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인권주일)주님의 길을 내어라* 마르 1, 1~8

2008. 12. 7. 오전 7:43:22

글자

 

대림 제2주(인권주일) 지상에서 천상 것을 기다리는 시기 마르 1, 1~8

<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아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0,1-5.9-11
1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2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3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4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5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9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 10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 11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베드로 2서의 말씀입니다. 3,8-14
8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9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스러지며, 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11 이렇게 모든 것이 스러질 터인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12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8
1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
2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5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7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12월 7일 대림 제2주일 - 마르코 1.1-8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


<에프엠대로 사는 수도자>

 

   수도자라고 해서 다들 ‘에프엠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저 같이 적당, 적당히 사는 날 나리 같은 수도자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말 수도자다운 형제들을 봅니다. 본업은 당연히 복음 선포요, 사목활동입니다. 취미는 기도생활입니다. 특기는 공부입니다. 관심사는 오로지 형제들의 영적생활의 향상이나 수도회의 쇄신 등과 같은 것입니다. 일상적인 대화 역시 어떻게 하면 ‘하느님 마음에 들게 잘 살까?’입니다. 

   지나치다 싶은 정도로 정도(正道)만을 고집하기에 재미가 없습니다. 여유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살아나기 위해, 수도회가 쇄신되기 위해서는 이런 분들이 좀 더 많아져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랬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한 마디로 표현해서 ‘팍팍하기 그지없는’ 삶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참으로 재미없는 삶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양한 눈요기 거리, 호기심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볼거리들로 가득 찬 도시를 멀리하고 황량한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풀 한포기 없는 광야,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과 땅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쓸쓸하고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주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습니다. 메뚜기 드셔보셨습니까? 정말 먹을 것이 없는 곤충입니다. 날개 떼어내고, 머리 떼어내고, 다리 떼어내면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습니다. 맛도 그저 그렇습니다. 그래서 메뚜기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식물의 범주로 분류했습니다. 그만큼 영양가가 없는 음식, 풀과도 같은 거친 음식으로 여겨졌습니다. 

   들꿀 역시, 요즘 말하는 값비싼 석청이 아니라 당시 가장 소박하고도 초라한 음식이었습니다. 메뚜기와 들꿀로 연명했다는 말은 우리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 말과 동일했습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은 메뚜기와 들꿀이란 단어들인데, 이 단어들은 단순한 금육이나 검소한 식생활을 뛰어넘어 하느님을 향한 순수하고 지고한 열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오시는 예수님께로 주파수를 맞췄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을 한평생 추구했습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세례갱신운동은 군중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큰 스승으로 여긴 걸로 역사가 요세푸스는 전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인기는 당시 절정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로부터 크게 추앙받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지만,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시자 즉시 이렇게 증언하며 크게 물러섭니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신발 끈을 묶고 푸는 일은 당시 노예들이 일상적으로 하던 일이었습니다. 당시 노예들은 주인 가족들을 위해서 하루 수십 번도 더 신발 끈을 묶고 풀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신발 끈 조차 풀어드릴 자격이 없다고 하니 자신을 노예보다 더 낮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구자로서 가장 적격이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단지 그리스도에 앞서서 파견된 존재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장 큰 예언자로 불리는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 어떤 환상에도 빠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조금이라도 덕이 덜 닦인 사람이었더라면, 선구자로서의 삶의 준비가 부족했더라면 백성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올라갈 때 까지 올라갔던 자신에 대한 높은 지지율을 바라보며 착각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파견된 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야욕이 스며드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파견하신 이유를 상기하면서 겸손의 덕을 청합니다. 

   이토록 겸손했던 세례자 요한의 삶, 그 배경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세례자 요한은 오랜 기간 광야에서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의 강도 높은 피정과 자기 쇄신 작업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잘 다스렸습니다. 고독과 침묵 속의 광야 생활에 충실했기에 세례자 요한은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음성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때 잘 나가던 세례자 요한을 사람들이 그냥 두었을 것 같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저녁 한번 사겠다, 차 한대 빼드리겠다’고 괴롭혔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부인들은 메뚜기와 들 꿀로 연명하는 세례자 요한을 보며 ‘저런 저런’ 하면서 음식보따리를 싸들고 따라다녔겠지요. 

