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7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 - 마르코 3장 31-35절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1-10
형제 여러분, 율법은 장차 일어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만 지니고 있을 뿐 바로 그 실체의 모습은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해마다 계속해서 바치는 같은 제물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이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완전하게 할 수 있었다면, 예배하는 이들이 한 번 깨끗해진 다음에는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지 않아 제물을 바치는 일도 중단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한 제물로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될 뿐입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31-35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친척들은 섭섭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에게서 ‘인간적인 모습만’ 찾고 매달리면 언제나 섭섭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교회 내에서도 학연과 지연과 인연은 큰 몫을 차지합니다. 서로 편하기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를 승화시켜 ‘주님 안에서의 만남’으로 맺어지라는 것이 복음의 교훈입니다.
주님 안에서의 만남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서로 베푸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친숙해지면 ‘주는 것은 멈추고’ 받으려고만 합니다. 받았던 것은 잊어버린 채 주지 않는다고만 생각합니다. 갈등은 이렇게 해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봉헌을 통해 성장합니다. 어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스러운 관계도 ‘주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여기면 아름다운 봉헌이 됩니다. 바치면 깨달음을 주십니다. 바칠수록 ‘그분께 사로잡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됩니다.
연중 3주간 화요일 - 이심전심
한 소심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남들에게 안 좋은 말도 함부로 못하는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제가 충고를 해 주는데 그 자매가 도리어 저에게 강하게 반박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무엇이 옳고 그름은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그 다음부터는 그 자매에게 무엇을 말할 때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은연중에 그렇게 조심해서 말하게 된 데에는 그 자매의 탓도 있음을 느끼게 했습니다.
어느 날 그 자매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제가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못 하더라도 신부님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신부님을 믿는다는 것일 수도 있어요.” 듣고 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저도 다른 사람에게는 함부로 못하면서도 어머니에게는 할 말 못할 말 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같은 말을 하면 기분이 나빠 사이가 멀어질 수 있어도 어머니와는 그런 말로 사이가 멀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좌 신부로 있을 때 어머니께서 갑자기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성당에 찾아오는 것이 싫어서 특별한 일이 아니면 찾아오지 말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은 꼭 집에 가서 부모님께 맛있는 것을 사드리고는 했습니다. 물론 아들 신부를 보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떠나셨던 것처럼 어머니가 인간적인 마음으로 성당까지 자꾸 아들을 찾아오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방에서 전화를 받고 얼굴도 안 보고 어머니를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는 마음 안에는 어머니께서 매우 섭섭해 하실 것을 알긴 했지만 곧 이해하게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못합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만큼 강한 끈으로 연결된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깊은 관계 안에서는 이렇듯 보통 사람들의 관계를 넘어서는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오늘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라고 하자 예수님은 매우 단호한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다른 친척들이야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올 수 있는 일이었지만 성모님은 아마 어머니로서 그들 손에 끌려오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주위에 앉아있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곧 어머니요 형제들이라 말합니다. 어머니께서 이 말씀을 들으셨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어렸을 때부터 있었습니다. 삼일 밤낮을 찾아 해매 마침내 성전에서 아들을 찾은 어머니께 열두 살 난 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제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졌다고 말하는 어머니께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저와 어머니께 무슨 상관입니까?” 그리고는 십자가 밑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께 요한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여, 저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께 찬밥이었습니다. 이것이 진정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가 멀어서 벌어지는 일이었을까요? 물론 예수님은 어머니를 맨 마지막 자리에 놓았습니다. 그만큼 당신의 도움이 필요 없이 완전한 분이셨기 때문이고 그 사이에 모든 사람을 놓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대접을 받는 어머니는 아들의 당신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저와 어머니께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하는 아들을 보면서도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하인들에게 말합니다. 겉보기엔 어머니의 청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어머니만은 그것이 첫 기적을 당신을 위해 해 주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성모님만큼 아버지 뜻을 따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소리를 듣더라도 성모님만은 그 의미를 알아들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보이자 오직 제자 가섭만이 그 의미를 알고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만이 통하는 무엇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염화미소 (拈花微笑) 혹은 이심전심 (以心傳心)이라 합니다. 가끔 삶에서 어려움이 닥쳐올 때,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으로 생각 할 수도 있을 때 그 분과 깊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그 고통 안에서도 의미를 깨닫고 미소를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어쩌면 그 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불립문자 (不立文字)일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사람들 가운데 제일 마지막 사람인 것처럼 취급할 때가 많았지만 사실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었음을 깨닫고, 그분이 나를 믿고 사랑하시기에 이런 고통도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오로지 그분하고만 통하는 미소를 보내드립시다.
