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같은 일, 천부당만부당한 일> 마태오 8,5-8

2008. 12. 1. 오전 7:03:32

글자

12월 1일 대림 제1주간 월요일 - 마태오 8,5-8

<주님께서 영원한 평화의 하느님 나라로 모든 민족들을 모아들이시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1-5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이다.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오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5-11
5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6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기적 같은 일, 천부당만부당한 일>

 

   인간사회에서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예절이 있습니다.

 

   보통 스승이 제자를 찾아가기에 앞서, 제자가 먼저 스승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립니다. 장관이 실무자를 먼저 찾아가기보다는 실무자가 결재 판을 들고 장관을 찾아갑니다. 명절 때 부모가 자녀들 집을 먼저 찾아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자녀들이 먼저 부모님을 찾아가 인사를 올립니다.

 

   그런데 성체성사는 그런 보편적인 인간의 틀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성체성사는 어떤 성사입니까?

 

   크신 하느님, 만물의 창조주, 세상만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을 부족한 죄인인 우리가 먼저 찾아가 뵈어야 당연한 일인데, 황공스럽게도 그분께서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은총의 성사입니다.

 

   너무나 송구스런 일이기에, 천부당만부당한 일이기에, 정녕 기적 같은 일이기에 성체를 영하기 전에 우리는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사실 우리가 송구스러운 나머지 미사 때 마다 외치는 위 성체성사 전례문은 백인대장이 오래 전 외쳤던 말이었습니다.

 

   백인대장의 신앙은 무척이나 올바르고 깊은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왕 중의 왕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비 충만한 치유의 하느님이란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사도들 못지않은 신앙, 유다인 저리가라 할 정도의 제대로 된 신앙을 지니고 있었던 백인대장이었기에 겸손하게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이런 백인대장의 열렬한 신앙, 깊은 신앙 앞에 예수님께서도 감탄하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병자들은 치유나 기적을 이루어지기 위해 예수님께서 현장에 계셔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의 몸에 손을 대어야만 치유가 가능한 것으로 알고 그렇게 기를 쓰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그들의 신앙을 뛰어넘습니다.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느님, 굳이 오시지 않아도 말씀 한마디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신뢰, 예수님을 향한 신앙심이 그 누구보다도 투철했습니다. 이런 백인대장 앞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외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시는  인내의 주님, 
너무나도 부족한 믿음을 지닌 우리들입니다. 
청하면서도 의심하고, 구하면서도 의혹에 찬 시선을 거두지 않는 불쌍한 우리를 용서하여주십시오. 

부디 청하오니 오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주십시오.

 

백인대장의 그 견고한 성채 같은 믿음은 아닐지라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오늘 우리에게 내려주십시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하느님 나라의 불랙 홀

 

제가 처음 외국을 나간 것이 1987년이고 제일 처음 간 곳이 필리핀입니다.
지금도 그러한 경향이 강하지만 그때는 국수주의에 가까운 잘못된 민족주의를 가지고 있었고 서구의 논리분석적인 사고방식이나 문화에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러한 저였기에 외국어는 배우기도 싫어했고 억지로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
고등학교 때까지 괴로움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제가 처음 필리핀에 가서 놀란 것 중의 하나가 이들은 혼혈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일민족, 한 핏줄을 자랑스러운 것으로 교육받아 순혈주의자인 저에게 이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하느님 나라를 향해가는 저의 지난한 신앙여정 중의 하나가 바로 배타적이고 잘못된 이 민족주의를 깨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하느님 나라는 구별이 없고 차별은 더더욱 없는 곳.
하느님 나라는 양단의 개념도 없는 곳.
그래서
선에 대한 악도 없고 악에 대한 선도 없는 곳.
성에 대한 속도 없고 속에 대한 성도 없는 곳.
그래서
선으로 악을 단죄하는 독선이 없는 곳.
성으로 속을 배척하는 근본주의가 없는 곳.
그래서
다름으로 갈등이 없는 곳.
다름으로 전쟁이 없는 곳.
오로지
하느님과 하느님 통치만이 있는 곳.
불랙 홀에 모든 것이 빨려들 듯
온갖 다름이 하느님 사랑으로 빨려들어 하나로 용해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백부장의 놀라운 믿음 고백을 들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잡을 것이다.”
 

