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4일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 저녁 미사-마태오 1장 18-25절

2008. 12. 24. 오전 7:02:20

글자
 
 
 
 
 
<다윗의 나라는 주님 앞에서 영원히 굳건할 것이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1-5.8ㄷ-12.14ㄱ.16
1 다윗 임금이 자기 궁에 자리 잡고, 주님께서 그를 사방의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셨을 때이다. 2 임금이 나탄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
3 나탄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가셔서 무엇이든 마음 내키시는 대로 하십시오.”
4 그런데 그날 밤,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8 나는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9 또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10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곳을 정하고, 그곳에 그들을 심어 그들이 제자리에서 살게 하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다시는 전처럼, 불의한 자들이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11 곧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판관을 임명하던 때부터 해 온 것처럼, 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겠다. 더 나아가 주님이 너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고 선언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게 하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7-79
그때에 67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68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69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70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71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72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73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74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75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76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77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78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 나와 모든 것의 관계 -

 저의 왼쪽 귀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1년 반쯤 전에 터키 여행을 하면서 갑자기 안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로마로 돌아왔을 때 병원에 가봤더니 입원을 할 것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잘 아는 한 분이 전화를 해서 꿈을 꾸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꿈은 잘 안 믿는 편입니다. 그 분은 당신이 절벽을 올라가다가 자신 때문에 돌이 떨어졌는데 그것이 밑에 있던 제 왼쪽 팔에 맞아 피를 흘리는 꿈을 꾸었다는 것입니다. 왼쪽 귀가 문제긴 하지만 뭐 특별히 연관이 있으려나 했습니다.   입원했더니 왼쪽 팔에 주사기를 꽂고 많은 피를 뽑아갔습니다. 검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링거를 계속 왼쪽 팔에만 놓았습니다. 정말로 왼쪽 팔에서 많은 피를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꿈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고 희한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제가 잉태될 때 태몽으로 뱀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수많은 뱀이 집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들으니 그 꿈은 주위에 사람이 많을 팔자라고 했습니다. 사제가 팔자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습지만 정말 제 주위엔 사람이 많습니다. 사제가 되어서 더욱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태몽을 어머니만 꾸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꾸어주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가 태몽을 대신 꾸어 혹시 임신하지 않았느냐고 연락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감은 맞는 경우가 많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어쩌면 그냥 스쳐지나갈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정말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육체적으로는 다른 이들과 분리되어 있지만 영적으로는 보이지 않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리야는 자신의 아들이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예언을 합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아기가 자라기도 전에 아버지가 아기의 일생을 예언합니다. 왜 본인의 일생을 본인에게 예언하게 하지 않고 아버지의 입을 통해 예언하게 하셨을까요? 사람이 서로 영적으로 관계 맺어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떤 자그마한 연못에 물고기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먹이와 공간은 충분하지가 않았습니다. 한 물고기는 다른 물고기가 없었으면 했습니다. 그래야 자신이 더 넓은 공간에서 많은 먹이를 먹으며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물고기의 바람대로 다른 물고기가 죽었습니다. 다른 물고기는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죽은 물고기 때문에 작은 연못이 썩어가는 것입니다. 나머지 한 물고기도 결국 숨이 막혀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가끔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떤 사람은 나와 관계가 깊은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무관한 사람이라고 판단을 내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와 완전히 무관한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과 미세하게나마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끼리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땅도 함께 저주를 하십니다. 사람과 자연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또 땅이 죄를 짓는 인간들을 토해낼 것이라고까지 합니다.    너희는 이런 행위 가운데서 어느 하나라도 저질러 부정을 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 낼 민족들은 이런 온갖 행위로 부정을 탄 것들이다. 그 땅도 부정을 탔기 때문에, 나는 그 죄악을 벌할 것이다. 그 땅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토해 내리라.” (레위 18,24-25)     따라서 급격히 많이 일어나는 세상의 자연재해들도 인간의 죄가 늘어감 때문은 아닐까요?      

이런 의미에서 보면 내가 주님과 온전한 관계를 이루며 산다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아니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자연까지도 그것을 기뻐한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됩니다.      한 아담의 죄로 온 인류와 자연이 저주를 받았던 것처럼 또 다른 아담의 보속으로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제 2의 그리스도가 되어 산다면 나는 물론이요 온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묵상해 봅시다.

