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2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 - 마르코 3,7-12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7,25 ─ 8,6
형제 여러분, 25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26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27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28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8,1 지금 하는 말의 요점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대사제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곧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2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
3 모든 대사제는 예물과 제물을 바치도록 임명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대사제도 무엇인가 바칠 것이 있어야 합니다. 4 만일 그분께서 세상에 계시면 사제가 되지 못하십니다. 율법에 따라 예물을 바치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5 모세가 성막을 세우려고 할 때에 지시를 받은 대로, 그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상이며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성소에서 봉직합니다. 하느님께서 “자, 내가 이 산에서 너에게 보여 준 모형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6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7-12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병이 낫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이 멀쩡해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 몸에 손을 대면 무언가 강렬한 힘이 전해질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앞 다투어 몰려들고 있기에 그분께서는 호숫가의 배 위로 옮겨 가신 겁니다.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기적이 있었던 곳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기적이 있었다고 ‘소문만 나도’ 사람들은 찾아갑니다. 호기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믿음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간접 체험이라도 좋으니 ‘기적의 순간’에 동참해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영적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모습입니다. 한 번이라도 뜨거운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면 결국은 ‘그분의 뜨거움’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때의 ‘순간’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체 안의 예수님과 성경 속의 예수님은 같은 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오늘의 히브리서는 우리의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과는 떨어져 계신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신 분이라 합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으시는 고고한 분이시라는 뜻인가?
그럴 리 없지 않은가? 그분은 죄인들과 늘 어울려 다닌 분이 아니셨던가?
그래서 당시 고매한 분들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으셨던가? 그러니 이 말은 죄인과 어울려도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말, 죄인 가운데 있어도 결코 죄에 물듦이 없으셨다는 뜻이겠습니다.
이런 존재를 불가에서는 흙탕물에 핀 연꽃으로 비유합니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어둠 가운데로 들어가는 연등 행렬이 의미하듯 깨달음의 고결한 꽃 연꽃은 혼탁한 흙탕물 가운데 피는 것을 마다치 않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름다움과 향기를 풍기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물에 잠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우리 인간은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죄인들과 어울리다 죄에 풍덩 빠지거나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 죄인들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개중에는 용기도 있고 사랑에 넘치는 사람이 있어 비록 죄를 지을지라도 죄인들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를 짓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애초부터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자기도 죄인이고 다른 사람도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용감한 사람에게 죄는 사랑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이기에 사랑을 하면 여타의 다른 죄는 죄가 아닙니다.
이렇게 죄를 훌쩍 뛰어넘는 사랑, 이렇게 죄를 가볍게 뛰어넘는 사랑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이런 사랑 앞에서는 죄를 운운하는 것이 우습습니다. 죄를 두려워함도 사랑 없음을 고백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랑에 용감한 사람도 이러할 진데 우리의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이나 히브리서가 얘기하는 하늘로 오르신 대사제에 대한 얘기는 우리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주님과 부활하시어 하늘로 오르신 주님을 뜻하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 계시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 편에 계시건 영원한 대사제로서 사랑으로 죄에 대해서는 전혀 알 바 없으신 우리의 주님, 이 세상에 계시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 편에 계시건
늘 일념으로 우리를 위해 빌어주시는 사랑의 주님을 얘기하는 것이겠지요.
사랑밖에 다른 생각이 없다면 그것이 거룩함이고 순수함이고 순결함입니다.
연중 2주간 목요일 - 사랑의 거리
고려의 칠현(七賢)으로 손꼽히는 이인로의 ‘파한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주락적에 군수로 와 있던 사나이가 임기가 끝나 그곳에서 사랑에 빠진 기생과 이별하게 됩니다. 그 기생이 군수를 너무 사랑했던 터라 오로지 그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도록 군수에게 촛불을 주며 자신의 온 몸에 화상을 입히도록 합니다. 또 그 군수도 그녀가 시키는 대로 누구도 그녀를 유혹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립니다. 미국에서 한 때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이란 제목의 책이 40주간 이상 베스트셀러로 올라있었습니다.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이란 ‘너무 사랑 (too much loving) 증후군’을 다루었던 책입니다. ‘너무 사랑 증후군’이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너무 불안해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대상을 잡아두기를 원하는 증세입니다. 알코올 중독증이나 마약 중독증 환자 수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랑중독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웬만한 도시에는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의 모임’이 없는 도시가 없을 정도라 합니다. 저도 제목은 기억 안 나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손과 발을 잘라 못 움직이게 하고 집에 가두어놓는 끔찍한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이런 사랑병은 결손가정과 혹은 부모가 있더라도 화목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주정이 심하고 노름으로 지새우는 등의 불목한 가정에서 가족애 없이 자란 사람들일수록 더 많이 걸린다고 합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그 사랑이 모자랐던 사람은 커서 만끽하는 사랑을 잃지 않으려고 하고 따라서 사랑하면서도 지독한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랑엔 두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은 사랑이라고 하기보다는 집착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사랑과 집착은 거리에서 차이가 납니다. 집착은 두 사람이 꼭 붙어 있으려고 하는 것이고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권위 있는 말씀도 선포하심으로써 사람들이 그 분의 주위로 모여듭니다. 또 옷에 손만 대면 모든 병이 고쳐지는 것을 알고 누구나 예수님을 건들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예수님은 배를 타시고 그들이 당신께 덮쳐들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예수님도 당신의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행동은 사랑의 표현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면서도 그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사랑을 하지만 사람들 속에 섞이기를 원치 않으시고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시는 것이 위에서 말한 사랑병, 혹은 집착과의 차이점입니다.
