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4일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 요한 1,6-8, 19-28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1,1-2ㄱ.10-11
1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2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1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 5,16-24
형제 여러분, 16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17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8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9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20 예언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21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22 악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십시오.
23 평화의 하느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24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8.19-28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대림 첫 주일의 주제는 ‘깨어 기다림’이었습니다. 둘째 주일은 ‘회개’였고, 셋째 주일은 ‘희망’이 주제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기다렸던 예수님께서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모습입니다. 기다림의 목표를 ‘소유하는 것’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힘겨운 인생에서 사랑과 감사를 ‘희망하는 것’의 첫자리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예로부터 신앙인은 세 가지 덕목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신덕과 망덕과 애덕입니다. 희망은 당당하게 세 덕목 중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희망을 외면하고 살아왔다면 이제라도 시도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희망을 연습해야 합니다. 이것이 대림 시기 셋째 주일의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는 만물을 칭찬하시며 은총을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받는 우리가 실망하며 살고 있다면 곤란한 일입니다. 그분께서 은혜로 주심에도, 감사하며 받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내야 합니다. 오늘 대림 제3주일의 숙제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습니다.>
안타깝게도 요절한 고정희 시인의 시는 언제 읽어도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유고시집의 표제시를 읽다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 구나
쓸쓸함이 또한 여백이 로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 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어떻습니까? 이 시를 읽으면서 떠오르는 사람이 없습니까? 어쩔 수 없이 쓸쓸했던 사람, 그 누군가를 위해 기쁘게 사라진 사람, 그래서 여백 같던 사람…
저는 세례자 요한이 생각났습니다.
한 그룹의 신자들과 마주앉아 차를 한잔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대화가 무르익자 자신들이 소속된 본당 신부님들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갔습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경쟁하다시피 칭찬들을 하시는데, 제가 샘이 다 날 지경이었습니다.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보는 것 같아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신자들이 겪는 고초를 자신의 일처럼 여기며 함께 눈물 흘리는 사제, 겸손하게도 신자들에 앞서서 먼저 인사하는 사제, 본당 재정적자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홀로 식사를 해결하는 사제, 미사 시작 1시간 전, 가장 먼저 성체 앞에 앉아 기도하는 사제, 조금의 돈이라도 생기면 어려운 사람들 찾아나서는 사제,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푼의 돈도 쓰지 않는 사제, 신자들에게 민폐 끼치기 싫다며 죽기 살기로 축일행사를 마다하는 사제, 전철 잘 운행되는데 자가용은 무슨 자가용이냐며 언제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제, 인사이동 때면 모든 것 그냥 두고, 모든 것 나눠주고 손가방 두 개만 챙겨서 바람처럼 떠나는 사제, 세례자 요한과 같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그 어떤 환상에도 빠지지 않는 사제…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세례자 요한에게 보내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은 지체 없이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세례자 요한이 선구자로서 가장 적격이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단지 그리스도에 앞서서 파견된 존재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장 큰 예언자로 불리는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 어떤 환상에도 빠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당신은 누구요?”란 사람들의 질문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습니다. 자신은 조연에 불과하고 주인공은 자기 뒤에 서 계시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단호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시는 예수님이 더욱 높이 올라가도록, 더욱 빛을 발하도록 자신을 최대한 낮춥니다.
세례자 요한이 조금이라도 덕이 덜 닦인 사람이었더라면, 선구자로서의 삶의 준비가 부족했더라면 백성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올라갈 때 까지 올라갔던 자신에 대한 높은 지지율을 바라보며 착각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파견된 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야욕이 스며드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파견하신 이유를 상기하면서 겸손의 덕을 청합니다.
이토록 겸손했던 세례자 요한의 삶, 그 배경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세례자 요한은 오랜 기간 광야에서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의 강도 높은 피정과 자기 쇄신 작업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잘 다스렸습니다. 고독과 침묵 속의 광야 생활에 충실했기에 세례자 요한은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음성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여 가면 갈수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인공인 연극에 조연으로서의 겸손함’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 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6-8)
세례자 요한 은 빛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그는 빛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빛나는 사람이다. 어둠이 빛을 증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달은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다. 태양이 있기 때문에 빛을 내고 태양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태양이 없다면 달은 어둠 속에 머물 수 밖에 없고 태양을 증언할 수도 없다.