+ 전삼용 (요셉) 신부+.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봉헌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어떤 이사악입니까?
자기의 후손이 별과 같이 많게 되리라는 하느님 약속으로 얻은 아들입니다.
이 아들로부터 자기의 후손이 계속 뻗어나가야 할 아들입니다.
이 아들을 바친다면 늙은 자기의 후손은 영영 끊길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허무시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이사악을 바치라 하시고 아브라함은 명령에 순종하여 이사악을 바치러 갑니다.
이때 이사악이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대로 대답할 수 없어 아브라함은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하고 대답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이사악을 대신하는 양이 아니라 이사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는데 하느님 당신 자신이 그러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요구했던 그대로 당신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고자 하시고 아들에게는 스스로 바치라 요구하십니다. 양이 아들을 代贖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양들을 代贖하라고 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네가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하지 않은 것처럼 하느님도 네가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하지 않지만 이사악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제물이 되어야 함을 압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얘기합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양은 피조물인 양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이 그렇게 불렀듯 ‘하느님의 어린 양’입니다.
제물과 예물을 원하시지 않으시고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기꺼워하지 않으시기에
그리스도에게 몸을 마련해주시고 그 몸을 바치게 하십니다.
이전에 양이 목자의 대속물이 되던 것과 달리 이제는 목자가 양들의 대속물이 되는 것이 하느님 뜻이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십니다.
단 한 번 당신 몸을 바침으로써 세상의 죄를 없애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봉황의 큰 뜻>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쉽지만 나자렛이라는 작은 둥지를 떠나 보다 큰 세상으로 나아가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보다 큰 사랑, 보다 보편적인 사랑을 선택하시기 위해 안타깝지만 작은 가족을 뒤로 하십니다.
‘봉황의 큰 뜻’을 잘 파악하지 못했던 당시 주변 사람들은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는 예수님의 말씀에 속상해하기도 하고, 예의도 뭣도 없다고 혀를 차기도 했습니다.
작은 물줄기를 버리고 보다 큰 강, 보다 큰 바다로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작년에 우리 곁을 떠나가신 선우경식 요셉 원장님의 생애가 떠올랐습니다. 아직도 제 사무실 냉장고 문에는 요셉 원장님의 사진이 붙어있습니다. 편안하게 웃고 계십니다.
살아생전 요셉 원장님의 마음 씀씀이는 참으로 관대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장 눈앞의 일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맡고 계셨던 요셉의원에만 집착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교회 내 여러 본당 공동체들, 사회복지기관들, 의료기관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서로 소통하기를 기대하셨고, 활발한 나눔이 오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운영하는 사회복지 시설의 수효가 엄청난데, 그 안에도 엄연히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요셉원장님은 그것을 잘 파악하고 계셨고 어떻게 해서라도 어려운 시설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자 노력하셨습니다. 그분 역시 보다 많은 노숙인 가족들의 후견인이 되기 위해 작은 가족을 포기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출가(出家)하지 않으시고 한 평생 어머니 마리아와 친척들만 챙기셨다면 인류구원사업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세상의 수많은 다른 지역들은 나 몰라라 하시고 오직 나자렛 고을에만 신경을 쓰셨다면, 그래서 나자렛 도로포장만 신경 쓰셨고, 나자렛에만 많은 기업을 유치하셨다면, 보편적 인류애를 어떻게 실천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예수님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는 말씀은 한편으로 가슴 찢어지는 말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당신의 구원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반드시 하셨어야 될 말씀이었습니다.
‘가톨릭’이란 단어에는 ‘보편적인’ ‘광대한’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스승 예수님의 모범에 따라 부단히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지역이기주의, 공동체 이기주의 척결의 첨병이 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가톨릭은 교회의 큰 형님입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더 큰마음으로 분열되어 나간 형제들과의 소통을 시도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큰 형님답게 먼저 용서하고 먼저 화해를 시도하여 서로 일치하는데 앞장서야 할 사람들입니다.
끝도 없는 치유와 수많은 기적으로 ‘잘 나가시던’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 머물러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그들의 손을 내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옆 고을, 그리고 그 옆 고을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 사람들도 구원해야 한다.”
대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모든 소유를 버린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인류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속세의 인연을 과감하게 끊어버린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양 같으신 분입니다. 태양은 우리나라에만 뜨지 않습니다. 저 멀리 아프리카에도, 남미대륙에도, 히말라야 오지에도 골고루 뜨지 않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태양은 선인에게만 뜨지 않습니다. 악인의 머리 위에도 어김없이 태양은 떠오릅니다. 사형수의 머리위에도,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그 돈을 떼먹고 도망간 그 사람 머리 위에도 태양은 떠오릅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