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3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 마태오 17,10-13

2008. 12. 13. 오전 6: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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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3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 마태오 17,10-13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48,1-4.9-11
그 무렵 1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2 엘리야는 그들에게 굶주림을 불러들였고,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다.
3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 보냈다. 4 엘리야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9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10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0-13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3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못 말려 수녀님>


    덤프트럭 운전기사였던 남편의 부주의로 풍비박산이 난 한 가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가난을 딛고 일어서겠다는 지나친 욕심이 불행의 발단이었습니다. 하루를 쉬었어야 했는데...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부친상을 당한 동료기사를 대신해서 심야운전을 감행한 것입니다. 피로의 누적은 졸음운전과 중앙선 침범으로 이어졌고, 9시 뉴스에서 자주 듣는 표현인 "마주 오는 승용차와의 정면충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모든 책임을 지고 "담장 안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고의 충격으로 인해 평소에도 병약했던 아내는 몸져눕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2명의 아이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딱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그 동네에는 딱한 사람 보면 밤잠을 못 이루는 "해결사 수녀님"께서 한 분 사목하고 계셨습니다. 수녀님은 즉시 3단계에 걸친 조치를 신속하게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하셨습니다. 지금 생각만 해도 참으로 집요하고 끔찍한 수녀님이셨습니다. 

   제 1단계로 수녀님은 근처 종합병원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사람 사무실로 돌격해 들어가셔서, 그 자리에서 "오늘 즉시 입원"이라는 담판을 지으셨습니다. 

   제 2단계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당장 아이들 받아들일 자리가 없다고, 보육사들 의견도 좀 들어봐야 한다."고 사정을 설명해도 막무가내셨습니다. 기어이 아이들을 제게 떨 구어 놓고 휑하니 달아나 버리셨습니다.

   일단 큰불을 끄고 한숨을 돌리신 수녀님은 제 3단계로 사람들을 이끌고 남편이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로 향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의와 낙담으로 거의 폐인이 되어가고 있는 남편에게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솔직히 수녀님의 지나친 밀어붙이기 식의 언행에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수녀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처럼 안타까워하며,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려고 하시던 그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습니다. 진정 수녀님은 사고로 인해 암흑의 한 가운데 놓여있던 그 가정에 "한줄기 빛"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루치아란 이름은 "빛"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루치아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박해시대 모든 이교인들을 환히 비추던 "빛"으로 살아갔습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루치아는 일찍이 하느님께 동정서원을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부모로부터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아버지의 명으로 이교도인 로마 군대 사령관과 강제로 약혼을 하였으나 루치아 스스로 약혼을 파기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주님을 위한 십자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약혼자는 루치아를 로마 당국에 고발합니다. 총독은 루치아가 발한 동정 서원을 파기시키기 위해 갖은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루치아는 참수형으로 최후를 맞이합니다. 

   자신의 결혼을 위해 준비했던 재산 전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던 루치아, 이교도들의 갖은 협박과 잔인무도한 행동 앞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고 꿋꿋이 기도로써 극복해나간 루치아, 언제나 어떤 상황 앞에서도 기쁘게 예수님만을 위해 살며, 열렬히 예수님만을 증거 했던 루치아는 진정 자신의 이름처럼 세상의 빛이었습니다.

 "의인의 삶은 외롭고 고뇌가 따르겠지만 언젠가 샛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영적 소경 

 

 

