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3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주간) - 마태오 25,31-46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
위기에 처한 여자 청소년들을 위해 불철주야로 뛰시는 존경하는 수녀님께서 체험하신 일입니다. 부모에게 외면당한 아이였을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도 셀 수도 없이 많은 상처를 받은 아이였겠지요. 아무리 기를 써도 그 상처가, 그 아픔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필요 했던가 봅니다. 아이는 시설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출을 거듭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한 울타리에서 생활하는 다른 아이들에게 미칠 악영향, 가출할 때마다 파생되는 심각한 문제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로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을 텐데, 수녀님께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밤 열두시가 넘은 시각이었습니다. 가출한 아이에게서 수녀님을 찾는 전화가 걸려옵니다. "수녀님, 저예요."
"응, 그래. 너구나. 지금 어디니?" "좀 먼데요. 여기 ○○동이에요."
"괜찮아. 꼼짝 말고 거기 가만있어라. 내가 지금 바로 갈게."
수녀님께서는 아이에게 왜 또 가출했는지 묻지 않으십니다. 왜 그 늦은 시각에 거기 있었는지도 묻지 않으십니다. 오직 기쁜 마음으로 데려오십니다. 그저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주십니다. 다시 한 번 새롭게 시작해보자는 말씀만 하십니다. 수녀님은 어쩌면 또 다른 돈보스코이십니다. 수녀님은 참된 사목자가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하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사목이란 세상 사람들이 사목자를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향해 사목자가 다가서는 것입니다. 사목자가 세상을 향해 자신을 활짝 여는 것이 사목입니다. 참 사목자는 언제나 준비되고 열린 마음으로 기쁘게 잃어버린 양떼를 찾아나서는 사람입니다.
당장 사정이 딱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혹은 당장 거처가 필요한 사람들을 시설로 입소시키기 위해 이곳저곳 문의를 하다 보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물론 대상자에 대한 정확한 신상파악도 중요합니다. 시설이 이미 적정 수용인원을 넘어서 어쩔 수 없는 경우도 많지요. 그러나 당장 너무나 다급한데도, 시일이 오래 걸립니다. 준비해야 할 서류도 너무 많습니다. 한마디로 너무 문턱이 높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곳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요. 말 떨어지기기 무섭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빨리 데려오십시오." "무척 상황이 딱하신 것 같은데, 사람이 우선 살고 봐야지요. 서류야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되니, 우선 모시고 오십시오." 이런 대답을 들었을 때 정말 기분이 좋고 살맛이 납니다.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아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신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한 가지 진리를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보잘 것 없는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휘청휘청 걸어가는 사람들, 그 사이에 현존하시며 절대로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복음서 전체를 한번 훑어보면 이 사실은 명백하게 입증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아주 드물게 고관대작 집에 초대도 받으셨지만, 거의 대부분 시간을 가난하고 소외받은 민중들 사이에서 지내셨습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주도권이나 기득권을 쥔 사람들 편이 아니라 고통 받는 백성들 편에 서셨습니다.
결국 현실적 눈으로만 바라본다면 '예수님=가난한 사람, 불행한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사람'로 지칭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있다면 우리는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간 것입니다.
요한 23세 교황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린 교회가 돼야 합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문을 활짝 여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레르카로 추기경님께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영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조직, 정체성 그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소중한 보물입니다."
우리가 철저히 예수님을 추종한다면 결국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들 곁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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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의 왕인가?
교회는 연중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정하여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왕이시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실로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세속적인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으며 오히려 봉사하는 왕, 아픔을 나누고 사랑을 베푸는 왕으로서 가난하고도 비천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왕이야말로 왕 중의 왕이요 세상 모두를 다스릴 왕이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에 왕이 등장하게 된 것은 기원 전 11세기경의 일입니다. 그때까지 그들에겐 하느님만이 유일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위대한 모습을 보고는 하느님께서 왕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에 등장되는 왕들은 모두가 백성을 실망시키는 왕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다윗'을 기대합니다.
‘새로운 다윗'을 소망하는 백성들의 기대는 메시아 신앙으로 발전되며 언젠가는 다윗처럼 자신들의 불쌍한 처지에서 해방시켜 복된 나라로 이끌어 줄 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그런 왕은 등장되지 않았습니다. 모진 박해 생활과 식민지 생활에서도 하느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어 등장된 분이 예수님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믿었습니다. 다윗에 버금가는 훌륭한 왕으로서 새 이스라엘을 건설할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은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왕이 되는 것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조국을 식민지에서 건지고 굶주림에서 해방시키며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는 그런 현실적인 문제에서는 그분은 어쩌면 외면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백성들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 분명히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왠지 속 시원히 세속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병자들 치유요 그리고 설교로써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뭐 그런 소극적인 일뿐이었습니다.