   그럴수록 세례자 요한은 더욱 더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더욱 더 깊은 고독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더욱 더 청빈한 삶, 더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지속적인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 평생 예수님의 선구자로서의 삶, 구도자로서의 삶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여 가면 갈수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인공인 연극에 조연으로서의 겸손함 ’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대림 제2주(인권주일) 지상에서 천상 것을 기다리는 시기 마르 1, 1~8
 
대림 제2주일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요구합니다.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을 정도로 큰 분이 오실 터인데 그분을 맞기 위한 준비로 회개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요. 우리는 '회개'라는 말에 익숙합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도 대충은 알고 있지요. 그런데 정말 회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절친한 친구 사이인 청년 둘이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늘 함께 붙어 다니며 못된 짓만 하고 다녔습니다. 노름을 하고 술집도 드나들며 둘이 서로 꿍짝이 맞아서 건달 생활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에도 역시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여자들이 기다리던 술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둘은 장난을 치며 길을 가다가 마침 한 교회를 스쳐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교회 강론 게시판에 '죄 값은 죽음 뿐'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그 게시판에 눈길이 멈췄습니다.
 "아니, 죄 값이 죽음이라니? 무슨 저런 제목이 다 있어?"
 두 사람은 찜찜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자연히 가던 발걸음이 망설여질 수밖에요.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야, 빨리 가자. 저런 것도 있나보지."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달랐습니다. 마음이 아주 찜찜한 것이 영 내키지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나는 오늘 안 가는 게 좋겠어."
 두 친구는 거기에서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한 친구는 "별 신경을 다 쓰네"하며 다른 친구를 비웃고 술집으로 갔고 또 한 친구는 돌아서서 자기의 눈길을 사로잡은 그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맨 뒤 의자에 앉아서 강론을 듣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봤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온갖 못된 짓을 하며 허송세월을 한 것이 너무나 뼈아프게 가슴에 와 닿아서 그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앉아있던 그는 뭔가 새로운 결심을 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후 그는 열심히 공부하고 또 많은 것을 연구해서 뒷날 미국 대통령이 됐습니다. 대통령이 된 후에 그의 유년 시절부터 청년, 장년 시절 이야기가 기사화돼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 때 미국의 한 교도소에서 한 늙은 죄수가 눈물을 흘리며 그 기사를 읽고 있었습니다. 동료 죄수들이 그를 보고 "왜 신문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냐"고 묻자 그 죄수가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30년 전 내 친구인데 대통령이 되었고 나는 이 교도소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종신형을 살고 있으니 어찌 참담하지 않겠소!"
 이 일화 속 대통령이 바로 미국 22대와 24대 대통령인 클리블랜드 대통령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그 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술집으로 가려던 발길을 돌려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삶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우리는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길을 계속 가면 파멸과 죽음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습관처럼 욕망에 이끌려서 그 길을 계속 갑니다. 죄의 끝은 죽음뿐입니다.
 때로 우리는 끝없는 음주와 도박이 나를 망가뜨리고 가정을 파괴하고 이웃을 괴롭힌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멈추지 못합니다. 또 남을 속이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면서 그 결과가 어떨지 두려우면서도 그 길을 계속 갑니다. 또 남을 비난하고 험담하는 나쁜 습관이 있음을 잘 알면서도 쉽게 고칠 줄을 모르지요.
 
 회개란 이러한 삶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새로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음주와 도박을 끊고, 이기적 욕망을 채우려는 삶에서 이웃을 배려하는 삶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남을 속이고 비난하며 험담했던 잘못된 습관에서 칭찬하고 격려하며 감사할 줄 아는 태도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실천되는 곳에서는 인간적인 정이 우러나고 주님 현존이 드러나게 됩니다.
 지상에서 천상의 것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입니다. 회개의 삶을 실천해 오시는 그분을 성실히 맞이하는 지혜로운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오금동본당 주임)
 

