요한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제 우리는 김 수환 추기경을 떠나보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하신 복음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어제 저는 관위에 누워계신 추기경님의 모습을 보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말년에 추한 모습 보이지 않으시고 임종의 순간까지 훌륭한 모습 보이시며 잘 돌아가 주심에 대해 감사드렸습니다.
하느님께, 그리고 추기경님께.
저의 속내를 보이자면 사실 저는 추기경님이 나이 드셔서 변절하실까봐 걱정했습니다. 나이 들어 노망하셨다는 소리 들으실까봐 걱정했습니다.
실로 우리는 훌륭하던 사람이 나이 들어 추하게 그 모습이 변한 경우를 많이 봐왔습니다.
청빈하게 살던 사람이 돈을 밝힌다던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던 사람이 부자들과만 어울린다던가. 권력에 초연하던 사람이 권력과 영합한다던가. 이런 모습을 너무도 많이 보았기에 추기경님마저 그러실까봐 걱정했습니다.
추기경님마저 변하시면 둑이 무너지고 마지막 보루마저 무너지듯 그러잖아도 유혹에 허약한 저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려 저의 변절을 사정없이 許하게 될까 두려워했던 것이겠지요.
아무튼 관 위에 계신 추기경님은 겉모습은 눈도 움푹 들어가고 볼품없는 노인네의 모습으로 변하셨지만 본모습은 잃지 않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모습이 추기경님의 본모습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필리비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셨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는 한 인간,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지만 사실은 수천 인간의 모습으로 변모하여 나타나십니다.
마태오 복음 25장의 말씀처럼
굶주린 이에게는 굶주린 이의 모습으로,
목마른 이에게는 목마른 이의 모습으로,
헐벗은 이에게는 헐벗은 이의 모습으로.
감옥에 갇힌 이에게는 감옥에 갇힌 이의 모습으로,
병자에게는 병자의 모습으로,
혁명가에게는 혁명가의 모습으로,
철학자에게는 철학자의 모습으로,
농부에게는 농부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김 수환 추기경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주교관에 고형물 또는 석고상처럼 계시지 않고 “너희와 모든 이에게”라는 당신의 표어처럼 모든 이에게 모든 이의 모습으로 다가가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이에게 모든 이가 되는 것, 이것이 사실은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이의 모습으로 있는 것은 사실 하느님과 같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처럼 지상의 하느님 나라인 타볼산에서 성도들과 거닐던 사람만이 지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천상의 풍모를 지니십니다.
불가마 속에 던져져도 하느님과 같이 거님으로 불에 타지 않은 세 청년처럼 관상으로 하느님과 같이 거니는 사람만이 지상으로 내려와 사람과 같이 되면서도 천상의 풍모를 잃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높은 관상으로 하느님처럼 되지 않으면 세상에서 살다가 세속화되어 버리고 말 것이며,천상의 풍모를 잃고 타락하고 추악한 천사가 되고 말겠지요?

오늘 오전에 로마에서도 신자들과 수녀님, 사제들이 함께 모여 김 추기경님의 추모미사를 함께 했습니다. 주례는 한인 성당 주임 신부님인 김종수 신부님께서 하셨습니다. 그 분은 강론 때 김 추기경님의 죽음이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얼마나 큰 반향일 일으켰는지를 설명해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분의 죽음이 큰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교황청은 한국보다 조금 늦게 이 소식을 접했습니다. 보통 추기경님이 돌아가시면 그것에 대한 소식을 전하기는 하지만 이번엔 의외로 크게 보도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40만이 넘는 조문행렬이 이어지자 교황청도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매일 그것에 대해 보고하고 교황님도 특별히 ‘고귀한 영혼’이 하늘로 가셨다며 애도를 표하셨습니다. 한국에서의 조문 행렬은 신자, 비신자 할 것 없이 몇 초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몇 시간을 추운 길에서 줄을 서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추위와 기다리는 시간에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장례미사도 공중파 텔레비전에서 모두 생방송 중계 되었고 김 추기경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각 방송국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며 이미 돌아가신 그 분을 더 알고자 하는 모습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미사를 주례하신 김 신부님께서도 이와 같이 한 분의 죽음이 이렇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고 그것이 단순히 추기경님의 훌륭한 삶뿐만이 아니라 지금의 세상 사람들의 허무한 마음을 잘 표현해주는 것이 아니냐고 해석하셨습니다. ‘지금 한국을 이끌 위대한 지도자가 없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동안 종교를 초월하여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하셨던 한 분의 죽음으로 크게 표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은 정치를 하신 일도 없고 직접 투쟁을 하신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의 편에 서서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할 때 당당히 권력에 맞서실 줄 알았고, 북한을 옹호하면 빨갱이라고 잡혀갈 때에도 통일을 부르짖으셨으며,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다가가실 줄 아셨습니다. 이는 권력이나 명예를 추구해서가 아니라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신 것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선택된 제자 셋을 데리고 타볼산으로 올라가 당신의 감추어진 신성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분들은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에서의 대표적인 백성의 영도자들이었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까지 이끈 인물입니다. 그가 위대한 영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할 줄도 모르는 인물이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한 것뿐입니다. 이것을 모세의 율법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법입니다. 모세가 위대한 영도자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따르도록 권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이 모두 하느님을 버리고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섬길 때 홀로 그들과 맞서 다시 백성들이 하느님을 향하도록 만든 인물입니다. 그는 갈멜 산에서 우상을 섬기는 예언자들을 물리치고 다시 땅에 불과 비가 내리도록 한 인물입니다. 역시 그도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 돌리려고 한 것이 위대한 영도자가 되는 참된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은 겉으로는 영광된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로는 당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모세의 법의 정신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체적으로 살아져야 함을, 갈멜산에서 성령의 불과 생명의 물이 내려오게 하기 위해 재물로 바쳐진 소처럼 당신도 희생되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백성들의 마음을 세상 가치들에서 영원한 사랑의 가치로 옮겨가게 하신 참 위대한 영도자이십니다.
