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5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루카 21,5-11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5-11
그때에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휴거’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1992년 10월 28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구원받을 사람들은 ‘공중으로 들어 올려질 것’을 외쳤던 사건입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도 그런 예언이 여러 번 있었지만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종말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종말을 알리는 ‘재난의 시작’은 이미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말을 향해 매일 조금씩 걸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그리스도’를 만나기에 앞서 현재 ‘우리 곁에 계시는 그분’을 먼저 느끼고 만나야 합니다.
작은 축복이라도 그분께서 주시는 것으로 여길 때 만남이 가능해집니다. 감사의 시각으로 보면 ‘그날’의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불만을 갖고 살기에 가짜 그리스도를 보고 가짜 목소리에 현혹됩니다. 애정을 갖고 살면 ‘짝퉁 그리스도’보다 세상 곳곳에 계시는 ‘참그리스도’를 쉽게 뵈올 수 있습니다.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날, 더 큰 바다로 나아가는 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날, 태양이 솟아오를 무렵, 성녀 체칠리아는 이렇게 부르짖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스도의 병사들이여, 어두움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십시오!”
이승에서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보다 본격적인 삶에로 건너가기 위한 일종의 사다리라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체칠리아였기에 그리도 당당하게 떠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체칠리아는 이 지상에서의 삶이 천상에서 누릴 영원한 삶에 비교한다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리를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은 영원한 삶, 불멸의 삶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다보시는 종말의 징후들은 사실 이미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입니다. -거짓예언자들의 출현과 그들이 벌이는 사기극, 그로 인한 백성들의 혼란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민족, 나라들 간의 전쟁 -계속되는 지진과 해일 -에이즈, 조류독감 등의 확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예견하시는 주님의 날이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보다 날카롭게 촉각을 곤두세워 우리 시대의 징표들을 바라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에 대한 종말론적 해석, 그리스도교적 해석이 요구됩니다.
주님의 날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끔찍스런 공포의 날이 되겠지만, 그날은 잘 준비한 사람들에게는 불완전했던 사랑이 완성되는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상상으로만 그려왔던 그분의 얼굴을 직접 대면할 환희의 날, 희미하게 느껴왔던 그분의 사랑을 온 몸으로 체험하는 날, 그간 우리를 괴롭혀왔던 갖은 죄악과 병고,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날, 작은 물줄기를 버리고 더 큰 바다로 나아가는 날이 될 것입니다.
꽤 정통한 유다 역사학자로 정평이 난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운 돌’은 그 크기가 얼마나 컸던지(가로: 12m, 세로: 5m, 높이: 4m) 보는 사람들마다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성전 내부는 화려한 장식과 값진 예물로 온통 치장되어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유명했던 예물 가운데 하나가 헤로데 왕이 바친 것이었답니다. 황금으로 제작된 포도나무였는데, 그 크기가 실물보다 훨씬 더 컸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 장중하고 화려한 성전 앞에 서서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을 무렵, 예수님께서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던지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지당하고 지당한 말씀입니다.
지금도 우리 눈앞에 놓여있는 유형의 성전은 모두 유한한 성전입니다. 외형적인 성전들은 언젠가 모두 무너집니다.
