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 루카 10,21-24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를 것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11,1-10
그날에 1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2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3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4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5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6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7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8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9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10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1-24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자신을 조금씩 덜어내는 일>
나이가 조금 더 들면 하고 싶은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선호하는 기술 한 가지 확실하게 익혀 하루 온종일 아이들 곁에서 보내고 싶은 바램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한적한 바닷가에 아이들 집 하나 마련해서 머리 쓰기 싫어하는 아이들만 따로 골라 함께 살며 밥해주는 일입니다. 함께 밭을 일구고 함께 낚시를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추억을 쌓아주는 일이 제 꿈입니다.
살면 살수록 단순한 삶이 얼마나 은혜로운 삶인가를 실감합니다. 비록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매일의 노동이 기다리고 있고, 그래서 매일 땀흘려 일하다보면 하루해가 짧은 소박한 삶이 진정 행복한 삶입니다.
너무 머리 쓰지도 않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 한적한 자연 속의 삶이 별 가치 없어 보이는 삶 같지만 사실 본래 인간 본연의 삶이었고, 정상적인 삶이었습니다.
지나치게 복잡하고 세분화된 사회구조와 인간관계의 틀 안에서 잠시의 여유도 없이 빡빡하게 돌아가는 우리들의 일상입니다. 잠시의 여유라도 있으면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의아심이 들 정도입니다. 할머니들도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일일이 스케줄을 확인하시는 세상입니다. 바쁜 사람이 잘 사는 사람, 유능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살다보니 한적함, 단순함, 소박함, 겸손함, 천진함, 동심, 비움, 버림, 떠남과도 같은 단어들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너무도 어색한 단어, 별세계에서나 사용되는 단어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눈만 떴다하면 머리를 회전시키고, 밥만 먹었다하면 복잡한 문명의 바다로 우리의 온몸을 던져버리니 철저하게도 영적인 존재인 하느님을 체험할 여유가 참으로 부족합니다.
이런 우리 앞에 예수님께서는 보란 듯이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보다 단순하게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보다 여유 있고, 보다 자연스럽게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우리 삶의 여백에, 우리 삶의 주변 어디든 자리잡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조금이나마 인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도록 말입니다.
가난하게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가난하다는 말은 잃을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결국 가난한 사람은 소유의 상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에, 성낼 필요도 없게 됩니다. 결국 가난함으로 인해 자유를 느끼고 가난함으로 인해 영적인 눈이 뜨여 하느님의 손길을 보다 자주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버리면 버리는 만큼 진리와 자유에로 결국 하느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을 닦는 다는 것은 날마다 자신을 조금씩 덜어내는 일입니다.
쫓기듯이 살고 있는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늘 바쁜 걸음을 천천히,
천천히 걷게 하시며,
추녀 끝의 풍경소리를 알아듣게 하시고
거미의 그물 짜는 마무리도 지켜보게 하소서.
꾹 다문 입술 위에 어린 날에 불렀던 동요를 얹어주시고
굳어있는 얼굴에는 소슬바람에도 어우러지는 풀밭 같은
부드러움을 허락하소서.
책 한 구절이 좋아 한참 하늘을 우러르게 하시고
차 한 잔에도 혀의 오랜 사색을 허락하소서.
