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시기는 ‘예수 성탄 대축일’ 전의 4주간을 말한다. ‘대림’(待臨)이란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이 용어는 ‘도착’을 뜻하는 라틴 말 ‘아벤투스’(Adventus)를 번역한 것이다. 오실 분은 물론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그분은 이미 이천 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셨던 분이시다. 교회는 전례를 통하여 그분의 탄생을 새롭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대림 첫 주일부터 ‘한 해의 전례주년’이 시작된다. 교회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 올해의 대림 시기에도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열망하며 기다리던 그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한편 대림 시기에는 종말에 오실 예수님을 묵상하며 기다린다. 이런 분위기는 대림 첫 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의 전례에 많이 나타난다. 성경 말씀도 ‘깨어 기다리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12월 17일부터 성탄 전야인 12월 24일까지는 예수님의 탄생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렇듯 대림 시기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 오심’을 기념하는 성탄절의 준비와 ‘두 번째 오심’인 종말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대림 시기에는 ‘대영광송’은 노래하지 않지만 ‘알렐루야’는 노래한다. 대림 시기 역시 회개와 보속의 시기지만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전례 때 사제는 속죄를 뜻하는 보라(자주)색 제의를 입는다. 그러나 대림 제3주일에는 기쁨을 나타내는 장미색 제의를 입기도 한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3,16ㄹ-17.19ㄷ; 64,2ㄴ-7
16 주님, 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17 주님, 어찌하여 저희를 당신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희 마음이 굳어져 당신을 경외할 줄 모르게 만드십니까? 당신 종들을 생각하시어, 당신의 재산인 이 지파들을 생각하시어 돌아오소서.
19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이다.
64,2 당신께서 내려오셨을 때 산들이 당신 앞에서 뒤흔들렸습니다. 3 당신 아닌 다른 신이, 자기를 고대하는 이들을 위하여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예로부터 아무도 들어 보지 못하였고, 아무도 귀로 듣지 못하였으며, 어떠한 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4 당신께서는 의로운 일을 즐겨 하는 이들을, 당신의 길을 걸으며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죄를 지었고, 당신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당신의 길 위에서 저희가 늘 구원을 받았건만, 5 이제 저희는 모두 부정한 자처럼 되었고, 저희의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들도 모두 개짐과 같습니다. 저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어, 저희의 죄악이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갔습니다.
6 당신 이름 부르며 경배드리는 자 없고, 당신을 붙잡으려고 움직이는 자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외면하시고, 저희 죄악의 손에 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7 그러나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3-9
형제 여러분,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4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어떠한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8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9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3-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4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悶“?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35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일 년 내내 기다렸습니다. 자기들이 살아 있는 동안 오실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기다림과 함께 죽어 갔습니다. 재림의 준비는 그대로 죽음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끝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예수님을 ‘먼저 가서 만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저승으로 건너가는 다리로 봤던 것이지요.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렇게 대림 시기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이것이 대림 시기의 교훈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준비로 “깨어 있어라.”고 하십니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부지런한 문지기’처럼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연결된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매일의 기도와 매일의 선행을 점검하는 일입니다. 기도와 선행을 실천해야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시련과 고통을 만나도 쉽게 하느님을 향하게 됩니다. 금년 대림 시기에도 ‘기쁨의 신앙생활’을 체험하며 지내야겠습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순도 높은 기다림>
또 다시 기다림의 때, 대림시기가 다가왔습니다.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가장 절박하게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기다렸던 때는 언제였던가?
아무래도 군대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얼마나 힘겨웠던지, 얼마나 길었던지, 또 얼마나 지루했던지 눈만 뜨면 ‘이제 얼마 남았지?’ 하고 꼬박꼬박 날짜를 지워나가며 제대 날짜를 기다렸습니다.
잠깐 동안 유학생활을 할 때의 기억도 끔찍합니다. 외국어, 그까이꺼, 일단 나가면 적당히 되겠지, 했었는데, 생각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어학연수 시절, 하늘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만 봐도, 저게 KAL기인가, 저거 타고 그만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 두 번이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팍팍하던지, 빨리 논문 끝내고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꽤 오래전, 갑작스런 발병으로 한밤중에 응급실 신세를 진 적이 있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조여 오는 죽음의 공포에 떨며 혼미한 가운데서도 뭔가 신속한 조치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 제 간절한 기대와는 달리 전혀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듯한 새파란 ‘왕초보’ 의사들만 번갈아가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제대로 된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아침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점점 증폭되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발 빨리 아침이 와라. 제대로 진료할 수 있는 의사 선생님, 제발 빨리 출근 좀 하세요!”
