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마르코 6,14-29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3,1-8
형제 여러분, 1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2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3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4 혼인은 모든 사람에게서 존중되어야 하고, 부부의 잠자리는 더럽혀지지 말아야 합니다. 불륜을 저지르는 자와 간음하는 자를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실 것입니다.
5 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분께서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6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7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4-29
그때에 14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15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16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17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1587년 일본의 실세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박해를 공식화합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1596년 교토와 오사카 일대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과 교우들 25명이 체포됩니다. 바오로 미키 수사 역시 이때 붙잡힙니다.
이듬해 정월, 그들은 죄수의 몸으로 나가사키까지 끌려갑니다. 혹한 속에서 한 달 가까이 걸어야 하는 혹독한 여행이었습니다. 이들이 지나가는 길목에는 사람들이 나와 구경하게 했습니다. 천주교를 신봉하면 저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그들은 나가사키의 바닷가 언덕에서 장렬하게 순교합니다. 1597년 2월 5일 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기록입니다. 어이없는 죽음입니다. 순교자들 역시 어이없이 죽어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님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어이없는 일과 공평하지 못한 일을 누구나 체험합니다. 모두가 ‘작은 죽음’입니다. 내 몫으로 받아들이면 또 다른 깨달음을 만나게 됩니다.
연중 4주간 금요일 - 시험의 두려움
오늘 인생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치렀습니다. 유학 와서도 칠년 만에 시험이 끝난 것입니다. 한마디로 지긋지긋한 시험들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보는 시험 방법은 한국에서 보는 방법과 조금 다릅니다. 한국은 대부분 필기로 보지만 이 곳에선 대부분 교수와 일대일 오랄, 즉 말로 시험을 봅니다.
처음에 저를 가르친 교수 앞에서 배운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굉장히 두려웠었습니다. 특히 잘되지 않는 남의 나라말로 시험을 보려면 며칠 전부터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여기저기서는 재시(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여 다시 보아야 하는 것)가 걸려 곡소리가 나오기도 하는 등 유학에서 가장 스트레스 받는 시기가 바로 시험기간입니다.
처음엔 첫 해가 가장 힘들고 가면 갈수록 시험이 쉬워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첫 해엔 말을 잘 못하니 몽땅 외워서 시험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하였지만 말을 조금씩 더 잘하게 되면서는 요령이 생겨서 첫 해만큼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시험 성적이 떨어져서 급기야는 유학 육 년차 때 첫 재시를 받아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시험의 부담감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 잘하는 이태리 학생들도 힘들어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시험인가 봅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 시험을 치르다보니 매번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 내 자신이 싫어졌습니다.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방법은 없는가?’ 해답은 ‘없다.’였습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완벽하게 했다고 하더라도 교수님이 어떤 일로 화가 나 있거나 한 반을 본보기로 다 재시를 줄 때는 피해나갈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준비를 완벽하게 하더라도 100% 통과에 대한 확신을 갖고 여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일반적으로 ‘이 정도’만 하면 마음이 안심이 되는 수준은 있습니다. 그 수준은 남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다보면 ‘이 정도면 됐어!’하며 스스로 위안이 되는 정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 정도만 하면 이변이 없는 한 통과는 할 수 있다.’는 수준이 있고 그 수준은 내가 내 스스로 내리게 됩니다.
만약 시간이 없어 공부가 스스로 만족할 ‘그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면 시험 보러 들어갈 때까지 기도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 불안감은 다른 누구보다도 스스로 공부하지 못한 것을 잘 알고 있는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공부를 하지 않은 자신이 재시나 과락을 맞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스스로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00%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을 수준까지는 미리미리 공부해 놓는 것이 스트레스를 안 받는 지름길입니다.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삶도 시험과 같습니다. 시험관은 당연히 하느님입니다. 내가 통과할 수준만큼 살고 있는지 살고 있지 못한지는 내 스스로 잘 압니다. 내 스스로 안다기보다는 양심이 압니다. 양심은 하느님 이전의 내 자신의 심판관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수준으로 살고 있다면 양심이 ‘넌 통과 했어.’라고 말해주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느끼게 해 주어 안심시켜줍니다. 그러나 스스로 아무리 잘 살고 있다고 머리로 되뇌어도 양심이 ‘넌 지금 위험수위야!’라고 한다면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안한 맘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다닌다는 말을 듣자 헤로데는 얼마 전에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며 몹시 두려워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아니면 그런 기적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살아있을 때도 기적을 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잘못을 하면 이성적으로는 그것을 아무리 정당화하려고 해도 양심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 양심은 죄를 지은 사람을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끝없이 괴롭힙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당연하다는 것까지 양심은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언제 자신에게 벌이 떨어질지 몰라 항상 불안해하며 살아가게 되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에서까지 두려운 이유를 찾아내어 두려워합니다.
그렇다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적어도 양심이 ‘그 정도면 됐어.’하는 소리를 할 때까지 주님의 가르침에 충실히 사는 방법 외엔 없습니다. 마지막 날 자신을 심판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의 양심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작은 시험과 같은 하루하루, 시험 준비가 안 되어 불안함에 떠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 구원받았음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자유로움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우리 삶을 그리스도의 말씀에 일치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연중 4주 금요일-영원한 현재이신 예수 그리스도
교리에 대한 의문이 한창 많았을 때 천당과 지옥에 대한 교리, 그 중에서도 지옥에 대한 교리에 의문이 많았습니다.