규모가 아무리 웅장하더라도, 아무리 공사비가 많이 들었더라도, 아무리 기초가 탄탄하더라도 세월 앞에 어쩔 수 없습니다. 때가 되면 건물은 수명을 다할 것이고, 마침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진정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모시는 사람들의 모임, 그분의 가르침을 지지하고 실천하는 백성, 그분의 영성을 추구하는 영적인 사람들, 그분의 사상과 가치관에 따라 사랑과 나눔, 봉사와 친교를 생활화하는 사람들, 그들이 곧 진정한 성전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성전, 아무리 큰 성전이라도 예수님이 현존해 계시지 않는 성전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안에서 사랑과 나눔, 봉사와 친교가 생활화되지 않는다면 그 성전은 빈껍데기뿐인 성전, 이름만 성전에 불과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 건축도 중요하지만, 보다 진실한 성전, 보다 영적인 성전, 보다 영속적인 성전을 건설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지상의 삶,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의 삶은 언젠가 우리가 나아가게 될 영원한 삶에 비교한다면 “쨉‘도 안 될 것입니다. 이 지상의 삶은 영원한 삶에 비교한다면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안 될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가 누린 기쁨과 평화는 하느님 품안에서 누릴 영원한 복락에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 큰 희망, 더 큰 기대, 더 큰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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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34 주간 화요일 - 징후 (SYMPTOM)
제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은 장마 때만 되면 물난리를 치러야하는 시골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해에도 물난리가 나서 저는 포대기에 쌓여진 채 집 지붕을 뚫고 헬기로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비행기를 타 본 것입니다. 좋은 것도 있었는데 초등학교 때는 비만 오면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냇가가 있었는데 어린이들이 건너기에는 너무 위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학년 때는 개근상을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장마 때는 초긴장을 하셨습니다. 밤잠을 설치며 피난을 가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어른들끼리 연락을 주고받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 것보다도 냇가가 불어나서 그것이 제방을 무너뜨리면 큰일이었습니다. 동네에 비가 그쳤더라도 그 물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밤새 제방이 안전한지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자정이 넘었는데 제방이 무너지려고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누군가가 계속 그 제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었습니다. 제 기억엔 제방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만약 제방이 터졌다면 마을사람들 모두 큰일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어렸기 때문에 밤새 제방을 지켜보던 분이 누구신지 잘 모릅니다. 한 분이었는지 마을 분들이 돌아가면서 지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멋모르던 우리들은 편히 잠을 잘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큰 사고가 일시에 일어나는 일은 거의 드뭅니다. 제방이 한 번에 터지는 일은 없습니다. 조금씩 물이 새어나오다가 그것이 더 커지면서 제방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틈이 생겨 물이 새어나올 때 재빨리 대피하지 않으면 큰 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징후’라고 합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도 건물에서는 갈라지는 소리가 났고 직원들은 그런 소리들을 이미 여러 번 들었다고 합니다. 성수대교 사고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다리가 갑자기 내려앉을 리는 없습니다. 누군가 작은 문제점이 있을 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면 큰 사고는 면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해 미리 예언을 하십니다. 요즘 복음들이 자꾸 이런 종말론적 사건들을 이야기하는데 지금이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즉 종말로 향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성전의 아름다움을 두고 감탄하자 예수님께서는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허물어질 날이 온다고 예언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이 언제쯤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거짓 스승이 나타나 사람들을 속일 것이고 전쟁과 반란이 일어 날 것이고 큰 지진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하늘에서 무서운 일들과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일러주십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전쟁과 기근 등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전에 지진과 하늘의 표징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조금만 주위를 기울이면 바보들이라도 예루살렘이 언제 멸망할지 알 수 있을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이런 ‘징조들’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남아있던 많은 이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그런 징조들을 잘 지켜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한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큰 죄부터 짓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죄를 짓고 기쁨과 평화도 아주 작은 것들로부터 빼앗기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잘 보고 빨리 돌아서는 사람은 큰 어려움에 떨어지지 않겠지만 방관하면 깊은 구렁에 빠지고 맙니다. 죄를 알기 위해 죄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의사가 병을 알기 위해 병에 걸려보지 않아도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사가 병을 알기 위해 학문적인 지식과 간접 경험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듯이 우리도 교회의 가르침과 영혼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이들을 보면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혹은 주위에 자신을 지켜봐주는 그런 파수꾼이 있다면 더 없이 좋을 것입니다. 어쨌든 매일매일 내 자신을 살펴보고 반성하는 묵상이 없는 영혼은 ‘갑자기’ 큰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매일 주님의 빛 안에서 우리 자신들의 영혼의 상태를 잘 살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