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9일 연중 제6주간 목요일 - 마르코 8,27-33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9,1-13
1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2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다. 이것들이 너희의 손에 주어졌다. 3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풀을 주었듯이, 이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
4 다만 생명 곧 피가 들어 있는 살코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5 나는 너희 각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나는 어떤 짐승에게나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남의 피를 흘린 사람에게 나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6 사람의 피를 흘린 자, 그자도 사람에 의해서 피를 흘려야 하리라.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7 너희는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 땅에 우글거리고 그곳에서 번성하여라.”
8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9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들과 내 계약을 세운다. 10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곧 방주에서 나와, 너희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땅의 모든 들짐승과 내 계약을 세운다. 11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2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13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7-33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꾸짖으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다면 축복입니다.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구세주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란 의미입니다. 어떤 세상일는지요? 나와 연관된 세상입니다. 책임질 사람이 있고 내 소유와 꿈이 있는 세상입니다. 바로 그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세주란 고백은 엄청난 신앙 행위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고백할 수 있는지요? 진심으로 할 수 있는지요? 질문에 답해 보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누구나 예수님의 손길을 만납니다. 그분께서 개입하셨다고 느껴지는 ‘사건’입니다. 분명히 그분께서 간섭하셨다고 느껴지는 ‘만남’입니다. 그때 우리는 ‘모든 원인은 당신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을 구세주로 선언하는 행위가 됩니다. 기쁘고 좋은 만남에선 쉽습니다. 그러나 억울하고 힘든 사건에선 괴롭습니다. 평소의 연습이 없다면 더욱 어려운 고백이 됩니다.
신학교엔 ‘똘레병’이란 것이 있습니다. 똘레는 라틴어로 ‘자르다’라는 ‘tollere’에서 나온 말로서 ‘신학교에서 잘릴까봐 두려워하는 병’을 의미합니다. 요즘엔 그리 심하지 않지만 옛날 신부님들은 조금만 잘못하면 학교에서 쫓겨나기 일쑤였기 때문에 그런 병명을 지었던 것 같습니다.
한 불완전한 사제의 잘못으로 많은 신자들을 잃을 수 있기에 사제로 선발하는 기준이 까다로워야 한다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사람이 판단해서 학생들을 자르거나 하는 일들은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그 부르심을 따른 것은 자신이고 그래서 성소에 대한 선택도 자신의 의지를 크게 반영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사제가 되는 순간은 그 ‘똘레병’에서 해방되는 날입니다. 한 번 서품 받으면 누구도 쫓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 열심히 살아 서품을 받은 신부님들은 공식적으로 ‘검증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위험성도 있는데 그 험난한 시기를 거쳐 왔기 때문에 사제가 되는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높은 수준의 사람이 된다고 착각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극단적인 신부님은 사제가 수녀님이나 신자들보다 더 높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수녀가 미사드릴 수 있어? 신자가 고해줄 수 있어? 못하잖아.” 결국 사제가 된 것이 본인이 똘레 당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미사나 고해는 성모님도 못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성모님이 성직자들보다 덜 거룩하시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성직자들의 영적인 능력은 성모님을 통해서 옵니다. 어떤 특정한 은총이 주어진 것이 자신의 거룩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은총은 자신보다 교회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개인적인 거룩함으로 받는 은총도 있지만 교회를 위해 개인의 거룩함에 관계없이 주어지는 은총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황님이라고 해서 혹은 많은 기적을 행한다고 해서 꼭 거룩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엔 우리의 첫 번째 교황님인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어보십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 어떤 이들은 엘리야,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소경의 눈을 띄어주십니다. 소경이 영적인 눈을 뜨자 영적인 눈으로 사람을 나무로 보게 되었습니다. 상징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의 상징입니다. 생명나무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보기 위해선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충만히 받아서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이는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에서는 그것이 사람의 힘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일러주셔서 가능했다고 하시며 그렇게 선택된 베드로에게 교회의 수위권과 천국의 열쇠를 주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잘나서 그런 축복을 받는지 압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수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교만한 마음에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을 설득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이 뽑은 첫 교회의 수장을 ‘사탄’이라 부르시며 야단치십니다. 베드로는 하늘로 솟았다가 땅으로 고꾸라졌습니다. 그런 성령의 은총이 자신의 영성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여 주신 것임을 잊고 자신의 공로 때문인지 알고 교만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직자든 수도자든 교회에서 봉사하는 누구이든 하느님께서 그런 봉사의 능력을 주신 이유는 자신의 능력이나 거룩함보다도 교회를 위해 특별한 은총을 주신 것임을 깨닫고 교만해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 삶의 사탄들
원수, 마귀는 예쁜 여자의 모습으로 옵니다.