 우스갯소리로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20대 초반 여성은 잘 노는 남자를 좋아하고, 20대 중반 여성은 나쁜 남자를 좋아하고, 20대 후반 여성은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 반면에 20대 초반 남성은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20대 중반 남성도 역시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20대 후반이 되어도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정말 남성들은 시각에 민감한 것 같습니다. 제가 버스에서 어떤 한국 자매에게 천주교에 대해 설명해주자 저와 함께 탔던 후배 신부가 “형은 대단하다. 난 저렇게 생긴 여자라면 말 안 걸 텐데.”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저렇게 태어난 게 저 사람 잘못이냐? 껍데기를 보지 말고 영혼을 좀 봐라.”라도 대답했지만, 사실 우리들은 더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긴 합니다. 문제는 그런 육체적인 눈이 정작 보아야 하는 것들을 못 보게 만드는데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오시기로 되어있던 엘리야였음을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예언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메시아가 오기 전에 그의 길을 닦기 위해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엘리야가 오기로 되어있었는데 세례자 요한이 왔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왔다면 누구나 다 알아보았겠지만 세례자 요한을 누가 엘리야로 알아볼 수 있었겠습니까?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혹시 우리가 그 당시에 살았더라도 세례자 요한을 오시기로 되어있던 엘리야로 알아보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적인 눈으로 본다면 두 분은 결국 같은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예언자들과 갈멜 산에서 대결을 합니다. 각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고 그 위에 송아지를 잡아 제물로 놓고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제물을 사르면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사백오십 명이나 되었고 야훼를 섬기는 예언자는 엘리야 하나뿐이었습니다. 먼저 바알을 섬기는 예언자들이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해하면서까지 소리소리 질러보지만 하늘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이윽고 엘리야의 차례가 되자 그는 제물에다 물을 부으라고 합니다. 네 동이씩 세 번을 붓게 만듭니다. 그 물이 제단 주위 도랑까지 가득 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모두 태웠고 도랑에 괴어있던 물도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태웠습니다. 제물은 바로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제단과 나무는 십자가를 상징하며 물은 세례를 상징하고 불은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세상에 성령님이 오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희생을 ‘내가 받을 세례가 따로 있다’ 하시며 바로 ‘세례’로 표현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골고타에서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그대로 일어납니다. 세례는 옛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성령님이 내려오실 제단이 없었는데 유일하게 (물론 성모님을 제외하고) 예수님께서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그분 위로 (불 대신)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사실 갈멜산에서 벌어진 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현대에 이런 일이 파티마에서 일어났습니다.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태양이 땅으로 떨어지듯 내려오더니 모든 것을 말라버리게 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간엔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 대신 이번엔 성모님이 계셨습니다. 오순절 때 성모님과 사도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성령님이 내려오셨던 것의 재현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언가 조금 더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의 얼굴을 뵐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적인 눈을 갖기 위해선 마음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다시 되새기며 우리는 영적인 눈과 육적인 눈 중에 어떤 눈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 몇이 이 말씀을 듣고 ‘그러면 우리들도 눈이 멀었단 말이오?’ 하고 대들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요한 9,40-41)

           

                       - 신들린 사람 -

내가 엘리야처럼 모든 것을 바로잡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심약한 사람.
미숙한 사람.
이러한 사람이 나인데.

그러나 심약한 것으로 보면 엘리야도 마찬가지.
왕과 백성들에게 환난을 내린 그가 환난이 두려워 도망치고
거짓 예언자들을 쳐 죽인 그가 이제벨이 두려워 도망치고
하느님만을 두려워해야 할 하느님의 예언자가 이렇게
환난을 두려워하고 인간을 두려워하다니 말이나 됩니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것들을 두려워하였기에
그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불같이 일어난 것입니다.
실상 인간적으로 강한 사람은 하느님을 여간해서 체험치 못합니다.
애초에 하느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약한 사람은
자기가 직면한 어려움과 환난 앞에서 신을 찾습니다.
잡신을 만나느냐 참 하느님을 만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약한 사람이 신을 찾고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이 들리면 이제는 신들린 사람으로 다른 사람이 됩니다.
제 가까이에 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이 들리면 작두 위에 올라타 춤을 춰도 다치지 않고 신탁도 내립니다.
그러다 들렸던 신이 나가면 그도 평범한 사람처럼
세상 걱정하고 아파하고, 지지고 볶고 합니다.

모든 예언자들이 그러했지만 그중에서도 엘리야는
신이 들렸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가 극명하게 갈립니다.
심약한 그가 하느님을 입으면 거짓을 가리고
하느님의 진노를 불같이 내려 모든 것을 바로 잡습니다.
그는 세상의 한 복판에서 사람들과 대결하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치는 사람입니다.
우리처럼 세상 한 복판에서 지지고 볶고 싸우다가
어느 순간 불마차로 하늘에 들어올려지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톨릭성가 156번 / 한 말씀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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