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근원>- 루카 21,12ㄴ-19

2008. 11. 26. 오전 7:12:05

글자

         11월 26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 루카 21,12ㄴ-19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2ㄴ-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그를 위해 하루 2시간씩 기도 했습니다>


   한 ‘특별한’ 신자분의 생활 나눔을 전해 들으면서 얼마나 큰 감동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정말 제 마음에 들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늘 얼굴을 봐야 하는 사람이다 보니 더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왜 그리도 얄미워 보였는지 모릅니다. 내뱉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가시처럼 가슴에 박혀 단 한 번도 그냥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보기만 봐도 속이 상하기에 가급적 마주치지 않으려고 기를 썼지만, 그럴수록 이상하게 더 자주 마주치더군요.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속이 엄청 상해서, 건강도 나빠졌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하는 생각에 그 사람만을 위해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하루 2시간씩 그 사람을 지향으로 기도합니다. 

   그렇게 몇 달을 기도했더니 글쎄 기적이 일어났지 뭡니까? 

   그 사람이 변하기보다 그 사람을 바라보는 제가 먼저 변하더군요. 그렇게 미워보이던 사람이 이제 그렇게 측은해보이고, 안 되 보였습니다. 불쌍해보였습니다. 그저 한 번 더 끌어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에게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있습니다.” 

   이웃의 무례함이나 부족함 앞에 세상 사람들이 대처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방식으로 대처한 결과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는 소중한 체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인내하고, 끝까지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끝까지 상대를 배려한 그분에게 ‘자기해방’ ‘이웃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축복해주라는 예수님 말씀, 왼뺨을 치거든 오른 뺨마저 내어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얼마나 큰 인내가 필요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손해 보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에 충실하고자 노력한다면, 예수님을 보다 가까이 추종하고자 노력한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관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과의 대립과 충돌입니다. 가장 어려운 과제인 희생이요 자기 죽음입니다. 

   복음에 충실하려면 세속의 가치관, 세상 사람들이 지니는 보편적인 상식과의 충돌이 불가피합니다. 극도의 자존심 상함, 손해, 바보취급 당함, 박해는 필수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이런 분들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상급은 클 것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연중 제 34 주간 수요일 - 힘의 근원

 제가 로마에서 머물고 있는 기숙사는 포르투갈 신부님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포르투갈 기숙사입니다. 포르투갈 신부님들 중에서 일본에서 선교하신 분이 계신데 그 분이 저에게 일본의 카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꾸의 소설 <침묵>을 읽어보았냐고 했습니다. 저는 이름도 못 들어봤다고 했는데 옆 나라에 사는 사람으로서 조금 창피했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줄거리는 찾아서 읽어보았습니다. 이 소설은 포르투갈, 로마, 일본의 사료를 정밀히 조사한 실화 역사소설입니다.

페레라(Christopher Ferreira) 신부는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던 국제적 인물이었는데, 그가 고문에 못 이겨 배교했다는 보고가 포르투갈에 전해졌습니다. 격분한 그의 제자 세 명이 소식의 진위를 확인하고자 생명을 걸고 일본으로 잠적해 들어갑니다.

그 중 한 명인 로드리고(Sebastian Rodrigues)가 이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그도 결국은 체포되어 '후미에' 앞으로 끌려갑니다. '후미에'는 예수 상이 새겨진 동판을 나무판에 붙인 것인데, 그것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예수를 버린 것으로 간주하여 살려주었던 것입니다.

로드리고 신부가 후미에 앞에 섰을 때, 그것은 너무나 많이 밟혀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그러진 얼굴이 로드리고 신부에게는 울고 계신 것 같기도 하고 몹시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 같이 보였습니다. 그가 유럽에서 보던 왕관을 쓴 예수, 백인들이 편안하게 믿는 승리자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고통 받고 함께 울고 함께 괴로워하는 예수였습니다.

주저하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후미에의 예수가 말합니다.

"나를 밟아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냐? 나를 밟을 때 네 마음이 아플 것이다. 마음으로 아파해 주는 그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주여, 저는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있는 것을 원망했습니다."