하느님은 제자들에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의 세 명의 사도는 사도 중 특별히 선택된, 지금으로 말하면, 추기경님들입니다. 그들도 위대한 영도자가 되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라야 한다는 뜻이고 김 추기경님도 그 정신으로 당신의 삶을 바치셨습니다. 대통령 선거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사람들은 세상에서 부자로 잘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김 추기경님은 삶의 가치가 더 큰 것에 있음을 보여주셨고 사람들도 결국 그 분의 삶에 고개를 숙입니다. 우리들도 세상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참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데 지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바람이 분다. 다시 살아야겠다.>
오늘 주님의 변모와 관련된 복음구절을 접하면서 ‘변화’란 주제로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평생 변화와 변모의 삶을 사셨습니다. 나자렛 예수에서 골고타 언덕 위 수난 당하시는 메시아에로의 변화, 인간 예수에서 신성이 깃든 그리스도에로의 변화를 거듭 추구하셨습니다.
변화, 변모, 쇄신… 이런 단어를 들을 때 마다 우선 찹찹한 심정을 감출 수 없습니다. 오랜 세월 그토록 변화되기를, 좀 더 나아지기를 기대해왔지만, 언제나 제자리를 맴도는 제 수도생활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정말 한번 보란 듯이 변화되고 싶지만 생각뿐이요, 다짐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변화를 꿈꿉니다.
그러던 와중에 한 아이로부터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 어떤 소식보다 반가운 소식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주거 이전’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그 메일 하나로 다 날아갈 정도였습니다.
“신부님, 저 기억나세요? 저 **예요. 가출문제로 신부님 엄청 속 썩혀드렸던 **. 돌아보니 그래도 그때가 좋았네요. 신부님, 아직도 제 걱정하시죠? 이젠 걱정 안하셔도 되요. 저도 이젠 정신 좀 차렸어요. 한 가지 기쁜 소식이 있어서 메일을 드립니다. 올 봄이 가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려구요. 약속하신대로 공짜로 주례 서주실거죠?”
사고뭉치중의 사고뭉치, 개구쟁이 중의 개구쟁이 친구였는데, 그래도 붙임성 있고 예쁜 구석이 있던 친구여서 마음을 많이 주었던 친구였는데, 벌써 결혼을 준비한다니 정말 기뻤습니다.
아이가 보내준 메일을 몇 번이나 읽어보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너무 어려 보여서, 너무 철이 없어서 ‘언제 인간 될까?’ 걱정이 엄청 많았는데, 의젓한 모습으로 변화된 친구의 모습에 저절로 감사의 기도가 흘러나왔습니다. ‘변화되기까지는 오랜 기다림이 필수구나’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보다 나은 삶에로의 변화를 꿈꾸지요. 신앙인들도 마찬가지겠지요. 보다 깊은 신앙의 소유자로 탈바꿈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보다 성숙하고 영적인 인간으로 쇄신되기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변화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머물러 있던 틀에서 나온다는 것은 정말 힘겨운 일입니다. 어제의 나와 결별한다는 것은 여간해서 힘듭니다. 지금까지 지녀왔던 과거의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죽기보다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한 대단한 수행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갈고 닦은 수행방법이나 그가 도달한 성덕은 꽤 출중한 것이어서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 큰 뜻을 품고 인간 세성을 떠나 깊은 암자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변화를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암담했습니다. 20년 이상 기도와 수행생활에 정진했지만 스스로 생각할 때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20년 이상 노력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비참했던 나머지, 허송세월했던 지난날이 너무나 아까웠던 나머지 수행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아깝고도 아깝도다. 금쪽같은 20년 세월 동안 헛고생만 했구나.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하랴? 허망하게도 20년 세월이 물거품이 된 이 마당에 더 이상 무엇을 망설일 것인가? 깨끗이 접고 세상으로 돌아가자.”
실망하고 상심했던 나머지 수심으로 가득 긷든 얼굴의 수행자가 막 길을 떠나려 할 때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대가 몸부림치던 그 세월이 바로 그대의 영광이 되었다. 그대가 계속 붙들고 있었던 변화에로의 갈망이 그대를 살렸구나. 이제 그대는 그대가 고민했던 그 세월, 그대가 힘겨워했던 그 세월로 인해 행복해지리라. 그대가 지녀왔던 갈등과 상처 때문에 이제 그대는 자유로워지리라. 그대가 안고 왔던 고민 때문에 결국 그대는 깨달음에 도달하리라.”
비록 오늘 우리 삶이 너무나 하찮아보일지라도 ‘변화에로의 가능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변화는 우리의 마음처럼 그렇게 빨리 다가오지 않습니다. 회개 역시 전광석화처럼, 번개처럼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랑비처럼 다가오는 것이 변화요 회개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이라 할지라도 언젠가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오실 주님, 우리를 한 차원 높은 삶에로 이끌어주실 주님, 우리의 얼굴을 해맑은 천사의 얼굴로 변모시켜주실 주님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열심히 일상을 살아내길 바랍니다.
“바람이 분다.
운명의 책장들을 넘긴다.
다시 살아야겠다.”
(오세영, ‘책장을 넘기며’ 중에서)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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