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이정표> <>> - 요한 1.29-34

2009. 1. 3. 오전 7:57:35

글자
 

1월 3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 요한 1.29-34

 
 
제1독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29 ─ 3,6
사랑하는 여러분, 29 하느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달으면,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3,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4 죄를 저지르는 자는 모두 불법을 자행하는 자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5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6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복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4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오늘의 묵상 
구약의 속죄제는 의무였습니다. 죄지은 사람은 누구나 바쳐야 했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송아지를 제물로 바쳤고, 보통 사람은 ‘어린양’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속죄제는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속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고 외칩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 주실 분이란 외침입니다.
사람들은 밝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도 밝은 이야기는 드물게 합니다. 행복한 모습으로 남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도 행복한 행동엔 인색합니다. 기쁨을 주면 기쁨이 돌아옵니다. 자비를 베풀면 자비가 되돌아옵니다. 체험해 본 사람은 압니다. 자신의 것을 내어 놓지 않으면 ‘어린양’이 될 수 없는 것이지요.
교리 시간에 잘 나오지 않고 가끔은 엉뚱한 질문을 하던 사람이 영세한 뒤 진실한 교우가 되는 것을 봅니다. 나중엔 헌신적인 본당 간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어떻게 그 사람이 변화되었을까? 누가 그 사람을 바꾸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의 뒤에는 오랫동안 기도해 온 그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아내의 기도와 헌신이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아내는 그에게 다가가 ‘어린양’이 되었던 것이지요. 남을 위한 기도는 주님께서 들어주십니다. 누군가를 위해 어린양이 되면 주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공현 전 토요일 - 사랑을 위해 ‘자아’를 버리다

 오늘 성당에 앉아서 ‘죄’에 대하여 묵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에 있는 동기 신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어차피 성당에 아무도 없어서 그 자리에서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다가 저의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어 중간에 전화가 끊겼습니다. 저는 기도를 더 하고 다른 볼 일이 있어서 여기 저기 돌아다녔습니다.   나중에서야 그 신부가 저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계속 전화를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른 채 기도를 계속하고 다른 일들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실 저의 입장에선 그 친구가 그런 절박한 사정이 있는 줄 몰랐었습니다. 그저 안부 전화를 한 건지 알았습니다.

 ‘죄’란 ‘하느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과의 단절로 인간은 사랑과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은 죄로 인해 고통 받게 되는 우리 자신들보다 우리와 사랑하고 싶지만 우리들의 거부로 인해 통교를 거절당한 하느님께서 더 고통스러워하시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봐주기를 원합니다. 짝사랑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는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 알 것입니다. 한 사람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열심히 바라보지만 상대방은 그 사람은 보지 않고 다른 것들만 쳐다보고 있다면 그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면서도 고통을 받게 됩니다.  마귀는 하느님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고통을 주기를 원합니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인간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짝사랑의 고통을 하느님께 안겨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 그 차체이시기 때문에 고통도 그만큼 완전합니다.   마귀가 인간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쓰는 방법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거울을 하나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고 자신만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름답지만 슬픈 이야기 하나를 해 드리겠습니다.   나르키소스는 보이오티아의 강의 신 케피소스와 님프 리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나르키소스는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어 숱한 처녀들과 님프들이 구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숲과 샘의 님프인 에코(메아리)도 그를 사랑하였는데, 귀로 들은 마지막 음절만 되풀이해야 하는 저주를 받았기에 자신의 사랑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에코는 나르키소스로부터 무시당하자 실의에 잠겨 여위어 가다가 결국 형체는 사라지고 메아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에코는 나르키소스도 자신과 똑같은 사랑의 고통을 겪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러자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이를 들어주었습니다. 헬리콘산에서 사냥을 하던 나르키소스는 목이 말라 샘으로 다가갔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랑하게 되어 한 발짝도 떠나지 못하고 샘만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탈진하여 죽고 맙니다.   그가 죽은 자리에는 시신 대신 한 송이 꽃이 피어났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나르키소스(수선화)라고 부르게 되었고 정신분석에선 자기애(自己愛)를 뜻하는 나르시시즘이란 용어가 생겼습니다.     