또 다시 도래한 이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가 지닌 ‘기다림’의 질은 어떻습니까? 강도나 수준은 어떻습니까?
이 대림시기, 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보다 열렬히, 보다 순도 높게 주님을 기다릴 일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저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는 일이 절대 아니겠지요. 기다린다는 것,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는 것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운다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나 자신 안에 있는 깊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 중지되었던 주님과의 영적 여정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겠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적 삶을 탈피한다는 것, 내 지난 삶에 대한 대대적인 성찰과 쇄신작업을 시작한다는 것을 뜻하겠지요.
이 대림시기, 우리도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주님께서는 더 간절히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기다림'이라는 희망과 함께 살아갑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또 무엇을 기다리면서 결국 우리가 보다 행복해질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면, 올바로 사랑해야 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지요? 아니면 사랑해서는 안될 신분에 있는 사람임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있는지요? 혹은 자기에게 어떤 혜택을 가져올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지요? 또는 사람이 아닌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지요? 그것은 돈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명예 혹은 보다 나은 자리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여러 가지를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바라던 것을 이루었다 해서 과연 마음이 흡족하고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정말 없었던가요? 사실은 오히려 갈증만 더 나고 욕심만 커질 뿐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 사람이나 이 세상 것들이 결코 우리의 마음을 충족시켜 줄 수 없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졸고 있는 잠자는 사람'이란, 이 세상 것들만을 기다리며, 거기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문지기에게는 더욱 깨어 있어야 한다고 특별히 명령하십니다.
이 문지기란 첫째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깊은 잠에서 일깨우고 깨우쳐 주어야 할 오늘의 성직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즉 성직자는 물질의 세상에 섞여 살지라도 우선 자신부터 세상 재물욕에서 깨끗이 벗어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며 속세의 어느 지식보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만 세상 재물에 넋을 잃은 사람들을 일깨워 줄 수 있으며, 계속 밀어닥치는 여러 가지 위험스러운 풍조들을 앞에 나서서 가로막을 수 있고, 세상 여기저기에 이미 뿌리 박은 여러 가지 사상들 중 어느 것이 옳고 그른가를 날카롭게 가려내어 사람들을 깨우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문지기들이란 또한 오늘의 신앙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속세의 흐름 속에 그저 분별 없이 함께 휩쓸리거나 말려들지 않음으로써, 인류 구원은 결코 이 세상 것이나 이 세상 사람에게서가 아닌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오는 것임을 자기들의 믿음의 생활로 자신있게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신앙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들이 몸소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 이웃 형제들에게 이렇게 외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형제여, 어서 잠에서 깨어 나시오. 오실 분이 문을 두드리시며 지금 밖에서 형제를 부르고 계십니다!"
(김용배신부님 강론 글에서)
여호수아의 군대가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 가정 먼저 정복해야 했던 도시가 예리고였습니다. 예리고는 워낙 난공불락의 성이라 감히 쳐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 두 명의 정탐꾼은 라합이라는 창녀의 집에 머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라합만이 여호수아가 보낸 파견자들을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신약에서 ‘예수’와 같은 이름이고 ‘해방자’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라합이라는 창녀는 그리스도께서 파견한 사람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라합은 죄인이지만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옛 교부들은 하나같이 라합을 ‘교회’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우리들도 모두 한 때는 다 이방의 신들에게 몸을 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 야훼가 말한다. 너는 속옷을 벗어 알몸을 드러내었고 내 눈에 역겨운 우상을 몸 바쳐 정부들과 놀아났으며 자식들의 피를 우상들에게 바쳤다.” (에제 16,36)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신부로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것을 섬기면 성경에서는 매번 ‘간음’이나 ‘매춘’으로 표현을 합니다. 따라서 라합은 죄의 삶을 살다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우리 모두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속여서 그들을 구해주고 탈출시켜주며 예리고를 함락할 때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여호수아는 라합의 약속대로 그녀와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려줍니다. 그리스도의 파견자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며 시작되는 첫 대림주일이기도 하면서 전례력으로 새 해의 첫 날입니다. 며칠 전까지도 계속 죽음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있으라는 복음이 나오더니 새해 시작 하는 날부터 또 다시 깨어있으란 말씀이 나옵니다. 아마 깨어있음이 영성의 시작과 끝인가 봅니다. 창녀 라합은 죄 속에서 살았지만 구원이 오는 때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자신과 가족들도 모두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왜 예리고의 한 창녀를 선택했고 그 창녀는 무엇을 했기에 그런 선택을 받게 된 것일까요? 창녀는 죄인 중에 죄인이고 하느님은 그 죄인을 택하셔서 그 안에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라합은 사실 정말 그렇게 큰 죄인이 아니고 예리고에서 ‘스스로 가장 죄인이라 여기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가장 낮고 비천한 곳을 찾아 머무십니다. 태어나시자마자 여물통에 뉘이셨고 커서는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한 사람이 당신이라 하시고 마지막 순간도 태어나실 때와 마찬가지로 나무 위해서 싸늘히 식어가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당신 안에 모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자신을 비천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루카 1,46-49)성모님만큼 깨끗한 사람이 없었는데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비천함을 보시고 아들을 잉태하게 하셨다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심어 주신 영혼을 질투하실 만큼 사랑하신다.’ 는 성서 말씀이 공연한 말씀인 줄 압니까?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서에도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주신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 4,5-6)