"나는 침묵한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드리고가 예수 상을 밟는 순간 새벽닭이 웁니다. 그 옛날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할 때 베드로의 괴로움을 예수께서 이해하시고 용서하시며 함께 괴로워하신 것처럼. 줄거리만 읽어도 마음이 찡해옵니다. 아마도 장렬하게 순교한 분들보다 로드리고 신부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과 더 흡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도 정말 그 옛날 순교자들이 그 큰 고난을 이겨내면서 순교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순교할 자신이 없습니다.

한 예를 들어볼까요?

1840년 1월 30일 순교하여 103위성인 가운데 오른 허임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포도청에 끌려갔는데 심한 혹형으로 배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그것을 뉘우치고 즉시 재판관을 찾아가서, "나는 죄를 지었으나 지금은 그걸 뉘우칩니다. 입으로는 배교하였으나 마음으로는 교우였고 지금도 교우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재판관이 그를 다시 옥에 가두었는데 옥사장들이 그를 괴롭히며, "말로 취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네가 뉘우친다는 표를 우리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대소변이 가득 찬 통을 가리키며, "네가 참으로 뉘우친다면 여기 사발이 있으니 저 통에 있는 것을 퍼서 먹고 마셔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허임은 서슴지 않고 그것을 한 사발 듬뿍 퍼서 단숨에 삼켜버리고 다시 뜨려고 하니 옥사장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만 두어라, 그만 둬. 그렇지만 여기 십자가가 있으니 네가 배교하기 싫거든 십자가 앞에 엎드려라." 허임은 꿇어서 이마를 땅에 대고 조아리며 배반하였던 예수를 온 마음을 다해 통회하고 예배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배교를 취소하고 심한 매질과 함께 옥중에서 45세의 나이로 순교하게 됩니다.  위 이야기는 수많은 순교 이야기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분들은 신학을 배우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교리를 많이 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요? 누가 그렇게 순교하고 싶은 열망을 넣어주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박해를 받을 때가 당신을 증언할 가장 좋은 기회라 하시면서 아무 걱정 말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아주 단순한 진리이지만 그 순간이 오면 그리스도께서 손수 우리에게 힘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로드리고 신부처럼 예수님의 뜻을 밟고 살아가기 일쑤인 우리들, 조용히 이렇게 기도해 보는 건 어떨까요?

“예수님, 제 안에 계신 예수님, 당신 없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저에게 성인들에게 주셨던 힘을 나누어 주시어 오늘 아주 작은 일에서 당신을 드러낼 수 있게 하소서.”

  *******************  오늘의 묵상   ********************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박해는 주님을 증거 할 기회라는 말씀이십니다.
제가 관구 봉사자일 때 교환 교육의 일환으로 1년간 형제들을 다른 나라에 보내어 외국생활을 하게 했고 이것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때 한 형제를 파키스탄으로 보내려고 하는데 9. 11 사태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이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하였고 옆 나라 파키스탄도 외국인이 가기에 위험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위험한데도 가겠느냐고 물으니 그 형제는 “그러니까 가야한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박해, 수난, 시련. 이런 것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판가름합니다. 도망치는 사람과 감수하는 사람을 판가름하고 꺾이는 사랑과 더 활활 타오르는 사랑을 판가름합니다.
작은 불은 물을 끼얹으면 꺼집니다.
그러나 이미 큰 불은 물을 끼얹으면 오히려 불길이 일어나 더욱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우리가 받는 박해와 수난과 시련은 하느님 때문에 받기만 한다면 우리 사랑을 더 활활 타오르게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포르토 마우리치오의 성 레오나르도는 십자가 신비의 전파자입니다. 특히 우리가 요즘 바치는 14처 십자가 길을 널리 전파한 분입니다.
그는 하느님 아드님의 수난이 우리 영 안에 생기를 불러일으키고 하느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게 한다고 얘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칭송합니다.
“예수님의 혹독한 수난에 대한 묵상은  누구도 감히 이겨낼 수 없는 영의 강인함을 줄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는 짧은 시일 안에 사람들의 성격을 순화시키고 악습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선물이며 고삐 풀린 욕정의 치료제이며 성덕과 거룩한 삶에로의 격려입니다.”
 
                                                
                                                           가톨릭성가 27번 / 이 세상 덧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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