창세 때도 마귀는 인간이 선은 물론이요 악까지 알게 된다면 하느님과 같아진다고 하면서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합니다. 내가 하느님과 같아진다는 의미는 하느님은 필요 없으니 내 자신이 비친 거울을 보면서 나와 관계 맺고 나를 사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 대신 자신만을 사랑하게 된 것은 일종의 저주입니다. 이것이 죄의 시작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자신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상대만을 바라보면 자신이 잊혀질까봐 두려워 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을 잃게 되는 것은 결국 자신만을 바라보며 자신만을 사랑하게 될 때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해야 사람이 되도록 창조되었고 사랑은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자신을 찾는 방법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사랑함으로써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보고 아들이 아버지를 ‘바라봄(사랑, 성령님)’으로써 하느님이 되는 것처럼 인간도 자신이 아닌 상대를 바라보고 사랑함으로써 참 인간이 되게 됩니다. 따라서 사랑엔 이기심이나 자존심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 앞에 있는 거울을 치워버리고 자신을 찾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나는 내가 볼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작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기에 먼저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께 뛰어들지 않는다면 끊임없는 자아의 혼란 속에서 자신도 하느님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슬픈 현실을 노래한 좋은 시가 바로 ‘가시나무’입니다. 이것을 한 번 읽어보면서 나 또한 나를 붙잡고 주님보다는 나를 먼저 찾으려하기에 혼란을 겪고 있지는 않은지 묵상해 봅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제대로 된 이정표>


   등산을 다니면서 체험하는 바입니다. 열심히 앞만 보고 산을 오르다 보면 길을 잃어버리거나 헤맬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해라도 떨어지면 상황은 심각해집니다. 길 잃고 헤매다가, 해 떨어지고, 체온 떨어지고, 비상식량 떨어지고, 그러면 꼼짝 없이 사면초가에 빠지고 말지요. 생명의 위기상황 앞에 직면합니다.

 

   그런데 산에 자주 다니면서 요즘은 요령이 좀 생겼습니다. 길이 애매해지면, 전반적인 산세나, 계곡의 흐름이나, 나무들의 모양새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대충 산길의 방향을 잡는데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이정표’처럼 고마운 것이 다시 또 없습니다. 하산 길에 한참 길을 헤매다가 ‘매표소’ 몇 Km 라고 정확하게 적힌 이정표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그제야 안심이 됩니다. 산행하는 사람들에게 이정표는 정말 고마운 존재입니다.

 

   어떤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야할 길을 정확하게 제시해준 제대로 된 이정표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제대로 된 안내자 하나 없이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위험하게도 이정표 하나 없는 험한 산길, 폭설이 내린 깊은 골짜기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기 저기 암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짜 메시아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해 백성들을 현혹시켰습니다. 불안한 표정의 백성들은 이리 우르르 몰려갔다 저리 우르르 몰려갔다 하며 오합지졸처럼 행동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깎아 지르는 낭떠러지인줄도 모르고 직진만 하다가 부지기수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어둠과 방황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백성들 앞에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는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라도 무척 달랐습니다. 헛된 맹세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진지했습니다. 말과 행동에 신뢰가 갔습니다. 백성들도 제대로 된 예언자임을 직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자,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자신을 향해 다가오시자, 세례자 요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확하게 안내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예수님에게로 쏠립니다. 세례자 요한만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이제 마침내 나타나신 진짜 주인공을 향해 삶의 방향을 돌리는 순간입니다. 그간 세례자 요한에게 집중되어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이제 제대로 방향을 잡는 순간입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두운 밤길을 걷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한 훌륭한 이정표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수도자의 삶, 사제의 삶은 어찌 보면 이정표로서의 삶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시는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해도 성공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나날은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뒤에, 우리 삶의 배경이 자리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흔적을 발견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 안에서 구원에로의 화살표를 발견합니까? 우리의 생활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생명에로 향하는 이정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  

                                            
                                                         가톨릭성가 14번 / 주께 찬양 드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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