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9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마태오 18,12-14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0,1-11
1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2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3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4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5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6 한 소리가 말한다. “외쳐라.”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7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9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
10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 11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하느님께서는 작은 이들도 잃어버리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마술사가 되는 비결>
한국청소년상담실에서 한 일간지에 제공하는 작은 글귀를 보고 눈이 다 번쩍 뜨였습니다.
어느 고등학교에 자기가 맡은 반을 시험이든, 체육대회든 늘 1등에 올려놓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도대체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매해 3월 새 학년이 시작하는 날, 그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교사 생활 이십 년에 너희처럼 우수한 아이들을 맡는 것은 처음이다. 어제는 너희들 만날 생각에 잠도 못 잤다. 우리 올 한해 잘 해보자."
마술사가 되는 첫 걸음, 모자 속에서 비둘기가 나온다고 자기부터 믿는 것입니다. 위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부끄럽더군요.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 아이들 안에 감추어져있는 보물 같은 가능성,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눈여겨보기보다는 부족한 측면, 덜떨어진 측면만을 바라보면서 때로 무시하고 지레 포기하는 경향이 많았음을 깊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길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간 받아온 상처가 너무도 크다는 것에 깜짝 놀랍니다. 철저한 무관심과 소외와 냉대 속에 살아온 아이들이어서 그런지 사회를 향한 적개심도 대단하지요. 아이들 마음 구석에서는 어른들을 향한 분노로 이글거립니다.
그래서 보다 청소년들에게 다가갈 때는 보다 세심한 관심, 민감함을 통한 접근이 필요하지요.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서 하고, 가능하면 따뜻한 위로나 격려의 말, 칭찬의 말로 다가서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소위 문제청소년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이들이 저지르는 문제행동은 "제발 나한테도 관심 가져줘"라는 강한 외침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삐딱하게 나가는 것은 "날 좀 더 사랑해주세요! 나한테도 눈길을 좀 주세요"라는 부르짖음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비행청소년들도 고분고분한 청소년, 제 갈 길을 잘 가는 범생이 청소년들 못지않게 소중한 청소년, 특히 예수님께서 다시금 이 땅에 오셨다면 가장 먼저 찾아 나설 한 마리 길 잃은 어린양이란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이 땅의 많은 착한 목자들이 건강하고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양들 백 마리 보다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어린 양, 병들고 말라서 돈 안 되는 어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대림 2 주간 화요일 - 따질 수 없는 사람의 가치 며칠 전에 저의 동기 신부가 소포를 보내왔기에 감사한다고 인사하기 위해 전화를 했습니다. 요즘 성탄 판공 때문에 좀 바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걱정을 털어놓았는데 요즘 판공자수가 작년에 비해 많이 줄었다고 하였습니다. 요즘 사제들이 판공성사 율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이유는 교구에 그 숫자를 보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컴퓨터 통계프로그램으로 한 해의 본당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숫자화 하여 지난해와 비교하고 그래서 반성과 함께 새로운 목표와 전략을 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숫자로 통계 내다보니 부작용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고 믿고 싶지만 어떤 신부님들은 숫자를 조금씩 올려서 보고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숫자로 사제의 사목이 평가받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유명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목자는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을 본받아 사목해야 하는 사제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백 명의 양들을 목적지까지 이끕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보니 한 마리가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사목은 99%의 성공으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성과를 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숫자에 만족하실까요? 예수님은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하나의 숫자로 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많은 무리 가운데 하나의 숫자로만 취급당한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이겠습니까? 인간은 부족하면 다른 것으로 채워 넣는 한 숫자에 불과하지만은 않습니다. 한 사람의 가치는 온 우주의 가치보다도 큽니다. 만약 어떤 사제가 사목을 열심히 해서 미사 참례 율을 많이 높였다고 합시다. 그러나 자신의 가정엔 소홀해져서 부모님이 냉담하신 채 돌아가셨다고 합시다. 그 사제가 과연 ‘그래도 잃은 숫자보단 얻은 숫자가 많으니 난 기쁘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을 얻은 것처럼 보여도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가 바로 이것인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단 한 사람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다고는 하지만 아주 짧은 시간만 세상에 사셨고 또 아주 자그만 지역에서만 활동하셨으며 친하게 지낸 사람들은 불과 몇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 협소한 인간관계를 보면서 과연 시공을 초월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께서 관계를 맺은 소수의 사람들과 시공을 초월하는 관계를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사랑하시기 위해 모두 똑같이 만나시고 똑같이 대해주신 것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이라도 당신의 온 에너지를 다하여 사랑하시고 관계 맺으셨습니다. 한 사람을 온전하게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온 인류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을 숫자로 보는 그런 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제가 볼 때 비가톨릭적입니다. 물론 실제사목에서 유리하게 쓰일 수는 있지만 사목자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위를 기울이기보다 숫자에만 집착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만드시지 않고 아담, 한 사람만 만드셨을까요? 한 인간과 온전한 관계를 맺기를 원해서가 아닐까요? 혹은 아담에게서 왜 많은 여자를 만들지 않고 하와 한 명만 더 만드셨을까요? 아담이 한 여인인 하와와 온전한 관계를 맺기를 원해서가 아니셨을까요? 사랑해야 하는 한 사람부터 온전히 사랑하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개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실 만큼 나 하나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랑’을 전부로 삼는 신앙을 지니고 있으면서 실제로는 구체적으로는 한 명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우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부터 더 사랑하려고 노력합시다.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을 사람들이 본다면 그것을 통하여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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