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를 좋게, 밝게 바라보십시오.> -루가 21,29-33

2008. 11. 28. 오전 6:19:20

글자
 

11월 28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루가 21,29-33

 
<죽은 이들은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나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20,1-4.11―21,2
1 나 요한은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지하의 열쇠와 큰 사슬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2 그 천사가 용을, 곧 악마이며 사탄인 그 옛날의 뱀을 붙잡아 천 년 동안 움직이지 못하도록 결박하였습니다. 3 그리고 그를 지하로 던지고서는 그곳을 잠그고 그 위에다 봉인을 하여, 천 년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민족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뒤에 사탄은 잠시 풀려나게 되어 있습니다. 4 나는 또 어좌들을 보았는데, 그 위에 앉은 이들에게 심판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이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의 상에 경배하지도 않고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도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11 나는 또 크고 흰 어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이 그분 앞에서 달아나 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12 그리고 죽은 이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13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고, 죽음과 저승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14 그리고 죽음과 저승이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 못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15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21,1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2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9-33
그때에 2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30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31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3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매사를 좋게, 밝게 바라보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전에 다가온 하느님 나라 앞에 어떤 얼굴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삶의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날이 다가오면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인간이 기를 쓰고 쌓아올린 업적들도 한 순간에 무너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던 재산, 명예, 자리...모두 허사가 될 것입니다.  

   모든 육적인 것들, 물질적인 것들은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군요. 지금까지 우리가 목숨 걸고 살아왔던 육적인 삶을 버리고, 이제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삶, 그분 말씀에 따라 이웃사랑의 실천을 우위에 둔 영적인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이 아무리 암담하다 하더라도, 곧 도래할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하며, 다시금 용기를 내어 일어서는 낙관적인 삶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매사를 좋게 바라보고, 넓게 바라보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노력을 주님께서는 높게 평가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돈보스코의 모친 맘마 말가리다의 기일이자 천상탄일입니다. 

   그녀의 삶은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크나큰 시련 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밭에 나가서 땀 흘려 일하다 돌아온 남편이 지하창고에 들어갔다가. 그 서늘한 기운에 급성폐렴이 걸리고 맙니다. 투병 단 몇 일만에 남편을 야속하게도 세상을 떠납니다. 

   당시 돈보스코의 나이가 2살이었습니다. 그녀의 나이는 29살이었습니다. 20대 청상과부가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어머니와 아들 세 명이 그녀의 손 안에 남겨졌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당시 대 기근으로 인해 중산층조차도 양식을 걱정해야할 정도였습니다. 

   한 순간에 사랑하던 남편이자 가정의 지주를 잃어버린 맘마 말가리다는 그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밤낮을 눈물로 지새웠습니다. 식음도 전폐했습니다. 

   죽음과도 같은 상황, 도망가고 싶은 상황, 지옥 같은 상황이었지만, 맘마 말가리다는 결국 스스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고통스런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묵묵히 일어섭니다. 매일 하느님께 간절히 ‘일어설 힘을 달라’고 수도 없이 청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평상심을 되찾습니다. 들로 나가 남편이 하던 일을 그대로 다 해냅니다. 동시에 자녀교육에 헌신합니다. 돈보스코를 위대한 교육자 사제로 키워나갑니다. 

   그녀의 그런 배경에는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 근면 성실한 삶의 태도, 열렬하지만 조용하고 깊이 있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대교육자 돈보스코는 가난한 어머니 맘마 말가리다로부터 큰 재산을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아무리 큰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물러서지 않는 낙천적인 성격, 낙관주의란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날, 하느님 나라를 목전에 둔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자세는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이끌어 나가려는 노력입니다. 힘겹고 고달프더라도 꾸준히 희망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그 한가운데를 지나면서도 매사를 좋게. 밝게 보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연중 제 34 주간 금요일 - 지나친 생각은 오류를 낫는다

                                                     
                                                              가톨릭성가 68번 / 기쁨과 평화 넘치는 곳

 

 얼마 전에 여기서 공부하는 몇몇의 신부님들과 술자리를 하면서 신학적인 내용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의신학 석사과정을 마치신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모든 죄는 인간의 자유에서 나옵니다. 만약 자유가 사라진다면 죄를 지을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천국에서 인간이 죄를 짓지 않는 이유는 인간에게 더 이상 죄를 지을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십년이 넘게 신학을 배우고도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더 놀랐던 것은 함께 있던 대부분의 신부님들이 그 신부님의 말씀에 찬성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유가 없어서 죄를 안 짓는다...?” 