세례자 요한 의 빛나는 삶은 참 빛이신 예수를 증언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아름다운 향기가 풍기면 어딘가 아름다운 꽃이 있다는 증거다. 향기를 따라가면 틀림없이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을 만나게 된다.
악취와 구린내가 풍기면 근방 어딘가에 쓰레기더미나 똥 무더기 가 있다는 표시다.
사도 바오로 는 "우리는 하느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 입니다"(II고린2,15)라고 설파하셨다.
맑고 밝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증거하게 된다. 어둠이 빛을 증명할 수 없듯이, 썩은 악취를 풍기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빛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빛이신 그리스도로 빛을 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향기롭고 빛나는 삶을 살게 된다. 그의 삶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이 된다.
그를 따라가면 틀림없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한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정의와 선을 부르짖으며 강론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창녀가 고해를 하겠다고 왔는데 신부는 성당에 도움이 안 된다며 고해를 거부합니다. 한 돈 많은 사장이 그 신부를 찾아와서 이번에도 성당 공사를 맡기면 이번 성탄 때 아기 예수님께 금관을 씌워주겠다고 제의를 합니다. 그래서 신부는 그 사장에게 공사를 맡깁니다.
한 문둥이가 있었는데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한 거지와 함께 성당 앞에서 동냥을 했는데 그 거지는 예수쟁이라고 하면 치를 떠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수녀님이 지나가는데 일부러 발을 걸고는 자신의 발을 밟았다고 수녀님에게 돈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둥이가 말려서 수녀님은 성당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문둥이는 거지에게 예수쟁이라고 욕을 먹어야 했습니다. 성탄 전날 고해성사를 보러왔던 창녀가 거지와 문둥이에게 음식과 술을 대접하겠다고 그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한 잔 거하게 하는 동안 자정미사가 거행되었습니다.
부자는 속으로 내년에 사업이 더 잘되게 해 주신다면 금관에 보석을 박아드리겠다고 다짐하며 그만큼 많이 벌게 해 주신 것에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문둥이는 술이 잔뜩 취해서 다시 성당 앞으로 옵니다. 성당 문은 잠겨있었고 날은 너무 추웠습니다. 밖에 서 계신 예수님의 동상이 자신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취해서인지 추워서인지 모르는 채 그만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다음 날 성당 앞에서 문둥이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문둥이의 머리엔 아기예수님께서 쓰셨던 금관이 씌워져 있었고 그분이 덮었던 이불이 덮여져 있었습니다. 물론 구유에 안치된 예수님은 관도 이불도 없이 춥고 배고프게 누워계셨습니다.
이는 김지하씨의 연극 대본 [금관의 예수]를 제가 허락도 없이 나름대로 바꾸어 써 본 것입니다. 저는 바티칸 광장 앞에 세워지는 구유를 벌써 일곱 번째 보게 됩니다. 몇 주 동안 공사를 하고 성탄 자정미사 전에 공영 텔레비전으로 공개합니다. 매번 그것을 보며 느끼는 것이지만 너무 커서 멋이 없다는 것입니다. 큰 부잣집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느낌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겠지만 예수님은 크고 화려한 것보다는 작고 가난한 것을 택하셔서 오신다는 진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구유를 처음 만들어 경배하게 된 것은 프란치스코 성인에 의해서라고 합니다. 그 분은 그레쵸라는 산골 마을에서 예수님 탄생을 기리기 위해 동굴 속에 정말 산 동물들과 살아있는 한 어머니와 아기를 놓고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경배하였습니다. 저도 그 곳에 겨울에 가 보았는데 그 곳에 놓였던 아기가 매우 추웠겠다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금관을 쓰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을 당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당신이 당해야 하는 고통이 아니라 인간이 짊어진 고통을 대신 당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것으로 당신을 치장하려 하지 않으시고 고통 받는 사람에게 주시고자 하십니다. 금관도 비단 옷도 춥고 가난한 사람에게 주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당신의 가난으로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기에 그분은 처음부터 추운 겨울에 구유에 뉘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아기 예수는 좋은 것으로 치장하면서 우리 주위에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은 그냥 스쳐지나가기도 합니다. 이는 참으로 성탄의 정신이 아닙니다.