원수, 마귀는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다가옵니다.
원수, 마귀는 선물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원수, 마귀는 비위를 맞추고 아부를 하며 옆에 진을 칩니다.
원수, 마귀는 맛있는 것을 자꾸 사줍니다.
원수, 마귀는 건강을 위해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저의 수도생활 경험에서 하느님은 많은 경우 원수, 마귀의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하느님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하느님은 듣기 싫어하는 사람의 말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십자가를 선물로 주십니다.
하느님은 어디를 가도 괴롭히고 상처를 주는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쓰디쓴 맛과 병고를 친구로 주십니다.
그런데 사람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눈을 홀리고 듣기 좋은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빼앗아가고 선물은 하느님의 은총을 갈망하지 않게 하고 아부는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게 하고 맛있는 것은 영적인 미각을 무디게 하고 順境은 逆境을 거부하고 안주하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께 가는 여정을 거부하고 이 세상에 안주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는 주님께 사탄으로 단죄 받았습니다.
주님을 위한다는 것이 주님의 갈 길을 막는 것이 됨으로 사탄이 되었습니다.
우리 삶의 어떤 것들이 주님께로 가는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인지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언제나 위안을 주시는 베드로 사도>
베드로의 생애를 묵상할 때 마다, 스승 예수님께 혹독하게 혼나는 베드로의 얼굴을 떠올릴 때 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죽어도 따라주지 않았던 베드로, 그래서 자주 슬펐던, 그리고 우울했던 베드로의 모습을 바라볼 때 마다 제 개인적으로 많은 위안을 받습니다.
어찌 그리도 저와 빼닮았는지 모릅니다. 정말 제대로 된 제자로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래서 결심하고, 시작은 잘 하는데, 뒷받침이 그렇게 안 됩니다. 머리로는 분명히 될 것 같은데, 삶이 받쳐주지를 못합니다.
첫출발 때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이 달려들던 그 열렬한 마음, 예수님을 향해 활활 타오르던 그 불같은 열정, 순수한 신앙, 그런 초심을 항상 유지하고 싶었는데… 생각뿐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일단 용감히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워낙 신앙의 기반이 약하다보니, 의지력이 부족하다보니, 뱁새가 황새 쫒아가는 기분입니다.
베드로의 경우 ‘수제자’란 직분까지 맡다보니 거기서 오는 부담감이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아직도 세속의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았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아직도 영적인 삶보다는 육적인 생활에 익숙해있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단의 대표 격이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요청과 제자단의 미성숙 사이에 끼여 참으로 고생이 많았습니다.
학창시절, 돌아보니 한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담임선생님들께서는 당신들이 담당하셨던 학급에 문제가 생기거나 뭔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먼저 반장을 불러 혼을 내거나 족쳤습니다.
제자단의 반장이었던 베드로 역시 자신이 맡았던 직책상 무수히 교무실로 불려갔습니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혼도 엄청 많이 났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도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엄청 야단을 맞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옛 삶의 방식, 옛 사고방식을 떨치지 못하는 제자들, 무조건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는 제자들을 향해 엄청난 꾸중을 하시는데, 반장인 베드로가 대표로 꾸중을 듣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베드로의 문제는 다른 무엇에 앞서 ‘십자가 신비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습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은총으로 다가오신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개방성 부족’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 말씀에 베드로는 크게 실망합니다. 그간 예수님께 걸었던 모든 기대가 수포로 돌아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따졌던 것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이토록 우둔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한참 기다려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수제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아직도 제대로 된 신앙의 눈을 뜨지 못한 우리지만, 아직도 고통의 신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지만, 그래서 너무나 부족한 우리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부르십니다. 제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복음 선포의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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