그 첫 번째가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신데 어찌 영원한 형벌의 지옥이 있을까?’였습니다.
처음에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지옥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동안 이렇게 생각하다가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구원하고자 하시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히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영원한 형벌의 지옥이 될 것이다.’라는 답으로 풀렸습니다.
두 번째 의문은 ‘지옥은 정말 불이 활활 타오르는 어떤 곳인가?’입니다.
물리적 형벌이 가해지는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곳입니까?
어제 묵상하였듯이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입니다. 우선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입니다.
복음에서 악령이 예수님께 당신과 내가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왜 간섭하느냐고 하듯이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런 관계가 지옥입니다.
달리 얘기하면 사랑이신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기에 아무런 사랑이 없는 상태, 그것이 지옥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아무런 관계가 없기에 하느님 백성과도 아무런 관계도 사랑도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렇다면 천당은 당연히 하느님 안에서 모든 사랑의 관계가 이뤄지는 곳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이런 사랑의 관계가 이뤄지면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은 시작된다는 뜻에서 형제애를 얘기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사랑이 이뤄지면 이곳이 천국이고 순간이 영원이고 손님이 그저 손님이 아니고 그리스도이고
남편이 그저 남편이 아니고 그리스도이고 아내가 그저 아내가 아니고 그리스도이고 사물이 그저 사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 모든 사랑 안에서 이 모든 것들 안에서
어제도 오늘도 영원하십니다.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미움덩어리, 제거 대상 제1순위>
정당한 절차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정치인, 합당한 자질이나 인품을 지니지 못한 지도자, 정통성이 없는 권력의 소유자들이 얼마나 피곤하게, 또 불안하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오랜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잠시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그들의 눈동자는 늘 불안합니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전전긍긍합니다. 좌불안석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아티파스가 그랬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활동 주 무대 가운데 하나였던 갈릴래아의 영주였습니다. 묘하게도 그의 통치 기간은 예수님의 지상생활 기간과 거의 일치합니다.
헤로데 아티파스가 얼마나 막가는 사람, 부도덕적인 사람, 문제가 많았던 사람, 한 마디로 자질부족의 사람이었던가는 단 한 가지 스캔들만으로도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헤로데 아티파스는 본부인을 버리고 재혼을 하게 되는데, 재혼의 대상자가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니 나라꼴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헤로디아 역시 ‘그 나물에 그 밥’이었습니다. 그녀는 허영심으로 가득 찬 여인이었습니다. 인륜을 저버린 여인이었습니다. 난잡한 사생활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권모술수와 끔찍한 악행을 서슴지 않고 강행하던 ‘대단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패륜의 부부에게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백성들의 고초에 동참하려는 의지는 조금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최우선적 과제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불안정한 정권기반을 유지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벌인 추문은 하느님 앞에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의심할 바 없는 간통행위였습니다. 용서될 수 없는 파렴치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뒤에서만 수군거릴 뿐, 추악한 헤로데 왕권의 추문에 대해서 제대로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 한 사람, 세례자 요한만은 예외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왕권의 난잡한 사생활에 대해 공공연하게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감추고만 싶은 추문을 과감하게 들춰냈습니다.
헤로데 아티파스는 뜨끔했습니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세례자 요한으로 인해 받은 마음의 상처도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세례자 요한의 입을 막아보려고 기를 썼습니다. 협박, 회유, 감언이설...그러나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한번 열린 세례자 요한의 입은 절대로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위기감을 느낀 헤로데 아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을 옥에 가둡니다. 기회를 잡은 헤로디아는 복수심과 증오심으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눈에 가시 같던’ 세례자 요한을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의 일생은 예수님의 일생처럼 사람들로부터 ‘반대 받는 표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세례자 요한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미움덩어리였습니다. 제거 대상 제1순위였습니다.
세례자 요한 이전에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에는 거짓예언자들만 득실거렸을 뿐, 참 예언자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침묵은 세례자 요한에 이르러 깨어지게 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 의해 예언자의 시대가 다시 재개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예언의 말씀은 참으로 단순명료한 것이었습니다.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것, 알아듣기 쉬운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예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교만으로 가득 찬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단히 화가 나 계십니다. 머지않아 여러분들에게 큰 벌을 주실 계획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여러분들의 완고한 마음을 바꾸어 하느님께로 돌아선다면 하느님은 진노를 푸시고 여러분들에게 축복과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회개할 사람들은 세리나 창녀뿐이 아닙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죄 없다고 자처하는 바리사이 사람들, 율법학자들, 대사제들부터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헤로데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는 내적인 회개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안에서의 회개로 연장되어야 하는데, 그 구체적인 실례는 이런 것입니다. 옷 두벌 가진 사람은 갖지 못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생애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진리를 위해 몸 바친 생애였습니다. 광야에서 일생을 보낸 고독한 삶이었지만 구약시대의 마지막 대예언자로서 하느님의 사자, 하느님의 대변자로서의 삶에 충실한 삶이었습니다.
현 교황이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말씀이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의 양식이 되면 좋겠습니다.
“공동체 안에 살아가면서 그저 조용한 상태, 평온한 상태만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이 능사만은 아닙니다. 불쾌한 일을 겪지 않으려고, 가능한 한 모든 갈등을 덮어둘 생각만 하는 수도자, 또는 목자들을 생각만 하면 큰 걱정이 앞섭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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