어제는 한 포르투갈 신부가 엔도 슈샤쿠의 글 안에 나타난 신학사상이라는 주제로 박사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저도 무슨 이야기 하나 들어보았습니다. 특별히 그의 대표작인 ‘침묵’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1630년경, 주인공 로드리고와 다른 두 신부는 자신들의 스승인 페레이라 신부가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하였다는 말을 듣고 그 진위를 알아보기 위해 몰래 일본으로 들어갑니다. 한 신부는 병으로 다른 곳에 남게 되고 다른 한 신부는 순교하게 되며 로드리고만 남았으나 그도 자신이 믿던 사람에게 배반당하여 잡히고 맙니다. 감옥에서 그는 페레이라 신부를 만납니다. 페레이라는 일본 선교의 헛됨을 토로하며 로드리고에게 배교를 권유합니다. 로드리고는 페레이라의 권유에 항변하며 논쟁을 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로드리고의 항변도 옆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가, 배교하지 않은 로드리고 자신 때문에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려서, 귀에 뚫린 바늘구멍으로 피를 한 방울 한 방울 흘리면서 죽어가는 신자들의 신음소리라는 사실을 알고는 절망에 빠집니다. 이런 로드리고에게 페레이라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배반한 것은 저 사람들의 비명소리에도 하느님은 아무 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의 필사적인 기도에도 하느님은 아무 일도 하시지 않았어!”
로드리고는 부르짖습니다. “주여, 이제야 말로 침묵을 깨셔야 할 때입니다. 당신이 옳고 선한 존재라는 것을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무슨 말씀이라도 하셔야 합니다.” 결국 로드리고는 수많은 사람에게 짓밟혀 마모된 성화(聖畵)를 밟기로 결심합니다. 유럽 땅에서 보던 화려한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일그러져 보기 흉하게 된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일그러진 얼굴을 발로 밟자 새벽닭이 웁니다.
“주여, 주님이 언제나 침묵하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로드리고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로드리고,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다.”
마더 데레사는 예수님을 찾다 헤매다가 못 찾아서 결국은 거지의 ‘목마르다!’하는 말을 듣고 가난한 자들 가운데 예수님이 계심을 깨닫게 되고 그들을 위해 남은 삶을 바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것이 없이 잘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아파하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기 위해 오신 것이고 그들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보잘 것 없는 형제 하나에게 하는 것이 당신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해 세례자 요한을 보낸 것은 사람들이 회개하게 하여 그리스도를 잘 맞아들이게 하기 위함 이였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맞아들여서 삶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삶이 변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태어나실, 혹은 지금도 태어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마음을 가난하게 비워서 구유를 만들어놓는 일이 아닐까요? 그 분은 마구간과 같은 가난한 마음에 태어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가난과 물질적 가난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본질은 오직 그분만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분만을 전부로 삼는다면 가난한 사람도 나눌 것이 보입니다. 누구에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고 아무 것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자도 없습니다.
돼지가 길에서 암소를 만나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죽어서 사람들에게 햄과 베이컨을 제공하지. 심지어 내 발까지도 `족발'이라는 이름으로 굶주린 사람들의 배를 채워준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나를 싫어하고 너만 좋아하는 것일까?” 암소가 말했습니다. “이유가 있지. 너는 죽어서 유익한 것을 제공하지만 나는 살아있는 동안에 우유를 준단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나누지 않으면 이미 늦습니다. 주님을 더 원하기 위해서 물질을 조금 덜 원하고 그래서 더 나눕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