[복음생각]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주님의 길을 내어라

인간의 탐욕

세계 경제가 총체적 위기에 빠져들고 연일 계속되는 불황의 늪에서 실업자들이 늘어나고 고통의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신문과 모든 뉴스의 첫머리는 경제 불황 소식이 자리를 차지하여 겨울 싸늘함과 함께 을씨년스러움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운운하며 들뜬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분명 커다란 사치이자, 현실을 너무도 모르는 처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어두운 세상에 우리는 또다시 희망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1929~1968) 목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국가는 병들었습니다. 나라에 불안이 생기고, 혼란이 여기저기에… 하지만, 주위가 어두워야만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공회대학교의 석좌교수이신 '신영복' 선생은 또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는 사실보다 더 따뜻한 위로는 없습니다. 이것은 밤하늘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어둔 밤을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옷이 얇으면 겨울을 정직하게 만나게 되듯이 그러한 정직함이 일으켜 세우는 우리들의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세계 경제의 위기를 맞으며 우리는 또다시 원론적인 이야기와 그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에덴 동산의 원조 아담과 하와는 분명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다 받아 누렸습니다.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창세 1, 29)

그런데도 금지된 마지막 과일나무까지 먹어치우려 합니다. 모든 것을 채워도 마지막까지 먹어치우려 하였던 탐욕의 게걸스러움이 원죄이며, 그 원죄를 우리는 오늘의 세계까지 끌고 왔습니다. 어쩌면 오늘의 슬픈 비극은 그로부터 비롯된 것일지 모릅니다.

모든 지하자원을 마지막까지 퍼내려는 욕망, 마지막 물고기까지 싹쓸이로 잡아버리는 탐욕, 마지막 남은 나무까지 베어버리는 잔인한 이기심이 오늘의 재앙을 키운 것인지 모릅니다. 이 같은 일을 예견하였는지 이미 수세기 전, 포획과 남획을 일삼는 백인들의 야수 같은 문명에 대해 크리족 인디언 추장은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마지막 나무가 베어져 나가고, 마지막 강이 더럽혀지고,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그대들은 깨달으리라. 돈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이 같은 탐욕과 욕망의 세상에서는 영광의 주님을 맞이할 수 없기에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이사 40, 3~5)

이사야 예언자의 이 말씀을 인용하여 마르코 복음사가는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길을 닦았던 세례자 요한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인류의 긴 역사를 거치며 우리는 고난 가운데도 끊임없이 구세주 오실 길을 닦았던 슬기롭고 정의로웠던 선각자, 예언자, 착한 목동들, 그들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었던 '킹' 목사는 1963년 8월 23일 노예해방 100주년을 기념하여 워싱턴에서 열린 평화 대행진에서 그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합니다.

"이제 절망의 계곡에서 헤매지 맙시다. 저는 오늘 저의 벗인 여러분께 이 순간의 고난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여전히 꿈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지금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모든 계곡이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이 낮아지고, 울퉁불퉁한 땅이 평지로 변하고, 꼬부라진 길이 곧은 길로 바뀌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생물이 그 광경을 함께 지켜보리라는 꿈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예언자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들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들은 것을 '행하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어두운 현실에 분명히 들었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막이 되어버린 세상에 희망의 나무와 숲을 가꾸어야 합니다. 모든 미움과 탐욕의 골짜기를 용서와 나눔으로 메꾸어야 합니다. 거칠어진 마음, 분쟁의 상처를 평화의 평지가 되도록 닦아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 그분께서 오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려는 애씀이 있을 때,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배광하 신부〈춘천교구 겟세마니 피정의 집 원장〉
 
 
                                         스승이며 신랑이신 예수님!