유다는 그래서 예수님을 팔았으며 군중들은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분은 메시아가 아니요 메시아는 아직도 안 왔다고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3차 중동 전쟁 때에 다얀 국방상이 이스라엘을 6일 만에 승리로 이끌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얀을 일시 메시아로 보았다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의 왕은 다 지나가는 것이며 왕권은 언제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아무도 반석 위에 자기 왕권을 영원히 간직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진정한 왕이십니다. 십자가 옆의 강도가 주님보고 왕이 되어 오실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천국 낙원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보통의 왕과는 다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의 왕이 계신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굶주리고 헐벗으며 감옥에도 갇힌 병들고 비천한 인생들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왕이며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만이 주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방향과 그 본질을 분명하게 바라보고 올바르게 걸어가야 합니다. 만일에 ‘왕'이라는 개념을 착각한다거나 어긋난 왕을 찾고 있다면 그는 벌 받는 곳으로 쫓겨날 것입니다.
언젠가 ‘꽃동네'에서 자신도 불구자이면서 다른 불구자를 도와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한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와서 도움을 베풀면서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을 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기적이었고 천국이었으며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걷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는 그들 가운데 주님은 분명히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기 위해 ‘왕궁'을 찾는 모습을 봅니다. 교회 자체도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궁전'을 짓는 모습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가난한 자를 바라보고 병든 자를 바라보십시오. 슬퍼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고 죄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십시오. 바로 그들 안에서 주님이 여러분을 환영하여 당신 시민으로 받아주실 것입니다.
▒ 강길웅 세례자 요한 신부
그리스도 왕 대축일 - 왕직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오셔서 사랑을 실천하며 산 이들은 구원하고 자신만 위하며 산 이들은 심판하신다는 내용이 오늘 복음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왕직을 묵상하며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와 일치되며 우리도 누리게 된 왕직에 대해 설명해보려 합니다. 세례 받은 누구나가 그리스도의 왕직과 예언직, 사제직을 이어받는 것인데 그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신자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왕입니다. 왕이란 강하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무엇이 참으로 강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참다운 왕직이 무엇인지 잘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낮아짐 안에 높음의 신비가 있고 약함 안에 강함의 신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강한 왕의 모습은 바로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려계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눈 깜짝할 사이에 당신을 못 박는 이들을 잿더미로 만드실 수 있는 힘이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세상을 정복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겪는 일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어떤 누구도 그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가장 강한 왕인 것입니다. 낮아짐이 낮아짐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왕으로 오셔서 심판하듯이 당신 성령의 힘으로 낮아짐의 삶을 살 줄 알았던 이들을 높여주십니다. “너희는 내가 온갖 시련을 겪는 동안 나와 함께 견디어 왔으니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왕권을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왕권을 주겠다.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루카 28,30) 따라서 이 세상에서 남들보다 낮아지고 남들을 섬길 줄 알았던 사람들이 하느님나라에서는 참된 왕의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승천하셔서 천상 모후의 관을 쓰셨던 이유는 그만큼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받들며 살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도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무시무시한 힘을 지닌 왕으로 보았으나 사실은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누가 가장 강한 사람입니까? 죽음을 두려워하던 황제들입니까, 아니면 순교를 기쁨으로 여겼던 성인들입니까?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갈라 4,6) 우리도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고 그렇게 왕이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는 것이 곧 왕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 사이에서 누구를 제일 높게 볼 것이냐는 문제로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시고” (루카 22,24) 왕직의 진정한 의미를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왕들은 강제로 백성을 다스린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백성의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오히려 너희 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 식탁에 앉은 사람과 심부름하는 사람 중에 어느 편이 더 높은 사람이냐? 높은 사람은 식탁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여기에 와 있다.’” (루카 22,25-27) 이는 왕직이란 것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권위나 힘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발을 닦아 주는 것은 노예들이나 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당신이 왕이시기에 노예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 낮아짐 안엔 세상 왕들은 할 수 없는 강함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발을 씻어준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의 왕들을 꿈꾸며 누가 더 높아질 것인가 만을 궁리합니다.
for one of the least brothers of mine, you did for me.’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왕과 같은 지도자는 권위가 있고 힘이 있어서 그 앞에서는 모두 무서워하고 주눅이 들게 된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도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즉, 모든 사람이 자기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고 존경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허리를 굽히기를...
