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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1-5.8ㄷ-12.14ㄱ.16
1 다윗 임금이 자기 궁에 자리 잡고, 주님께서 그를 사방의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셨을 때이다. 2 임금이 나탄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
3 나탄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가셔서 무엇이든 마음 내키시는 대로 하십시오.”
4 그런데 그날 밤,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8 나는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9 또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10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곳을 정하고, 그곳에 그들을 심어 그들이 제자리에서 살게 하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다시는 전처럼, 불의한 자들이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11 곧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판관을 임명하던 때부터 해 온 것처럼, 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겠다.
더 나아가 주님이 너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고 선언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6,25-27
형제 여러분, 25 하느님은 내가 전하는 복음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로, 또 오랜 세월 감추어 두셨던 신비의 계시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26 이제는 모습을 드러낸 이 신비가 모든 민족들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도록, 영원하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예언자들의 글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7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천사는 이렇게 답합니다. 모든 일의 원인은 주님이심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자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종’임을 고백하며 받아들일 것을 약속합니다. 무명의 시골 처녀에서 성모 마리아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누구라도 사건 속에 담긴 ‘주님의 뜻’을 모두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사건에서는 짐작을 합니다. 아픔이 길잡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마리아의 반응은 이 한마디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살다 보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사건을 만납니다.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어찌 내 자식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그때 우리도 마리아 님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프고 또 아픈 이 고백을 시도해 보라는 것이 대림 시기 네 번째 주일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늦었지만 성전을 잘 지어드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이런 다윗에게 주님께서는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고 하시며 당신이 지금까지 다윗과 그의 집을 위해서 한 일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리고 후손 중의 하나가 그의 가문을 일으켜 세우고 튼튼히 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솔로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그 후손으로 주시겠다는 뜻이지요.
이는 지금까지 이렇게 잘 해 주었고 앞으로도 이렇게 잘 해 줄 계획인데 네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 비록 으스대는 것이 아닐지라도 가소롭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을 위해 아무 것도 해드리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되겠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지요. 무언가를 해야겠지요.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 번째로 해야 할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해주신 것을 알아드리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하신 그 모든 것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고 자식이 그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시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당신이 해 주신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며 감사드리는 것, 이것으로 충분하다 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애써 제일 좋은 것 주셨는데 애인이 준 것은 좋다 하면서 부모님께는 무엇 하러 이런 것 주냐 하는 것보다 더 큰 불효가 없는 것처럼 하느님께도 그렇게 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두 번째로 해야 할 것은 가슴에 성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화려하고 큰 건물을 지어 드릴 필요는 없다하십니다.
대신 성 프란치스코 얘기하듯 가슴에 성전, 마음의 구유를 지어달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을 밖이 아니라 내 안에 모시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더 원하신답니다.
손님이 올 때 근처 삐까번쩍이는 여관에 모시는 것보다 내 집에 모시는 것이 더 정중하고 사랑에 찬 대접이고 내 아랫목을 내어드리는 것이 더 사랑이듯이 화려한 건물을 지어드리는 것보다 나의 중심에 모시는 것이 더 사랑입니다.
세 번째로 해야 할 것 역시 건물을 지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가문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한다면 집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다시 부모님 비유를 들자면 부모님이 원하는 것은 당신 집을 잘 지어드리는 것보다 내가 성공해서 부모님께 영광을 드리고 나만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도 잘 되게 하는 것이듯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성당을 화려하고 거창하게 지어드리는 것보다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를 사랑으로 건설하는 것입니다.
내 가슴에 성전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공동체가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이는 공동체가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부모가 내 집에 오시는데 내가 싫어서 형제들이 아무도 모이지 않는다면 내가 아무리 부모님을 사랑하고 잘 모셔도 큰 효도가 되지 못합니다.
부모가 바라는 것은 형제들이 모두 잘 되고 서로 사랑하고 그래서 자녀는 물론 손자들까지 모두 당신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성소를 받고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가서, 나의 집을 고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허물어져 가는 성당을 고치라는 줄 알고 성당 셋을 수리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성당이 아니라 뿔뿔이 흩어진 주님의 백성을 주님을 중심으로 다시 모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공동체가 주님을 중심으로 모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구유가 되도록 주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합시다.
