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의 분별> 마태오 1장 18-24절

2008. 12. 18. 오전 6:58:44

글자
 
 
                  12월 18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 - 마태오 1장 18-24절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8-2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소명의 분별 

 로마에서 공부하는 어떤 자매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성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저는 현재 성소, 그러니까 사제나 수도성소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 길을 가지 않는 사람도 많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신학을 공부하신 분이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바로 주님의 성소라는 것입니다. 누구나가 주님의 소명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건 옳지 않은 생각입니다. 모든 것이 예정되어있는 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말인데 그러면 인간의 가장 귀중한 ‘자유’를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혹은 하느님을 나쁜 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못 받는데 그것도 주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섭리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유를 버리면 책임도 없기 때문에 편하겠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동시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앙심 깊다고 자부하시는 분이 저희를 집에 초대하여 닭볶음탕을 해 주셨습니다. 저희는 너무 감사하다고 했는데 그 분은 당신의 신앙을 뽐내기나 하듯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했나요, 뭐. 하느님이 하셨지.”    겸손한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 자신과 하느님을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섭리로 도와주셨을 수는 있어도 결국 자신이 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원하시기만 하실 뿐 선택은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악수는 두 사람이 손을 내밀어야 가능합니다. 모든 것은 주님 섭리에 따라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손을 내미느냐 안 내미느냐에 따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는다면 천당에 가거나 지옥에 갈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유가 있기 때문에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큰 고민에 빠집니다. 그렇게 순결하고 예쁘기만 했던 약혼녀 마리아가 몇 달 친척집에 다녀오더니 배가 불러서 온 것입니다. 깊은 배신감을 느꼈지만 그는 그녀를 조용히 놓아주기로 합니다. 이 사실이 밖에 알려지면 마리아도 뱃속의 아기도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자초지종을 설명해줍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꾼 꿈이 정말 사실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닐 수 없을 만큼 주님의 계시는 확실합니다. 어떤 계시든 조그마한 의심이 든다면 그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속는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꿈에서 계시를 주어도 그 사람이 그것을 믿고 그것에 자신의 온 삶을 바칠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주십니다.   그리고는 다른 것보다도 약혼녀를 온전히 믿지 못한 것에 대해 큰 후회를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결혼을 하기로 결심하는 선택은 요셉에게 달려있습니다. 요셉은 기계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초대하실 뿐 응답은 각자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 초대에 다 온전히 응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즈카리야도 그래서 벙어리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 각자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 있습니다. 소명이 없이 태어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대로 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것은 각자가 다르게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성모님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오로도, 또 오늘의 요셉도 자신들의 소명을 이렇게 확실히 받았는데 사실 주님께서 나에게 진정 어떤 삶을 요구하시는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그런 확실한 부르심이 있어서 그 뜻을 따른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런 분들은 ‘그 분을 따를 자세가 되어 있어서 그런 확실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나이가 서른이 되어가면서도 주님께서 성직자 혹은 수도성소로 불러주셨는지 아니면 결혼성소로 불러주셨는지 고민하는 청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는 먼저 주님께서 어떤 성소로 불러주시던 ‘예!’할 자세를 지니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소명이 점점 확실해 질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내가 말하기보다는>

 

   또 다시 성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본당이나 수도회는 지금쯤 다들 성탄분위기 조성으로 바쁩니다. 성탄구유를 꾸미기 위해 작년에 사용했던 물품들도 점검해봐야지요.

 

   여러분들,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의 마구간 광경 기억나시나요?

 

  보관 상자에서 진흙으로 만든 형상들을 하나하나 꺼내면서 다들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나름대로 일조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누구에 앞서 우리 성모님, 예수님의 탄생과 인류 구속 사업에 가장 큰 기여를 하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세주의 별빛을 따라 오랜 여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동방박사들, 이젠 아기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가져온 선물을 봉헌하고 있습니다. 강생하신 만왕의 왕 앞에 합당한 예물을 드리니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일입니다.

 

   목동들도 몇 명 서있습니다. 순박한 시골 목동들도 구세주의 탄생을 크게 기뻐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가난한 그들이었기에 드릴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찬 찬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둘러서있는 양들과 나귀들, 소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봤더니, 그들 역시 나름대로의 기여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겨울 마구간입니다. 추위에 떨고 있는 아기 예수님을 위해 그들의 체온으로 콧김으로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공간을 덥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분이 한 분 있습니다.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구세주 탄생 앞에 그가 보여준 태도는 이 대림 시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재수 옴 붙은 사람’이었습니다. 재수 더럽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나이 지긋한 농촌 노총각이었습니다. 사람은 좋은데 워낙 시골에 살고, 또 없이 살다보니 시집올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요셉만 보면 마음이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명절 때 마다 친척들은 요셉을 보고 꼭 한 가지 속 쓰린 질문을 던졌습니다.

 

   “너, 아직도 그러고 있냐? 너 도대체 언제 국수 먹여줄 거냐?”

 

   이런 요셉이 천신만고 끝에 마리아란 소녀와 결혼하게 되었지요. 얼마나 마음이 설렜을까요? 약혼식까지 치렀고,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결혼입니다. 드디어 오랜 노총각 딱지를 떼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약혼녀를 만났는데, 전혀 얼토당토않은 말 한마디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약혼녀가 애를 밴 것입니다.


   마리아는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요셉은 도무지 납득할 길이 없었습니다. 우선 화부터 났습니다. 정말 이럴 수는 없다며 분통을 참지 못하고 있는 요셉에게 천사의 메시지가 전달됩니다.

 

   그걸로 요셉의 꿈은 완전히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가 오랜 세월 꿈꾸어오던 단란한 가정, 깨가 쏟아지는 알콩달콩한 신혼살림은 끝이 났습니다. 한마디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겪이 된 것입니다.

 

   이런 과정 안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요셉의 태도가 있습니다. 그의 침묵입니다.


   복음사가들은 한결같이 요셉과 관련된 기사를 거의 적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요셉은 마리아와 더불어 예수님의 구세 사업에 가장 크게 기여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복음사가들은 요셉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요셉은 그만큼 과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선천적으로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충직했고, 단순했으며, 아무 말 없이 자기 길을 충실히 걸어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의 한 평생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철저한 복종,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니 맞아들였습니다. 이집트로 피신하라니 피신하였습니다. 나자렛으로 돌아오라니 돌아왔습니다. 그저 묵묵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대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침묵과 경청으로 성인이 되신 분입니다. 이 대림 시기는 어쩌면 내가 말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도록 내 귀를 여는 시기입니다. 이 대림 시기는 어쩌면 내가 말하기보다는 이웃들이 말하도록 내 마음을 여는 시기입니다.

 

              
 
 
 
<오늘의 묵상>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분께서 함께 계시면 얼마나 든든할는지요? 느낌을 살리지 못한다면 이유를 찾아봐야 합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셨기에 축복으로 끝난 사건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무심코 잊은 채 살아가기에 무덤덤해지는 것입니다. 그때의 감격을 되새겨야 합니다. 그러면‘임마누엘’의 의미는 새로워집니다.
사람들은 별다른 병이 없는데도 건강에 대해 불안을 느낍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대해서도 공포심을 지닙니다. 하지만 두려워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본래부터 ‘주님의 것’이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이 정도의 건강을 주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임마누엘’의 의미를 되새기는 행위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니 어떤 처지에 있든 두려움을 벗고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복음의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당연히 그는 고뇌에 빠집니다.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 주셨기에 모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들을 보는 눈이 없었기에 지나쳐 버렸을 뿐입니다. 곁에 있는 천사들을 먼저 만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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