                                                    <오늘의 묵상>

 이스라엘의 ‘사제’는 레위 지파에게만 주어진 직분입니다. 신분에서부터의 제약입니다. 그만큼 선택된 이라는 자긍심이 강했습니다. 율법을 보호하는 지도자였으며 종교 생활의 재판관이었습니다. 그들은 의복부터 달랐습니다. 금실로 짠 화려한 옷을 입었습니다. 일반인과 구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제복을 입지 않고 제사를 드리면 처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즈카르야는 평생을 그러한 사제로 지냈던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벙어리가 됩니다. 그것도 성전 안에서 예절을 거행한 뒤였습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그는 듣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벙어리가 되었을까?’ 즈카르야는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창피하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사의 말을 잠시라도 의심한 것이 미안해서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봤을 것입니다. 중요한 순간마다 ‘주님께서 함께하셨음’을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벙어리가 되지 않았다면 이런 찬미가는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은총입니다. 즈카르야의 희생은 아들을 위한 거름이었던 것입니다. 고통은 더 큰 세계를 향해 눈뜨게 합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표현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12월 24일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 저녁 미사-마태오 1장 18-25절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다시 일어서십시오.>


    오늘은 우리 교회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큰 명절, 성탄입니다. 큰 잔치인 만큼 당연히 흥겨운 잔치 한 마당이 펼쳐져야 하겠지요.

 

    아무리 빠듯한 살림살이라 할지라도 오늘만큼은 날이 날인만큼 분위기 한번 잡아보시기 바랍니다. 저녁식탁엔 식탁포도 예쁜 걸로 한번 바꿔 보시고, 예쁜 초도 하나 켜시길 바랍니다. 밤이 무르익으면 가족들과 함께 성탄미사도 봉헌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 죄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탄은 인류 전체의 축제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이 성탄의 기쁨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무리 기뻐하려고 해도 기뻐할 건수가 있어야 기뻐하지’하는 분들이 많은 요즘입니다. 올겨울이 더욱 춥고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분들이 많은 연말입니다.

 

    이럴수록 더 많은 기쁨을 창출해 낼 필요가 있습니다. 기쁨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관대한 나눔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진심어린 관심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진실한 화해를 통해 가능합니다.

 

   그러나 보다 차원 높은 기쁨이 있습니다.

 

    영적인 기쁨입니다.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기쁨은 사실 지극히 제한적인 것입니다. 잠시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사라져가는 유한한 기쁨입니다. 손에 쥐었는가 하면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기쁨입니다.

 

    보다 지속적인 기쁨, 보다 참된 기쁨이 있는데, 바로 영혼의 기쁨입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새롭게 탄생하실 때, 그분의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실 때 이 세상 그 어떤 어디서도 얻지 못할 참 기쁨을 획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지금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짙은 어둠입니다. 사방이 높은 벽에 막힌 것 같은 암담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어둠이 깊다는 것은 빛이 멀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고통이 크다는 것은 기쁨이 가까이 왔다는 표지입니다.

 

    고통과 한숨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인류에게 빛으로, 기쁨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 어려운 시기, 그분만이 우리의 희망임이 분명합니다. 이 답답한 세상, 그분만이 우리의 마지막 보루임이 확실합니다.

 

   크나큰 고통 중에 계시는 분들 다시 오신 아기 예수님으로부터 충만한 위로로 잠시나마 시름을 잊으시길 바랍니다. 실의에 빠져계신 분들, 아기 예수님과 더불어 힘차게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낙담하고 계시는 분들, 예수님과 함께 새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힘겹다고, 일이 잘 안 풀린다고, 매사가 꼬인다고 좌절과 한숨 속에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의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게도 낙관적인 종교입니다. 희망의 종교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 다시금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너무나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작고 가난한 사람들이 혹시라도 위화감이나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당대 가장 잘 나가던 고관대작 가문에서 탄생하지 않으시고, 가장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죄인들이, 우리 평번한 사람들이 혹시라도 찾아가지 못할까, 하는 마음에 호화찬란한 구중궁궐에서 탄생하지 않으시고, 서글프기 그지없는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보십시오. 그분의 탄생은 철저하게도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우리 가난한 인생들을 위해서. 우리 못난이, 찌질이, 쫌생이들을 위해서 그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고통이 너무 커서 포기하고 싶을 때 마다 부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 37)

 

    우리가 겪는 고통의 크기가 아무리 크다 해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크기에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깊은 실망의 늪에 빠져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주실 희망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렵지만 참으로 은혜로운 성탄절, 부디 용기를 내십시오. 다시 시작하십시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러 힘차게 일어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99번 / 고요한 밤 거룩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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