하느님은 우리 영혼을 사랑하시되 겸손한 영혼을 더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비천하고 큰 죄인이라고 보는 것은 주님을 모시기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자신들을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면 좀 위선적인 것같이 들릴 수 있지만 그들은 정말 그렇게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빛에 가까이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가까이가면 갈수록 상대적으로 자신의 영혼이 더러움을 더 크게 느낍니다. 반대로 하느님과 멀리 있을수록 ‘내가 잘못하는 게 뭐가 있어?’라고 하며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그렇게 만족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들어올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낮추는 것은 그분이 들어 올 공간을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업은 기도가 아니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기도는 마음을 들어 올려 그분께 더 가까이 가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하고도 자신의 비천함을 더 느끼고 더 겸손해지지 않았다면 그 기도는 잘못한 것입니다. 깨어있으라는 말은 항상 기도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하느님께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스승은 대답 대신 "태양을 떠오르게 하기 위해 인간인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반문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되지도 않고 될 수도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제자는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그렇다면 제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방법도 소용없겠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태양이 떠오를 때 자네로 하여금 깨어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네." 그렇습니다. 그 분을 모시기 위해 우리가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다만 꾸준한 기도로 내 안에 그 분의 자리를 마련해 놓는 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순결한 창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교부들이 교회를 지칭하기 위해 자주 사용해오던 말이었습니다.
“(신부)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나 비록 검지만 케달의 천막처럼, 실마에 두른 휘장처럼 아름답다.” (아가 1,5) 우리들은 비록 죄로 검어졌지만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할 때야만 그 아름다움이 배가 되는 것입니다. 나도 교회도 모두 검은 죄와 영혼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순결한 창녀’입니다. 스스로 정의롭다고 여기는 어떤 누구도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실 수 없습니다. 스스로 순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창녀처럼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들을 섬겼음을 고백할 때만이 순결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회개하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순결한 처녀와 혼인하여 한 몸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가장 겸손하고 가장 깨끗하신 성모님을 택하시어 먼저 둘이 한 몸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제 대림이고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들, 이번 주도 깨어있으란 말을 듣습니다. 깨어있으란 말은 본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나의 비참한 처지를 보는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빛으로 내 자신을 보아야 내 자신이 주님을 모시기에 얼마나 부당한지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 부당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순결한 성체를 모시면서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은 호세아가 창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호세 1,2-3 참조) 그녀를 순결하게 한 것처럼 죄인들인 우리 안에 오시어 우리를 더 순결하게 하시기 위해 더러움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비천함을 확실히 깨닫고 깨끗해지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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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리는 어머니는 아름답습니다.
따뜻한 저녁상을 준비하고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는 아내는 아름답습니다.
군인 간 애인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여인은 아름답습니다.
몸과 마음을 조심하며 새 생명이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잉태(孕胎)한 여인은 아름답습니다.
나그네 인생 길에서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며 하나 둘 삶을 정리하는 노인은 아름답습니다.
벌과 나비를 기다리며 향기로운 꿀과 아름다움 꽃잎을 준비한 꽃들은 아름답습니다.
푸르고 무성한 잎 사이에 영근 열매들을 감추고 가을이 오기를 기다리는 과실나무들은 아름답습니다.
황금물결 출렁이며 농부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벼들은 아름답습니다.
화사하게 물든 단풍잎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겨울 맞을 채비를 하는 나무는 아름답습니다.
하늘을 향해서 가지들을 펼치고 따듯한 봄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느티나무는 아름답습니다.
예수님, 우리는 당신 재림의 시간을 알지 못합니다. 내일 우리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지언정 지금 솔로몬보다 더 화려하게 차려 입고 아름다움을 뽐내는 들꽃처럼(마태6,29)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기다림은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기다림은 아름답습니다.
새봄을 기다리는 느티나무처럼 당신의 오심을 기다리겠습니다. (一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