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무관심과 영적 고집 * 마태오 11,16-19

2008. 12. 12. 오전 6: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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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 마태오 11,16-19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8,17-19
17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18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19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6-19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세상 다 산 얼굴로>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상황을 맞이하거나 아주 기분 나쁜 일을 겪었을 때, 혹은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기막힌 일을 당했을 때, 우리는 누구를 찾아 갑니까? 

   가장 만만한 친구, 있는 말, 없는 말 다 털어놓은 수 있는 편안한 친구를 찾아가지요. 그 황당함, 그 억울함을 꾸역꾸역 털어놓습니다. 내가 지금 얼마나 괴로운지, 내가 지금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내가 얼마나 힘겨운지를 털어놓습니다.

 

   그럴 때 친구로서 중요한 자세는 진지한 경청입니다. 깊은 공감입니다. 연민의 마음입니다. 함께 괴로워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친구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만 해도 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치유가 됩니다. 

   “저런, 그래 얼마나 힘들겠니?” 

   그러나 간혹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보고 어떡하라고?” 

   “알았어, 이제 그만해. 나도 그 정도는 다 겪었어.”

   이야기 듣기에 지쳐 딴전을 피우거나 하품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세주께서 오셨는데도 전혀 반응이 없는 유다인들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십니다. 그 고대하던 메시아께서 드디어 자신들의 목전에 나타나셨는데, 소 닭 보듯이 심드렁한 얼굴인 유다인들의 무감각함에 혀를 내두르십니다.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강의나 강론, 수업을 들어갈 때 가장 괴로운 일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학생들이나 청중들, 신자들의 냉랭한 얼굴입니다. 나름대로 재미있게 한번 해보려고 ‘생쑈’를 다하지만 분위기는 더욱 썰렁해집니다. 그럴 때 등에서는 식은땀이 마구 흐릅니다. 괜히 왔구나, 하는 마음에 빨리 이 시간이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적극성입니다. 능동성입니다. 협조적인 자세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미약한 우리들을 찾아주시는 데, 감사하면서, 행복해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그분의 방문에 능동적으로 응답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서, 매일의 작은 체험들을 통해서, 매일의 관계와 만남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보내시는데, 그저 그런 얼굴로, 아무런 표정 없는 냉담한 얼굴로, 세상 다 산 얼굴로 앉아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삶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영적 무관심과 영적 고집 

  파도바의 안토니오는 불타오르는 신앙의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마을 곳곳을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설교를 들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해변으로 나가 바다에 대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디선가 물고기들이 몰려와 그의 설교를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는 크게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가슴아파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두 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그 중에 하나는 이것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아이들이 아무리 즐거운 가락으로 피리를 불어도 아무도 어깨를 들썩이지 않고, 아무리 슬프게 울어도 가슴을 치기는커녕 무관심하기만 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적 무관심’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 세상 즐거움에는 귀가 번쩍 뜨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에는 영 무관심한 세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며 ‘진리를 증언하러 왔다.’라고 세상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만 던진 채 더 이상 들으려하지 않고 나가버립니다. 사실 진리가 무엇인지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서 어떤 아이가 실험을 하였습니다. 밥을 세 개의 그릇에 담아놓고 학교에 갈 때와 돌아올 때 하나에다는 좋은 말을 하나에다는 안 좋은 말을 다른 하나는 그냥 무관심하게 방치해 두었습니다. 좋은 말을 들은 밥은 발효하여 좋은 냄새를 풍겼고 나쁜 말을 들은 밥은 상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제일 검고 안 좋게 상한 것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무관심하게 방치해 둔 밥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에선 이것이 거꾸로 일어납니다. 즉, 무관심한 사람이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려고 하시지만 관심이 없는 이에게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성인들처럼 뜨겁거나 바오로처럼 아예 차갑다면 회개시키기나 하겠지만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혼자 부패해갑니다.  이 영적 무관심 다음으로 힘들어하시는 것이 바로 ‘영적 고집’입니다. 이미 자신이 다 판단해 놓고 자신의 생각에 맞는 것만 받아들이며 그 생각을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런 모습의 예언자와 메시아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은 듣지만 자신의 생각은 바꾸려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다윗과 같은 훌륭한 왕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그렇게 보이지 않자 예수님을 배신하고 맙니다. 이것이 영적 고집이고 이 영적 고집이 있는 사람에겐 생명의 말씀은 오히려 악영향을 끼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은 당신을 ‘스승’으로 삼고 매 순간 그 분이 사신 것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랬는데 처음엔 그 분의 말씀에 관심도 없었지만 나중엔 그분을 스승님으로 삼고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며 자신을 변화시켰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처음으로 목격하는 영광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그 때에도 “랍부니”, 즉 ‘스승님!’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많은 무관심과 고집 속에서 힘들어하시는 예수님께 작은 위로가 되는 그분의 ‘제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가톨릭성가 154번 / 주여 어서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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