예전에는 왕이 세습되어서 왕족이 아니면 감히 아무도 넘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능력만 있으면 왕이 될 수 있다.
사실 불과 100년전만 해도 흑인이 노예로 팔리고 하는 세상이었지만, 당당히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그리스도 왕의 능력은
어떤 힘이나 권력이 아니라, 봉사 혹은 희생, 보다 정확하게는 "사랑"이었기 때문에, 그런 분이야 말로 참된 왕이라고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다.
참으로 왕이 되고 싶다면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랑은 다른 말로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나 배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꼭 사람만이 아니라 나를 뺀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이 미사 시간, 그리고 미사 반주 음악과 노래 가사 등등. 나 아닌 모든 것에 관심을 집중하고 거기에 맞추고 보살펴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5살짜리 꼬마아이가 힘든 일을 마치고 늦게 들어온 아빠에게 돈 만원만 빌려달라고 한다. 이유인 즉슨, 아빠가 회사에서 받는 봉급중 한 시간에 해당되는 돈이 2만원인데 꼬마에겐 그동안 모아놓은 만원과 아빠에게 빌린 돈 만원을 합해서 아빠에게 한 시간을 사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일주일 내내 아이에게 단 한 시간도 내주지 못할 정도로 바쁘거나 관심을 주지 못하는, 혹은 관심을 주지 않는 인생들을 살고 있는 중이다.
그에 비해 예수님은 온통 관심을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사람들에게 집중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분을 두고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은 사랑이시다”고 말한다.
참된 왕이 되고 싶다면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왕은 돈이 많거나 정치권력이 막강한 사람은 아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무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힘은 권력이나 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힘있게 하고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권력이나 재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아이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아빠와 함께 보내는 단 한 시간이었다.
그것은 아빠의 사랑이었다.
그것은 아빠가 아빠의 입장에서 벗어나 아이의 처지로 내려가는 것, 아이에게 다가가서 따뜻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와 주신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그 모습은 굶주림의 모습, 목마름의 모습, 나그네의 모습, 헐벗음의 모습, 병든 모습, 감옥에 갇힌 이의 모습이었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이 가운데 전부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런 모습들 중에서 일부분은 내가 직접 몸소 체험해 보았던 것이다.
이 세상에 오직 나 혼자만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다른 사람이 미워서 아무 일도 안되고 흥분될 때, 굶주리고 목 마르고 헐 벗은 나그네의 처지를 체험하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게 태어났다. 어떤 사람은 겉은 멀쩡해도 속이 문제가 있고, 어떤 사람은 겉은 볼품없어도 속이 알차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과신해서도 안되고 남을 없신여겨서도 안된다. 하느님 보시기엔 모두가 다 잘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실한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부터 긍정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든, 혹은 한 개의 달란트를 주셨든 개수가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면서 시기하고 질투 할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자기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남을 시기하고 미워할 수 밖에 없다.
주저 앉아서 신세타령이나 하면서 남의 것을 부러워 한다면 결국 자기가 가진 달란트 마져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말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는 힘이나 권력이나 능력이 아니다.
사랑이다. 그렇기에 “가진 사람은 더 가지게 되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하느님께서 장기를 두신다고 생각하면 된다. 내가 그 장기판에서 다섯 달란트를 가진 왕이 되어 있든, 한 달란트를 가진 쫄병이 되어 있든 상관이 없다.
그분이 두시는 대로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분이 두시는 장기는 반드시 승리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이 전하듯이 가장 보잘 것 없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느낌을 갖기 위해 인간이 되셨고, 우리와 동고동락하는 편한 친구가 되어 주셨다. 우리가 만나는 친구들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자기 스스로도 불쌍하다고 연민의 정을 느낄 정도로, 가장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은 오늘 복음에서 처럼 남을 도왔던 사람의 모습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 도움을 드렸다는 사실 조차도 의식하지도 못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도와드렸던 것이다. 그 사람은 남을 돕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도왔던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비타산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대한다.
예수님은 이런 순수한 도움을 원하신다.
주고 바라지 않는 것, 보답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베푸는 것이다.
