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에 떨어지는 풍경소리> 마태오 7,21.24-27

2008. 12. 4. 오전 7: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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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4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  마태오 7,21.24-27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1.24-2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산사에 떨어지는 풍경소리>


   당나라 시인 백낙천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조과 선사가 대답했습니다.

 

   “나쁜 짓 하지 말고 선행을 하여라.”

   “그런 것쯤이야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는 말입니다.” 

   이에 조과 선사가 말했습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쉽게 알 수 있으나 백 살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렵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어찌 그리도 가슴을 콕콕 찌르는지, 아파서 혼났습니다. 

   잘 꾸며져 그럴듯하지만 뒷받침이 전혀 되지 않는 말,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실속이 전혀 없는 말, 달콤하지만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말을 엄청 던져온 제 지난날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강의라도 하러 가면 너무나도 ‘웃기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루에 묵주기도 기본으로 100단씩 바치는 묵주기도의 달인들 앞에서 겨우 기껏해야 하루 5단 정도 바치는(그것도 가끔씩 빼먹는) 제가 묵주기도의 가치, 중요성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면서 보다 자주 바칠 것을 강조합니다. 

   일주일 내내 봉사에 전념하는 분들, 갖은 굳은 일을 마다않는 봉사의 전문가들 앞에서 봉사란 이래야 한다느니, 봉사란 이런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제 모습이 한심스럽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하게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 바닥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입에 거품 물고 외치지만 정작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지요. 

   엄청 속보입니다.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앞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바람직한 신앙생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의 핵심은 ‘조화 있는’ 신심인 듯합니다. 영혼과 육신의 조화, 머리와 가습의 조화, 생각과 행동의 조화, 기도와 삶의 조화, 몸과 마음의 조화가 이루어져 합니다. 이 둘을 가급적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외쳐댔던 많은 공허한 말들이 허탈한 메아리가 되어 제 주변을 맴돌아 자책하게 만듭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대로 참된 신앙생활은 말에 그치지 않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제대로 된 신앙생활은 감정적인 것, 환상적인 것만을 추구하지 않음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열심히 내 집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또 다른 집 하나 장만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란 토대 위에, 그분의 말씀이란 기초 위에, 그분께 대한 전적인 신뢰란 바탕 위에 지어지는 견고한 영혼의 집을 짓기 바랍니다. 

   많은 말보다는 깊이 있는 침묵과 더불어.  

   “땡그랑떙그랑 하며 적막한 산사에 떨어지는 풍경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풍경소리는 단 한 음절의 소리밖에 낼 줄 모릅니다. 단순한 쇳소리에 불과한 그 소리가 어째서 온갖 잡념과 고뇌를 밀어내고 우리의 마음을 씻어주는 영혼의 소리로 화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풍경소리가 정적(靜寂)의 침묵 속에 탄생하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온갖 소음 속에서 울린다면 그것도 하나의 잡음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도 마찬가집니다. 온갖 수식으로 꾸민 화려한 언어는 찰라에 끝납니다. 하지만 침묵의 절절에서 탄생된 언어는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오랜 세월 마음속에 머물며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하는 풍경소리를 냅니다.”

(‘풍경소리’ 샘터 참조) 

 

                     
                     ‘화해’는 없고 ‘싸움’만 있다

                                             
                                                         가톨릭성가 180번 / 주님의 작은 그릇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라서 어떤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않지만,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아서 어려움이 밀려오면 어렵사리 지어놓은 집들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는 신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 말씀을 실천하고 싶지 않은 신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하고 싶어도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항상 평온하고 싶어도 자주 넘어지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죄를 짓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를 지어 인류 전체가 행복을 잃었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그 죄가 씻겨 결국엔 다시 그리스도와의 혼인으로 행복을 얻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고해성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짓는 죄들을 반복해서 짓습니다. 몇 년 동안을 계속 같은 죄만을 고백하고 매번 다음부터는 짓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지만 또 똑같은 죄를 짓고 맙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행복해지고 마음의 평화가 온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말씀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도 이것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쓴 일기를 읽어본 일이 있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죄를 짓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어서 그들은 서로 싸운다. 나는 이 싸움을 지켜보는 심판관처럼 서 있다. 그러면 서로 싸우는 이들은 누구인가? 천사와 악마? 아니다. 이들은 내 자신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들이다. 이 싸움이 언제나 끝날까? 그 때까지 내 안에 평화는 없는 것인가?”사춘기 때 이런 내적 분열을 겪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영과 육의 싸움이 가장 치열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육체가 영을 이기는 때가 더 많아서 영적으로 많이 위축 되어있는 때였기 때문에 이런 갈등을 일기로 썼던 것 같습니다. 정말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던 때입니다.  

이 싸움은 청년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로마에서 교의와 영성상담 등을 공부하신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보며 이것을 상담하였습니다.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있는 내 자신들을 서로 화해시켜야 해요. 서로 화해하지 않으면 싸움은 끝나지 않을 거예요.”참 좋은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마치 남북통일을 해서 평화를 얻는 것과 같은 ‘내 자신들의 화해’, 그럼으로써 오는 평화. 그러나 어느 순간 ‘화해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서 싸우는 것들은 영원히 서로 화해될 수 없는 정반대되는 세력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과, 욕망대로 살아야 한다는 육체와의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천사와 악마가 영원히 손잡을 수 없는 것처럼 둘은 서로 화해 될 수 없는 원수들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육체는 원죄가 우리의 육체를 오염시켜서 죄로만 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로마 8,6)  결국 육체를 완전히 죽이지 않는 이상 생명과 평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화해란 좋은 말이긴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악한 경향을 받아들이겠다는 위험한 말도 됩니다. 화해가 아니라 싸워서 이겨야 평화가 옵니다. 전 그 때부터 육체적 욕망을 죽이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흔들리지 않는 반석위에 집을 짓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육체적 욕망을 죽이는 작업을 말씀 묵상과 성체조배를 통해 합니다. 말씀과 성체는 제 영을 더욱 튼튼히 해서 육체가 꼼짝 못하게 잡아놓습니다. 마치 좁은 공간에 묶여있는 망아지처럼 꼼짝을 못하게 만드니 싸움도 일어나지 않고 평화가 옵니다.

반석 위에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기 위해서 결국 주님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예수님 자신이 왜 아버지 뜻을 실천하기 위해 40일간 단식하며 자신의 육신과 싸웠었는지부터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와 감정에 휘둘리면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고 해도 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자신의 육체와 교만부터 이기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집을 짓기 전에 먼저 내 자신의 영과 육이 서로 싸우며 흔들리고 있는 모래사장은 아닌지 성찰해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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