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비 플레이>- 마태오 11,11-15

2008. 12. 11. 오전 6:22:48

글자
 

12월 11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 마태오 11,11-15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1,13-20
13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14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15 보라, 내가 너를 날카로운 타작기로, 날이 많은 새 타작기로 만들리니, 너는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바수고, 언덕들을 지푸라기처럼 만들리라. 16 네가 그것들을 까부르면 바람이 쓸어 가고, 폭풍이 그것들을 흩날려 버리리라. 그러나 너는 주님 안에서 기뻐 뛰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자랑스러워하리라.
17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탄다. 나 주님이 그들에게 응답하고, 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 18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19 나는 광야에 향백나무와 아카시아, 도금양나무와 소나무를 갖다 놓고, 사막에 방백나무와 사철가막살나무와 젓나무를 함께 심으리라. 20 이는 주님께서 그것을 손수 이루시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그것을 창조하셨음을 모든 이가 보아 알고, 살펴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1-15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13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14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오늘의 묵상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가 왜곡되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개인적인 소유물’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이런 엉터리 이론과 가르침이 있었나 봅니다.
사람들은 하늘 나라를 쉽게 오해합니다. 죄짓지 않고 공로가 많은 사람들만 가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는 이들만 모이는 곳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천국 가기에 당연한 삶’은 없습니다. 완벽한 삶이더라도 그것은 우리 판단이지 주님의 판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실천해야’ 그분의 허락을 받습니다. ‘사랑의 삶’이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사랑하면 삶이 달라집니다. 아름다워집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삶을 계속해야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율법 준수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러기에 회개와 천국을 이야기하던 요한을 제거하려 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콤비 플레이>


   올 한해를 시작하면서 결심한 다짐 중에 첫 번째 다짐이 수도자로서 가장 중요한 일, "집에 잘 붙어있자"였습니다. 집에 붙어있어 보니 너무나 좋더군요. 사실 수도자가 밖으로 다녀봐야 좋을 것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늦게 나마 깨닫게 된 것이 올 한해 제게 있어 제일 큰 수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는 한 사회복지시설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두 시간짜리 강의 때문에 오랜만에 집을 비웠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사람들이 너무도 행복한 표정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헌신하고 계시는 천국 같은 곳이었기에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강의 두 시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두 시간 동안 남 앞에 선다는 것, 그것도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 서서 뭔가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제는 꾀를 좀 냈습니다. 학기말 시험 끝낸 수사님 한 명을 살살 꼬셨지요. 물론 레크리에이션이나 성가반주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다재다능한 수사님이었습니다.  떠나기 전날 두 시간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 함께 의논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나름대로의 계획에 따라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결과는 참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강의일변도로 나갔으면 정말 지루했을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부상조해서 강의 시작 전 수사님의 성가연습, 그리고 제 간단한 강의, 휴식, 다시 모여 수사님과 함께 레크리에이션, 마무리 제 강의. 이렇게 진행하다보니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가더군요.

   작은 체험이었지만 팀으로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서로 머리 맞대고 계획을 짜고 아이디어를 나누는 일, 고통을 분담하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팀플레이로 대응하려는 노력, 공동으로 행하는 사목이 물론 더디고 때로 짜증도 나겠지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내가 이 일의 책임자니 내가 모든 것을 다 해야겠다", "나는 죽어도 이 모든 일의 주인공이다. 절대로 남에게 양보 못 한다", "내가 이 일의 책임자니 모든 영광도 내 몫이다"는 사고방식처럼 피곤한 사고방식도 없습니다.

   찰떡궁합이란 말이 있습니다. 함께 일을 하면서 서로 양보하고 서로 인내하는 가운데, 서로 한 마음이 되어 서로의 몫을 척척 잘 해내는 경우를 말하겠지요. 이렇게 될 때 진정 일할 맛이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을 것이다."

   여기서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진정 찰떡궁합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죄인을 구원하는 선교 사업에 더할 나위 없는 찰떡궁합이었습니다. 

   두 분은 각자가 해야 할 몫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는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잘 닦는 역할이 주어졌었는데, 그 역할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마무리 지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오실 길을 완벽하게 닦아놓자마자 정확하게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이 전면에 등장하자마자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한 세례자 요한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무대 뒤로 물러섭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더할 나위 없는 콤비 플레이였습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64번 / 이스라엘 들으라

 
 

          

세례자요한 

 

 

                  - ‘비인간’에서 ‘참인간’으로

 며칠 전에 수업을 듣는 도중 교수 신부님과 자그마한 의견충돌이 있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인간은 끊임없이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셨는데 그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항상 부족하여 절대적 존재를 끊임없이 찾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른이 되기를 원하고 어른들은 다시 젊을 때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있었으면 좋겠고 돈이 있는 사람들은 정치를 하고 싶어 합니다. 한 가지가 채워지면 순간적인 만족을 갖지만 또 다른 행복을 찾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교수님 말대로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완전’하신 분인데 어떻게 그분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이 ‘불완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완전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인간이 불완전하게 되고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바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 교수님 말대로라면 인간이 자신 안에 머물지 않고 만족하지 못하여 열려있는 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스스로 만족하시고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자신 안에 머무시지 않고 온 우주와 천사와 인간을 창조하셨을까요? 하느님은 스스로 만족하시는 분이라 외로워서 인간을 친구로 삼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불완전하셔서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하시기 때문에 당신 안에 머무시지 않고 새로운 창조를 하시고 새로운 관계를 맺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진정으로 열려있을 때는 불완전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완전할 때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두려움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가 더 두려워져서 자신 안에 갇혀 버립니다. 오히려 더 완전한 사람이 두려움 없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습니다. 따라서 저는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실 때 불완전하게 만드셨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하늘나라에 들어가도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들이 있음을 우리가 잘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산대로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모든 사람들보다 이 세상에서는 큰 인물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보다도 더 작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라며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을 만큼 세례자 요한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셨습니다. 이는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부터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큰 성인일지라도 이 세상에 육체를 지니고 살면서는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 사는 분들보다는 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인간 안에는 죄의 경향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도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가장 큰 성인들 중 하나로 크게 빛나실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에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 불완전하게 되어 항상 완전함을 찾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없애시고 당신과 인간을 결합시켜 다시 완전함의 지위를 돌려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일치하는 만큼 더 완전해지고 죄 이전의 ‘참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이 ‘인간적이다.’라고 할 때 ‘저렇게 죄를 짓고 실수하는구나!’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처음에 창조하신 ‘인간’은 완전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완전하게 창조되었고 죄로 인해 비인간적인 모습이 되었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로소 완전한 인간의 재 모습을 다시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죄를 짓기 전의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얻게 되는 지위는 ‘신-인간, 즉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더 완전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전 이렇게 좀 답답함이 해소되었는데 읽으시는 분들이 좀 어려워 더 답답해지지나 않으셨는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다 잘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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