 

                 - 왜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서 순수하지 않은 의도가 섞여있는 사랑의 모습을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종교에서 그러라고 가르치니까 억지로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영애씨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친절한 금자씨’가 생각납니다.

한 여자 감옥에 예쁘고 착한 금자씨가 복역하고 있습니다. 살인자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모든 사람에게 너무 친절합니다. 한 여죄수를 괴롭히는 또 다른 잔인한 여죄수를 친절하게 3년 동안 락스를 먹여가면서 죽이기까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매우 친절합니다. 교도소 내에서도 ‘친절한 금자씨’로 통하며 13년간의 복역생활을 무사히 마칩니다.

사실 금자씨는 살인누명을 쓰고 복역 중이었던 것입니다. 금자씨는 자신이 그렇게 친절하게 해 주었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백선생 (최민식: 금자씨의 딸의 생명을 담보로 살인 누명을 씌웠던 장본인)에게 천천히 그리고 잔인하게 복수합니다. 그러니까 친절한 금자씨의 그 친절은 어쩌면 복수를 위한 친절이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복수만을 생각하며 동료 복역수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지만은 않았겠지만 그 친절은 어쨌든 복수라는 의도에 조금은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온전한 사랑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누구와 혼인하는데 그 사람보다는 그 사람의 돈이나 명예, 능력 등을 더 보고 결혼했다면 나중에 그 사람이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기분이 좋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한 것보다는 배경을 더 사랑했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백인대장은 참으로 순수한 사랑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백인대장은 로마 군대에서 장교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자신의 종이 아픈 것을 보고 속국인 이스라엘 한 사람에게 그 치유를 청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믿음을 칭찬해 주시지만 저는 그 순수한 사랑의 마음에 더 정이 갔습니다. 자신의 가족도 아닌 자신의 종인데도 손수 주인이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할지도 모르면서 치유를 부탁하는 모습, 그것도 굳이 오실 필요 없이 한 말씀만 하라고 하며 그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는 모습, 그러므로 백인대장은 완전한 믿음을 넘어서서 완전하게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왜 사랑했을까요? 왜 사랑하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본질이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시기 때문에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 되십니다. 혼자서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왜 사랑하려고 하실까요?   저는 “사랑하면 행복하다.”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본질이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행복이시기도 합니다. 왜 인간을 창조해서 사랑하시려고 할까요? 당신이 그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지 않다면 굳이 인간을 창조하셨을까요?

하느님은 사랑으로 세상 만물을 창조할 때마다 “보시니 좋았다!”, 특별히 사람을 만들고는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도 사랑의 모든 행위들을 당신이 좋기 때문에, 당신이 행복하기 때문에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사랑에 ‘행복의 의도’가 들어간다고 느낍니다. 오늘 백인대장도 종을 그렇게 사랑했기 때문에 행복했을 것입니다. 행복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랑 안에서 행복해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병이 나아서 행복해지는 것을 보기 위해 그런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본질이 사랑이고 행복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 행복으로 초대하기 위해서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랑한다.”는 말은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 사랑하던 여자가 저에게 "나를 왜 사랑해?"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어서 “사랑에 이유가 있어? 부모님은 너를 왜 사랑하는데?”라고 하며 사랑엔 이유가 없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사실 마음속에서는 ‘사랑하면 행복하잖아!’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행복을 위해 사랑한다는 말은 이기적인 것도 같고 사랑에 의도가 섞여있는 것도 같아서 그렇게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가톨릭성가 93번 / 임하소서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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