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4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 루카 21,1-4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4,1-3.4ㄴ-5
1 나 요한이 보니 어린양이 시온 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2 그리고 큰 물소리 같기도 하고 요란한 천둥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들은 그 목소리는 또 수금을 타며 노래하는 이들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3 그들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 말고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4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어린양을 위한 맏물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되었습니다. 5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작은 돈, 그러나 너무나 큰 돈>
한 그룹의 할머님들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뭔가 좋은 일이 있는 듯, 다들 싱글벙글한 얼굴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대표격되는 할머님께서 꽤 수줍고 쑥스러운 얼굴로 뭔가를 건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작아서 부끄러우디, 우리 노인네들이 여그, 불쌍한 아그들, 그라고 수사님들 생각하면서 매월 쪼깨씩 십시일반으로 모은건데, 요긴하게 써주셨으면 좋겠구만요.”
참으로 고맙고 부끄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 정성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손자손녀들 용돈도 주셔야하고, 곗돈도 부어야 하고, 등산도 다니셔야 하고...돈쓸 곳도 많을 텐데, 일 년 내내 아끼고 아껴 건네시는 그 ‘거금’을 도저히 받을 용기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이거 제가 받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할머님들 그 마음 잘 접수했습니다. 그 대신에 용돈 쓰실 데도 많을 텐데, 이 돈은 도로 가져가십시오.”
할머님들은 절대 안 된다며 펄쩍 뛰셨습니다. 할머님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저는 다시금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정말 잘 살아야겠구나, 정말 청빈하게 살아야겠구나, 절대로 헛된 곳에 돈 쓰지 말아야겠구나, 이런 훌륭한 분들의 마음을 늘 기억하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야겠구나, 하는 다짐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헌금’을 주제로 명료하고도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십니다.
봉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액수가 아니라 지극한 정성이며 마음이 담긴 전적이 봉헌이라고 강조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헌금궤 앞에 앉으셨습니다. 마당에서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중간에는 각기 용도가 다른 헌금궤 13개가 놓여있었습니다. 헌금궤는 입구가 큰 나팔관 모양새를 지녔고, 헌금을 넣으면 밑으로 모아지게 되어있었습니다.
이윽고 부자들이 헌금을 하기 위해 도착합니다. 큰 액수(10만 원짜리 수표나 만 원짜리 한 장)를 헌금하기에 보무도 당당합니다. 헌금 담당 사제의 눈앞에 수표를 들이대며 흔들어 보이면서, ‘큰 것 한 장이요’ 하면서 자랑스럽게 헌금궤에 돈을 넣었습니다.
이어서 한 가난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당대 문화 안에서 과부로 산다는 것은 최하위 계층의 삶을 산다고 보면 확실했습니다. 당시 과부가 제대로 된 일자리를 잡기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도 오래였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손을 벌리는 것도 하루 이틀 이었습이다. 하루하루 살길이 막막했던 과부였습니다. 굶기를 밥 먹듯이 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헌금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신앙심이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평소에 헌금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하느님 앞에 무척이나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오랜만에 작은 돈이 생겼습니다.
그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오고갔습니다. “저 어린 것, 그동안 용돈 한번 제대로 주지 못했는데, 이 돈을 아이들에게 용돈 쓰라고 줄까?” “아니지, 오랜만에 고기라도 조금 사서 영양보충을 좀 할까?”
그러나 최종적으로 그녀는 성전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작은 돈, 그러나 과부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큰 돈(동전 두 닢)이었습니다.
작은 돈이었지만, 그녀의 모든 정성, 그녀의 삶 전체가 긷든 소중한 돈을 아주 정성껏,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런 과부였기에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향해 극찬을 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이셨기에, 그녀의 전적인 봉헌, 열렬한 신앙을 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외형보다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이 더욱 눈여겨보시는 것은 결과보다는 과정입니다. 하느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액수가 아니라 정성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연중 제 34 주간 월요일 - 올인 (All in)
아합은 우상을 섬기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우상을 섬기는 아내에게 휘둘려 이스라엘 전체를 바알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예언자가 엘리야였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하늘에서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을 칩니다. 비는 성령, 곧 은총을 나타냅니다.
엘리야가 찾아 간 곳은 시돈의 사렙다 마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엔 더 이상 은총을 원하는 이가 없어서 이방마을로 합당한 여인을 찾아 간 것입니다. 그 곳도 가뭄이 들어 사람들이 다 굶어 죽어가는 곳이었습니다.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는데 엘리야는 물을 한 모금 청합니다. 성경에서 물은 항상 성령님이나 사랑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조그만 사랑을 보여 달라는 뜻입니다. 여인이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는 주책없이 먹을 것도 조금 가져다 달라고 합니다.
