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익숙한 곳과 작별하며> > - 마르코 1,29-39

2009. 1. 14. 오전 7:31:02

글자
 
 
1월 14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 마르코 1,29-39
 
 
<자비로우신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2,14-18
14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9
그 무렵 29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오늘의 묵상 인류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피를 나눈 형제가 되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안배하심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사람들과 같아지려 하셨다. 고난을 받으셨고 유혹도 받으셨다. 고통과 유혹 속에 있는 이들은 특별히 그분의 도움을 청해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신다. 그분의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병자들이 몰려들었다. 주님께서는 모두를 낫게 하신다.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신 것이다. 이튿날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그분의 전도 여행은 시작되었다(복음).
아무도 예수님을 의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분은 병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의사가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질병은 신비에 속합니다. 어떤 사람도 병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조금씩은 병들어 있습니다. 질병도 ‘인간 본질’의 한 부분인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오는 모든 병자들을 기꺼이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치유를 통해 그들의 상처 받은 마음도 낫게 하셨고, 부정적인 인생관도 바꾸어 주셨습니다. 몸의 건강만을 소생시키신 것이 아니라 가족 관계도 긍정적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치유를 받은 사람 중에는 좌절이나 포기를 체험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병으로 말미암은 억울함과 무능력을 경험한 이들이 더 많았던 것입니다. 육체적 아픔만이 치유의 대상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오늘날에도 육체는 건강하지만 마음과 정신이 황폐해진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예수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방향으로 삶의 목표를 바꿀 에너지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많은 사람이 시몬의 장모 집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고 만났고 체험했습니다. 우리 역시 ‘성체의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에너지를 느껴야 합니다.
 
 
 
- 홀로서기의 필요성=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또 다시 익숙한 곳과  작별하며>


   어려웠던 시절, 아시아권으로 선교를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고통이 예견되는 일이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많은 선교사님들을 뵐 때 마다 ‘정말 큰 십자가들을 지고 살아가시는 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언어습득 문제는 그분들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지요. 다행히 언어감각이 뛰어나셔서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면 다행스런 일이겠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요? 선교사님들 거의 한평생 언어 때문에 고생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젊은 시절 고국을 떠나 30-40년 이 땅에 청춘을 바쳤으니, 거의 이 나라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고향에 가시면 오히려 어색하다고들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들 삶의 무대가 아니기 때문에 별로 아는 사람도 없고 재미도 하나 없습니다.


   이제 연세도 지긋하게 드시고, 이곳에 정도 많이 들고, 지인들도 많이 생기고… 이제 이 땅에서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 노령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가방을 꾸리시는 선교사들을 봅니다. 늘 어제와 결별하고, 늘 익숙한 곳과 작별하고, 조금이라도 더 어려운 곳으로, 조금이라도 더 일손이 필요한 곳으로, 조금이라도 더 낮은 곳으로 떠나는 선교사 정신 때문이겠지요.


   마치 오늘 복음에 등장하시는 선교사로서의 예수님을 뵙는 듯합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을 치유하셨고, 악령 들린 사람을 구해주신 예수님에 관한 소식은 순식간에 갈릴래아 전역에 퍼져나갔습니다.


   해가 떨어지고 안식일이 지나면서 ‘안식일 규정’에서 자유롭게 된 사람들은 수많은 환자들, 악령 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밤새 대대적인 치유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 은혜가 풍성하게 내린 이 호숫가 작은 마을의 밤은 감사와 환희, 기쁨과 설렘과 함께 그렇게 깊어갔습니다.


   먼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피곤에 지친 제자들이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어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안보이자 사람들은 그분이 어디 계시냐고 다들 아우성입니다. 어쩔 수 없이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아룁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 순간 예수님의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준비가 덜 된 복음 선포자였다면, 덕이 덜 닦인 선교사였다면 우쭐하는 마음에 사람들에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자신을 열렬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음껏 능력발휘를 한번 해보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십니다. 단호하십니다. 일어서셔서 홀연히 앞장서 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가파르나움 외에도 갈릴래아 호숫가에는 많은 고을들이 있었습니다. 종려나무와 올리브 나무로 둘러싸인 조용한 마을들이 많았습니다. 그곳 사람들도 예수님께는 소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모든 선교사, 복음선포자들의 모범이십니다. 자신의 인기를 전혀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실 뿐이지 자신은 조금도 챙기지 않으십니다.


   오직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잃어버린 양들을 찾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많은 사람들의 몸값을 치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셨습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68번 / 기쁨과 평화 넘치는
 

 관계는 그리스도 신앙인이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입니다. 관계 안에서 사랑의 나눔이 이루어지고 자신이 정화되고 완성되어갑니다. 그러나 한편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누구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쉬운 예로 부부 간에서도 좋은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고 형제들도 서로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물며 가족이 아닌 다른 이들과의 관계는 또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제가 아는 한 분도 관계의 중요성을 매우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관계를 잘하지 못해 항상 외로워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합니다. 심지어는 후배들에게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의무적으로 자신에게 전화를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화를 자주 하지 않으면 매우 외로워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왕따 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좋은 관계가 이루어질까요? 왜 사람들이 자신에게 오기를 꺼려하는지 인식하지 못할까요?   관계는 곧 사랑입니다. 좋은 관계를 원하는 것은 곧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관계를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분이 관계를 회피하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며칠 전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자 그들을 두고 홀로 가셔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피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아예 당신께 몰려드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물론 복음 선포를 위해 여러 고을로 이동해야 하셨지만 사실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 하신 곳은 팔레스티나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매우 협소한 지역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주 이동하셨으니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많이 보아야 한두 번이었습니다. 그것으로는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깊은 관계를 원치 않으셨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와, 그리고는 당신을 사랑하는 몇몇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모두와 다 같이 좋은 관계를 지닐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많은 이들로부터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성모님, 사도들, 마리아 막달라를 비롯한 여인들 등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예수님은 사랑 자체이셨기 때문에 그 몇몇과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들과의 관계 이전에 하셨던 것이 아버지께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모여들면 그들을 피해서, 혹은 밤을 이용하여 아버지께 기도하였습니다. 먼저 하느님과 관계가 이루어져야 인간과도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다른 이들을 필요로 만나게 되던가 그렇게 다른 이들을 이용하게 됩니다. 외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먼저 향해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주 만나는 사람이 곧 깊은 관계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직장 사람들은 매일 만나고 부모님은 명절 때만 찾아뵙더라도 더 깊은 관계는 부모님과 입니다. 다시 말해 잦은 만남을 강요하는 것이 곧 깊은 관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관계를 잘 맺을 줄 아는 사람은 먼저 하느님과 단 둘이만 있어도 외롭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처음에 광야에서 홀로 기도하신 것이고 또 밤을 통해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이유입니다. 사실 하느님과 구체적인 인간관계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먼저 하느님과 홀로 서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다른 이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려고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혹 사람을 필요로 만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봅시다.

 < 전삼용 (요셉) 신부>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