삼위일체는 있어도 이위일체는 없습니다. 즉, 셋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 둘은 절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남녀 두 사람이 춤을 춘다고 합시다. 그들이 참으로 하나가 되는 춤을 출 수 있을 때는 음악이 있을 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둘은 각자의 춤을 추다가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그러다가 서로 떨어져나가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군중 사이에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을 떠나가지 않게 잡아놓고 둘을 하나로 엮어줍니다. 저는 사랑을 생각할 때 항상 기찻길을 생각합니다. 기찻길은 서로 같은 목적지를 지니고 있지만 서로 만나지 않고 평행을 이룹니다. 서로 조금씩 좁아지거나 벌어진다면 그 길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됩니다. 그 기찻길 위에 서서 목적지를 바라보면 사실 둘은 만나지 않지만 멀리 볼수록 둘은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기차가 그 위로 지나가면서 기차를 통하여 둘은 정말 한 몸이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한번은 혼자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커다란 호숫가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드문드문 자리 잡고 앉아있던 ‘꾼’들이 그날따라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 서둘러 낚싯대를 두 대 드리웠습니다. 수시로 떡밥을 갈아주며 ‘대어’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때마침 호수 건너편으로 붉은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로 새떼들이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산들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훈훈한 봄바람에는 그윽한 야생화 향기가 묻어있었습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홀로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그림 같은’ 오후였습니다.
호수, 생각만 해도 마음이 잔잔해집니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강이나 바다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호수 특유의 맛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서 계셨던 갈릴래아 호수 역시 그랬습니다. 언젠가 직접 제 눈으로 확인했던 갈릴래아 호수,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오랜 여독이 눈 녹듯이 풀릴 정도로 황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도시나 광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푸른 초원이며, 가슴이 탁 트이는 바다 같은 호수며, 여러 종류의 야생화며, 대추야자 나무...마음속이 다 환해졌습니다.
갈릴래아 호수,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태와도 같은 장소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첫 제자단을 부르신 장소도 갈릴래아 호숫가였습니다. 십자가 죽음이후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재회했던 만남의 장소도 갈릴래아 지방이었습니다.
당시 갈릴래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의 주요 교통수단은 당연히 거룻배였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고 갈릴래아 이 지방 저 지방을 두루 다니시면서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호숫가에 묶여있던 배에 올라 밀물처럼 밀려드는 군중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셨습니다.
때로 너무나 많은 인파에 피곤해지셨던 예수님은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피해가셨습니다.
언젠가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 위를 걷는 시범도 보여주셨습니다.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 골란 고원으로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열풍과 헤르몬 산으로부터 불어오는 찬바람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만나면 심한 기류의 이동으로 금방이라도 잡아 삼킬 듯한 큰 파도가 생성되기도 하는데, 그로 인해 큰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는 큰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제자들을 위해 풍랑을 잠재우는 기적을 행하셨지요.
오늘 마음으로나마 예수님과 함께 갈릴래아 호숫가로 여행을 떠나보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지금 갈릴래아 호숫가, 푸른 풀밭 위에 앉아있습니다. 화창한 봄날 오전입니다. 내 주변에는 키 작은 꽃들이 지천입니다. 때마침 호수로부터 미풍이 불어옵니다. 멀리 배 위에는 예수님께서 서계십니다. 산들 바람을 따라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사랑한다. 내 아들아. 사랑한다. 내 딸들아.”
“너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사랑, 내 귀염둥이들이란다.”
“안심하거라. 평안하거라. 너희는 구원 받았단다”
“이제 그만 내려 놓거라. 이제 그만 떠나 보내거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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