돌 틈에서 피어난 민들레 꽃
한 송이에도 마음이 가게 하시고
기왓장의 이끼 한 낱에도 배움을 얻게 하소서.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제가 박사논문을 쓰려고 준비하는 것은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의 사상 안에 나타난 ‘마리아/교회, 말씀의 신부’라는 제목입니다. 발타살은 추기경까지 오른 독일의 정통적인 신학자이고 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추기경 서품을 며칠 남겨놓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은 다른 큰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분량의 책을 쓰시고 신학 전 분야에 걸쳐 뛰어나고 정통적인 이론을 펼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마지막으로 쓴 것은 위대한 어떤 신학적인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성탄카드를 아는 사람들에게 쓰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그 성탄카드마다 이런 말을 써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것을 끝까지도 쓰지 못하셨습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이것이 위대한 신학자의 마지막 말입니다. 신학자란 진리를 학문적으로 깨우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진리를 아는 가장 위대한 방법이 바로 어린이처럼 되는 것임을 마지막에 더욱 절실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진리는 철부지 어린이들에게만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많은 공부를 하는 것보다 어린이처럼 되는 것이 진리를 더 빨리 깨닫는 방법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리가 무엇일까요? 왜 신학자들은 진리란 것을 깨우치려고 그리 노력했을까요? 예수님을 심판했던 빌라도도 진리에 대해 묻습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 하고 대답하셨다. 빌라도는 예수께 ‘진리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요한 18, 37-38)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인지 묻지만 꾸준히 묻지는 않습니다. 그저 지나쳐버립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도 빌라도는 ‘진리’에 대해 큰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진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말씀해 주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아들에게 넘겨주셨다.’는 뜻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알려주셨다는 뜻과 같습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이고 모든 것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이 알고계신 아버지를 알려주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 넘겨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진리’입니다. ‘사랑’이 진리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상 하느님을 모르면 사랑을 모르는 것이고 그래서 완전하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 사랑도 알고 그래서 참 사랑을 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진리’를 이 세상에 알려주려 오신 이유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행복하신 것처럼 우리도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랑해야 행복할 수 있는데, 우리는 좀처럼 하느님에 대해 알려고 달려들지도 않고 어떻게 해야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하느님을 더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느님을 알기 위해 평생 책속에 파묻혀 살았던 발타살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따라서 주님의 나라, 즉 온전한 행복, 완전한 사랑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어린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어린이들을 보고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이 있는지 관찰해보시면 잘 알게 되실 것입니다. 어린이를 스승으로 삼읍시다. 그러면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즐거워하시는 예수님
오늘 복음의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보기 드문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감정을 드러내 보이시는 장면들 중의 하나인데, 유대 지도자들에게 분노하거나 안타까워하시는 그런 장면은 많지만 오늘처럼 즐거워하시는 장면은 드물고 그리고 같은 얘긴데 마태오 복음에서는 즐거워하셨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고 루카 복음에서만 나옵니다.
오늘 루카 복음에서의 주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십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명이 나서 말씀하셨다 합니다.
즐겁고 신이 난다!?
누군가 맞장구를 잘 치면 우리는 신이 나서 얘기하고 누군가 가치를 알아주면 신이 나서 일을 하고 누군가 나를 알아주면 신이 나서 자기의 것을 바칩니다.
그런데 성령 안에서 즐겁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명이 난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영적인 즐거움이고 영(Spirit)이 나는 것,
영어로 표현하면 ‘to enter into the spirit of things'입니다.
신, 또는 신명이 난다는 것은 영이 막히지 않고 영이 자유롭게 들고 나는 것입니다.
내 말을 잘 받아들이면 신이 나서 얘기하듯 누군가 영을 잘 받아들이면 신명이 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을 잘 받아들이니까 주님께서 신명이 나셨습니다.
당신의 영발이 받아들여지니 영발이 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보내시면 어떤 사람은 담벼락처럼 탕탕 튀어나오는데 어떤 사람은 쏙쏙 잘 받아들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지혜롭다는 사람, 슬기롭다는 사람에게는 지식만 받아들여지고 영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철부지와 같은 사람에게는 영이 받아들여지는가 봅니다.
겨울 새벽의 남기 빛 하늘이 성큼 멀면서도 가까이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내려와도 쳐다보는 사람이 있어야 보지요.
이 대림절.
주님께서 오셔도 보는 사람에게만 보일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철부지란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맞장구 잘 치는 사람 주님께서 오실 때 하늘을 잘 쳐다보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 새벽,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바라보듯 하늘을 봅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보여 주시고자 해도 그럴 자격이 없었거나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은 당대의 지식인들입니다. ‘하늘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지적으로도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예언자답게 사는 것이 먼저입니다. 예언자가 예언자답게 살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피해를 줍니다.
임금은 권력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의 권력 역시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것도 이 세상의 권력이지 ‘저세상’까지 유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위임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은총이 함께합니다. 착각하기에 사람을 괴롭힙니다.
복음의 백부장은 한낱 종을 위해 자신을 숙였습니다. 기적을 받을 사람답게 행동했던 것입니다(마태 8,5-13 참조). 우리 역시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