사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그런 말은 틀린 것을 넘어서서 이단에 가깝습니다.사람이 사람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자유’입니다. 만약 자유가 없다면 더 이상 온전한 인간은 아닐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있었다는 말은 인간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는 뜻입니다. 에덴동산은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천국에서 쫓겨나기 전까지도 항상 자유를 지니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빼앗으면 기계나 로봇이 되지 참 인간은 안 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자유가 없으셔서 죄를 짓지 않으셨을까요? 오히려 죄를 지으면 자유를 빼앗깁니다. 죄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돈에 눈이 먼 사람은 돈 앞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돈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은 어떤 것의 노예가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완전히 자유로우셨던 것이고 그래서 죄도 짓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 분들은 자신들의 자유로 자신들의 뜻을 포기하고 주님의 뜻만을 따를 정도로 완전한 자유를 사셨던 모범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그런 단순한 진리들을 벗어나서 오류에 빠지고 말까요? 그것은 기본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고 기본적인 진리들보다 자신들의 생각을 더 우선시하는 교만때문 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상 마지막 때가 오는 것을 이런 표징들을 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봄이 가고 바로 다시 겨울이 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온다는 것은 경험으로, 혹은 배웠기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렇게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 이 단순한 진리가 들어있지 않다면 나무에 잎이 돋는 것을 보아도 여름이 오는 것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알거나 무엇을 깨닫기 이전에 그것들을 판단할 기준인 진리들을 먼저 숙지하고 있지 못하다면 생각 속에서 진리들을 벗어나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때는 성경도 없었을 뿐더러 성경이 있을 때에도 성경보다는 교리를 먼저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성경이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보면서도 각자 다른 해석을 하게 되고 오류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개신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의 분열이 이 기본적인 진리들을 무시한 채 개인의 생각만으로 무엇을 해석해내려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잘못된 오류와 가르침들이 넘쳐납니다. 혹은 기도가 아닌 스스로의 생각에서 오류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온전히 정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먼저 숙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혹 무엇을 결정하거나 생각을 할 때 성체 앞에서 하십시오. 그러면 그 분의 빛이 생각을 기도로 만들어 좋은 결심을 하게 할 것입니다. 

  ******************   오늘의      묵상    *******************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오늘 독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어제 박 프란치스코 형제님을 땅에 묻고 와서인지 “사라지다”는 말이 계속 맴돕니다.
땅에 묻음으로 분명 우리 앞에서 사라졌는데 아직까지 우리와 함께 있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속절없이 그를 묻고 와서 잊어버리려 일부러 T.V를 보는데도 휴게실에 걸려있는 영정 사진 속의 웃는 형제님이 계속 옆에 있으면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물체가 있다가 사라져도, 화면이 있다가 사라져도, 그것이 강렬하게 인상지어졌으면 잔영이 계속 남아 있듯, 존재가 사라져도 우리 안에 그 존재의 흔적이 잔영마냥 한 동안 가는 모양입니다.
20년을 같이 지낸 제 친구가 죽었을 때 1년 반이나 갔으니 30년을 같이 산 형제님이 그렇게 바로 사라지겠습니까?
그런데 박 프란치스코 형제님은 사라진 것입니까, 떠나간 것입니까?
사라져 없는 것이나, 떠나가 없는 것이나 내게 없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느낌이 상당히 다릅니다.
내가 싫어서 떠난 것이 아니고 내가 미워서 떠난 것은 더더욱 아니니 사라졌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 것 같고 나에게 더 좋은 것일 수도 있지만 사라진 것이 떠나간 것보다 더 잔혹한 것 같습니다.
동사에 두 가지 동사가 있지요. 자동사(自動詞)와 타동사(他動詞).
목적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동사가 자동사요 목적과 반드시 연관하여 움직이는 동사가 타동사지요.
'사라지다'와 '떠나 가다'는 자동사와 타동사의 차이입니다.
'떠나 가다'는 무엇을 또는 어디를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 반대말인 ‘찾아 가다’라는 말이 찾아 가는 대상인 목적어가 있고 찾아 가는 이유와 목적이 있으며 따라서 의지가 있듯이 떠나가는 것은 떠나는 대상인 목적어가 있고 떠나가는 이유와 목적이 있으며 따라서 의지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사라짐은 무정(無情)한 떠나감입니다.
사라짐은 관계 면에서는 무관한 관계의 있다가 없어짐이요, 존재 면에서는 허무(虛無)함의 있다가 없어짐일 뿐입니다.
없어지는데 나는 아무 고려 사항이 아닙니다.
이파리가 나무에서 떨어지듯 사라짐은 나와 아무 상관없이 나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잔영은 남지만 점점 없어지는 것입니다. 단번에 없는 것이 아니라 점점 없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라짐은 무서운 허무입니다.
떠나감은,  미워서 나를 버리고 떠나든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든, 미운 정이든 고운 정이든 정을 남기는데 사라짐은  사랑도 미움도 없고 남기는 것도 없는 무정(無情)한 떠나감입니다.
하늘과 땅은 이렇게 무정하고 허무한 것입니다.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있을 것 같지만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말씀만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오늘 주님께서는 힘주어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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