   배우 옥소리씨는 남편 박철씨의 간통죄 고소로 징역 1년 6개월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결혼을 하고도 외국인 요리사, 연하의 오페라 가수 등 두 명의 남성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 그 원인입니다.  옥소리씨도 남편 박철씨를 강하게 몰아붙였습니다.   “(남편인) 박철은 억대 수익을 벌어도 신혼 초부터 지금까지 룸살롱·술집·안마시술소에 다니면서 다 썼다. 여러 여자들과 함께 문란한 성생활을 했다. 나와는 11년간 성관계가 10번에 그쳤다. (내가) 박철보다 죄질이 무겁고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만큼 잘못한 것이라면 죗값을 달게 받겠다.”    그리고 간통죄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했습니다. 국가가 개인의 도덕적인 사생활까지 법으로 규정하는 나라는 몇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간통죄가 헌법에 상응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람피우면 형법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박철씨가 더 잘못했다고도 하고 그래도 바람피우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을 하여 이렇게 사이가 안 좋아지지만 어떤 부부들은 살면서 사랑이 더 성숙하기도합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나올까요?    두 남녀가 결혼을 한다고 해서 사랑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결혼하는 순간이 완전한 사랑으로 향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고 그 완전한 사랑으로 가기 위해서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하고 서로 신의를 지킬 것을 서약합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괜히 상대가 미워질 때도 있고 실망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이런 순간에도 두 부부가 함께 한 서약을 기억하며 참아주고 이해해주고 감싸주려고 한다면 사랑이 더 성숙하는 것이고 그 때 함께 한 약속을 저버리면 둘의 혼인은 위기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그의 길을 닦기 위해 먼저 왔던 세례자 요한이 나옵니다. 그는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늘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회개’라는 말을 듣지만 사실 왜 회개를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회개란 본래 ‘방향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혼인한 사람의 경우라면 서로 함께 한 서약에 어긋나게 나가고 있다면 다시 방향을 바꾸어 그 서약한 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함께 했던 서약의 내용과 먼 곳으로 가려고 한다면 둘의 일치는 영영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신랑이라고 하면 왠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자신들의 신랑은 요한인 것처럼 요한을 좀처럼 떠나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까지도 모두 예수님께 보내고 자신은 세상을 뜨려합니다. 요한은 일부러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께서 교회의 참 신랑임을 깨닫게 합니다.   어느 날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먹고 마시는 것에만 열중하는 것처럼 보이자 예수님께 이렇게 따집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우리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주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혼인방의 아들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4-15)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당신과 혼인하여 신방에 함께 있는 신부로 표현하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참 신랑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한 번은 감옥에 갇혀있는 요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제자들은 요한을 찾아가 ‘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계시던 분이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증언하신 바로 그분인데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 몰려가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요한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 앞에 사명을 띠고 온 사람이라고 말하였는데 너희는 그것을 직접들은 증인들이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26-30)      요한은 끝까지 유일한 신랑은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께로 모든 이들을 보내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끝까지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혼인한다고 해서 일부다처제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분이 모든 신자들에게 똑같은 성체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처럼 각 개인은 같은 성령 안에서 하나의 신랑을 위한 한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가장 핵심적인 시간은 당연히 성체를 영할 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신부이냐에 따라 그 일치의 정도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첫 성체성사를 제정하실 때 가리옷 유다도 예수님의 성체를 영했습니다. 그러나 곧 예수님을 배반하고 신랑을 돈과 맞바꾸었습니다. 이는 겉으로만 한 집에 산다고 해서 부부가 아니라 서로간의 신의를 잘 지킬 때에만, 그래서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어야 그 분과 온전히 한 몸을 이루고 하느님의 자녀가 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부의 서약과 같이 그리스도와 온전히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서약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동산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 주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피로 그녀를 순결한 신부가 되게 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그녀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성경은 이곳을 ‘동산’이라고 표현합니다. 죄로 인해 잃게 되었던 에덴동산에 다시 아담과 순결해진 하와가 만나는 장면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순결한 창녀로서 신약에서의 또 다른 교회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야!”하며 그녀를 부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고 하셨는데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안다는 뜻입니다. 안다는 뜻은 사랑한다는 뜻인데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써 온전히 우리를 아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참 신랑으로서 우리 앞에 우리의 각자 이름을 부르시며 서 계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라뿌니!”, 즉 ‘스승님!’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한 신부로 보지만 그 신부는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언제까지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삼고 닮아가야 하는 불완전한 사람들의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라 하십니다.   따라서 순결한 신부가 되기 위해 매 순간 돌아가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모범’이고 그분의 모범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회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순결한 신부가 되지 않으면, 즉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삼고 그분의 모범대로 살지 않으면 가리옷 유다처럼 아무리 성체를 영해도, 성경을 묵상해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먼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회개를 해야 한다고 외치고 다닌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해 오시는 우리의 신랑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매 순간 그분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반성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가톨릭성가 90번 / 구세주 보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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