대림 제 4 주일 - 어머니의 생명력인 낮아짐
1885년 어느 날 밤 다미안 신부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일에 지쳐 피곤해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목욕을 하면 좀 피곤이 풀리려나싶어 목욕물을 끓였습니다. 잠깐 실수로 뜨거운 물이 발등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뜨거움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발이 데였는데도 뜨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확실한 ‘나병’의 증상이었습니다. 그는 소리 지르며 기뻐합니다. 그는 그 곳에 파견한 주교님께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드디어 하느님의 은총이 제게 내렸습니다.” 왜 다미안 신부가 나병에 걸리고 그렇게 기뻐했던 것일까요? 당시 하와이 군도의 몰로카이 섬은 온통 암벽으로 되어있고 물살이 세어서 나병환자들을 격리해 놓는 생지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1873년 다미안 신부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였습니다. “당신과 같은 성한 사람에게나 평화와 자유가 있지, 우리 같은 문둥이들한테 무슨 평화와 자유가 있겠소.” 그래도 그는 그 곳에 뼈를 묻을 결심으로 집을 지어주고 고름을 손수 짜 주며 그들의 떨어져나간 지체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저에게도 저들과 같은 나병을 허락해주십시오.’ 그는 생지옥을 평화의 섬으로 바꾸었고 나환자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치료를 거부하고 그들 곁에서 죽었으며 그의 죽음은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랑을 온 세계에 전염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다미안 신부의 죽음으로 수많은 이들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과연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밀알은 반드시 썩고 죽어야하는 것입니다.
예언자 엘리사가 예리고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였습니다. “스승께서도 보시다시피 저희 성읍은 매우 아름다우나 물이 나빠서 이 땅에서는 자식을 낳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샘터에 가서 그 소금을 뿌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이 물을 정하게 하리라. 이제 다시는 사람들이 이 물 때문에 죽거나 유산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교회는 어머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하느님의 자녀를 출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출산이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시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이 어려운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모님의 이 ‘예! (Fiat!: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는 ‘세상 모든 죄를 대신하여 고통을 당할 내 아들의 고통을 함께 받겠느냐?’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그러겠다는 수락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기 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받아야 할 고통을 몰래 감추어놓고 그것을 허락하겠느냐고 물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모님은 아무것도 죄에 의해 가려져있지 않았기 때문에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고통과 메시아와 한 몸이 되어 받아야 하는 어머니의 고통을 너무도 명확하게 잘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시메온에게 “예리한 칼이 당신의 영혼을 관통할 것입니다.”라는 예언을 듣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예!’는 바로 자신을 죽이는 순종이었습니다. 자신을 죽임으로써 당신 태중에 생명을 잉태하신 것입니다. 엘리사는 아이가 태어나지 못하게 하는 물에다 소금을 뿌립니다. 그 소금이 물에 녹으니 그 물은 다시 생명을 주는 물로 바뀌어 자녀들을 출산하게 합니다. 물론 그 우물, 혹은 그 물이 스며든 땅은 교회, 혹은 성모님을 상징합니다.
성모님은 처녀이시기 때문에 아기를 출산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명을 잉태하게 된 걸까요? 소금은 예수님의 ‘Fiat!’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세상에 녹이심으로써 교회가 더 이상 돌계집이 아니라 어머니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생명을 물에 녹이심으로써 죽음의 물이 생명의 물이 되었고 우리는 성모님 안에서 그 생명의 물을 통해 새로 태어나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받아들이는 ‘Fiat!’이 없었다면 이 일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혼인할 때 한 사람만의 ‘예!’로는 혼인이 성사되지 않듯이 예수님과 성모님 두 분의 ‘Fiat!’이 결합되면서 교회에서 수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출산되게 된 것입니다. 이 두 분의 ‘Fiat!’은 새 아담과 하와의 혼인서약입니다.
‘순종’은 ‘겸손’입니다. 다담과 하와가 ‘교만’하여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지만 예수님과 성모님의 ‘겸손한 순종’으로 첫 아담과 하와의 ‘교만과 불순종’을 기워 갚으신 것입니다. 영어의 ‘겸손(humble)’은 본래 라틴어 ‘Humus’, 즉 ‘땅’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본래 겸손하게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된다는 말에 ‘하늘’이 되기를 원했고 그래서 결국 반대로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고 ‘땅’도 동시에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본래 하늘에서 왔지만 땅처럼 낮아졌기 때문에 두 분의 육체까지도 모두 하늘로 승천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낮아짐엔 생명이 깃들어있고 높아짐엔 죽음이 서려있습니다. 땅은 어머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땅으로부터 생명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겸손으로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수 자신을 낮추는 모습 안엔 생명이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특별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가 그 정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자기 비움, 혹은 낮아짐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안 됩니다.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비움이 무엇을 주는지 설명해 주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당신의 낮아짐으로 베드로를 씻어주셔야 그 죄가 말끔히 씻기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다만 겸손의 모습만을 보여주시려 하신 것이 아니라 그 겸손 안에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힘이 들어있음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너무나도 당연한 요구를 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성모님은 당신의 낮아짐과 겸손으로 당신 안에 생명을 잉태하십니다. 그러나 그 생명을 당신의 것만으로 삼지 않고 세상에 봉헌하십니다. 세상은 성모님을 통해 세상에 온 생명에 의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겸손은 자신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남까지 살리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대림 마지막 주를 맞는 지금 우리 안에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서 성모님의 겸손만한 묵상거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겸손이 추상적인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보이는 사람에게 먼저 겸손하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는 더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필립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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