참으로 예수님이 인정하는 도움은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 것 그 자체를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행하고 그렇게 해서 보람 있고, 즐거운 그런 도움이다. 사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은 다른 누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다. 한 개의 달란트 밖에 없다고 세상을 원망하고 자신을 저주하고 비관하는 우리 자신이다. 결국 가난하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 벗은 삶을 살아서 그리스도와 닮은 사람이 된다는 건,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굶주리고 목마른 삶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너희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맞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부족한 나를 채우기 위해, 못난 나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것이 우리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도우는 것이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은 가진 것이 없고 입을 것,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렇다고 세상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며 부정적인 모습으로 사는 사람, 어쩌면 우리 자신들인 것이다.
그러니 그런 어둡고 부정적인 나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활동이 바로 우리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행동이다. 자신의 처지를 가난하게 여기고 아직 이루지 못한 평화의 나라, 하느님의 나라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면서,
진실과 정의와 사랑의 삶에 대한 열정에 불타는 삶을 살 때, 그렇게 사는 우리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본다고 말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강생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때,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왕국이 건설되고, 그분이 그 나라의 왕으로서 군림하게 되실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도 항상 왕이셨습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의 손에 맡기신 것을 아셨다고 합니다. 즉, 모든 권력이 당신의 손에 들어왔음을 아신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의 손에 맡겨 주신 것과 당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가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 (요한 13,3)
그렇다면 하느님 아버지의 모든 힘이 당신에게 온 것을 아시고 아들은 어떤 일을 하였을까요? 권력으로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정복하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 힘으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십니다.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요한 13,4-5)
예수님도 왕으로서 가장 강한 분이셨습니다. 겉으로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것처럼 약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런 고통을 당하실 수 있었음이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강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식적으로 왕이 되신 때는 바로 예수님의 세례 때였습니다. 그 분이 세례를 받고 물 밖으로 나왔을 때 하늘에서 성령님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 분 위에 내려오시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하며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됨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왕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보다 더 큰 왕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병과 배신과 죽음도 두렵지 않은 강한 힘을 지닌 왕이 되는 것입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로마 황제에게 끌려갑니다. 로마 황제는 교황이 남기고 간 교회의 재산을 로마에 바치라고 회유합니다. 라우렌시오는 그러겠다고 하며 교회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줍니다. 그리고는 그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의 재산이라고 하며 황제 앞에 데려갑니다. 황제는 너무 열이 받아 그를 산채로 석쇠에 구우라고 합니다. 지글지글 구워지던 라우렌시오는 사형집행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한 쪽은 다 구워졌으니 뒤집어 주시오!”
세상의 어떤 왕들도 자신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이긴다는 의미는 교만과 육체의 본능을 이기는 것입니다. 힘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을 절제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약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내 자신을 이길 수 있고 그래서 육체의 본능에 끌려 다니는 노예 생활에서 벗어 날 수 있고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참 자유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때가 있지요? 아직 완전히 내가 나의 왕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장 강한 왕은 나 자신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왕입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이번 주, 한 해 동안 정말 하느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고 힘 있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았는지 반성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 해를 맞을 준비를 합시다.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한 왕들은 누가 있습니까? 그리스에는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이 있습니다. 그는 인도까지 점령하고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죽을 때 자신의 손을 관 밖으로 내 놓아 사람들이 보게 해 달라며 이렇게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를 한 손에 쥐었던 알렉산더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뿐이오.”
모든 천하를 한 손에 쥐었지만 결국 허탈한 인생이었습니다.
로마에는 시저가 있습니다. 그는 위대한 정복자로서 세계가 두려워하는 인물이었으나 몇몇 집정관들의 배신에 의해 칼에 찔려 살해당하고 맙니다. 많은 왕들을 무릎 꿇렸으나 친구들에게 배신당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진시황제는 열세 살의 나이에 왕이 되고 23세 때 영토 확장작업에 착수했으며 39세 때 세상을 통일하고 상상도 못할 만큼 큰 아방궁이란 궁궐을 짓고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도 두려웠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서시라는 사람에게 소년 소녀 3천명과 많은 보물을 실은 배들을 거느리게 하여 동해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섬으로 가서 불로장생의 약초와 약을 구해오도록 하였습니다. 물론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런 노력들을 했는데 유생들이 그것을 비웃었다 하여 수많은 서적을 불태우고 유생 460명을 생매장 시킵니다. 이것이 분서갱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