여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인이 대답하였다. "군 떡이 없습니다. 있다면 천벌을 받아도 좋습니다. 저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뒤주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 몇 방울이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조금 주워서 저희 모자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있는 것이나 모두 먹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시오. 집에 들어가서 방금 말한 대로 음식을 준비하시오.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 나에게 먼저 한 조각 가져오고 그 후에 아들과 함께 들도록 하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내가 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릴 때까지 뒤주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리라.'”
그 과부는 이 말씀을 믿고 엘리야에게 물과 빵을 가져다주었고 그 이후로 그 집엔 가뭄이 끝날 때까지, 즉 삼년이 넘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참 극단적인 것을 좋아하십니다. 죽음 앞에서 이 여인은 하느님을 원망하기는커녕 하느님의 말씀을 끝까지 신뢰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그 믿음에 겁니다. 그런 것을 보셔야 하느님은 그 여인에게 은총을 주심을 멈추시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미련하리만큼 완전히 봉헌하는 과부를 만납니다. 당장 오늘 먹을 것도 없는데 가진 재산을 모두 봉헌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있는 것들 중에 남는 것을 봉헌하는 것도 아깝게 여기는데 이 여인은 참 어리석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그 과부가 봉헌하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많이 봉헌했다고 칭찬해 주십니다. 그러나 혹 그 여인이 재산을 다 바쳤기 때문에 굶어 죽었을까요? 우리는 위의 사렙다 마을의 과부의 예를 보면서 그 여인에게 끊임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들을 내려주셨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실망시킬 수 있겠습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봉헌을 하려면 완전히 하라고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겨놓지 말고 ‘올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을 갖기는 쉽지 않습니다. 미래를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은 광신자들이나 하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그러나 하도 이상한 광신자가 많아서인지 천주교에서는 좀처럼 이런 과부의 믿음을 지닌 광신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어쩌면 그런 믿음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성직자나 수도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계산하며 봉헌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많을 수 있습니다. 아마 우리 모두는 어정쩡한 봉헌에 머물러있는지 모릅니다.
완전, 이 말은 어쩌면 식상한 말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우리가 완전해지고 완전히 봉헌하고 완전한 믿음을 갖고 완전히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도 계산하는 삶을 잠시 접고 주님께 온전히 맡기는 하루가 되어봅시다.
****************** 오늘의 묵상 *******************
도와주어야 하나 망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때의 이유에 따라 드리기도 하고 그냥 못 본 체 하기도 합니다.
어느 날은 지갑을 열어보니 만 원짜리만 있었습니다.
그것을 드리려다 너무 많이 드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까운 마음도 들어 그만 두었습니다. 다른 어느 날은 지갑에 몇 천 원밖에 없었습니다.
기꺼이 다 드렸습니다.
그때의 저의 느낌은 돈 몇 천 원을 드렸다는 느낌이 아니라 나를 다 주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돈 몇 푼을 드린 것이 아니라 큰 사랑을 실천하였다는 뿌듯함이 있었습니다.
일련의 이런 경험을 통하여 왜 부자들이 더 남을 돕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왜 남을 더 잘 돕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 앞에서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같이 헌금을 합니다.
부자는 틀림없이 자기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얼마를 헌금하였을 것이고 과부는 가진 것의 전부를 헌금하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부자보다 적은 액수를 봉헌한 것 때문에 마치 죄 지은 사람처럼 얼굴을 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그 사랑을 알아주고 높이 평가하십니다.
부자의 그 헌금에는 사랑은커녕 마음도 실리지 않았습니다.
별 생각도 준비도 없이 주머니를 뒤지다 그저 나오는 대로 내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부의 헌금에는 이렇게 조금 헌금해도 되나 염려하는 겸손한 마음,
이것을 다 헌금하고 나면 무얼 먹고 사나 걱정하는 마음, 그래도 다 봉헌하자는 헌신적 사랑의 마음과 더불어 적지만 은행에 가서 새 돈으로 준비하는 그 준비와 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정성(精誠)은 헌금과 존재를 일치시키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자의 헌금이 비록 액수는 많아도 주머니 속의 쓰레기를 버리듯 경박하고, 가치 없는 짓인데 비해 가난한 과부의 그 헌금은 거룩하고 고귀합니다.
그래서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거룩하고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기품이 있으며 정성을 다 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