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자신에게 솔직할 때 ]_ _마태오 21,28-32

2008. 12. 16. 오전 6:42:57

글자
 

12월 16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 마태오 21,28-32

 
<구세주의 구원이 모든 가난한 사람에게 약속되리라.>
▥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2.9-13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불행하여라, 반항하는 도성, 더럽혀진 도성, 억압을 일삼는 도성! 2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구나.
9 그때에 나는 민족들의 입술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리라. 그들이 모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님을 섬기게 하리라. 10 에티오피아 강 너머에서 나의 숭배자들, 흩어진 이들이 선물을 가지고 나에게 오리라.
11 그날에는 네가 나를 거역하며 저지른 그 모든 행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때에는 내가 네 가운데에서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을 치워 버리리라. 그러면 네가 나의 거룩한 산에서 다시는 교만을 부리지 않으리라. 12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 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
시편 34(33),2-3.6-7.17-18.19와 23(◎ 7ㄱ)
◎ 가련한 이가 부르짖자 주님께서 들어 주셨도다.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라. 내 입에 늘 주님에 대한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이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들은 듣고서 기뻐하여라. ◎
○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에 넘치고 너희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여기 가련한 이가 부르짖자 주님께서 들으시어, 모든 곤경에서 그를 구원하셨도다. ◎
○ 주님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맞서시니, 그들에 대한 기억을 세상에서 없애시기 위함이로다. 그들이 울부짖자 주님께서 들으시어,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도다. ◎
○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넋이 짓밟힌 이들을 구원해 주시도다. 주님께서 당신 종들의 목숨을 건져 주시니, 주님께 피신하는 이는 아무도 죗값을 받지 않으리라. ◎
 
<요한이 왔을 때, 죄인들은 그를 믿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8-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오늘의 묵상 
두 아들의 비유는 마태오 복음에만 나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할 것을 당부합니다. 큰아들은 거절하지만 나중에는 마음을 바꿉니다. 작은아들은 가겠다고 해 놓고서는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더 순종하는 아들인지 질문하십니다. 대답하는 그대들은 어느 아들에 속하는지 묻고 계신 것입니다.
가겠다는 말만 하고 ‘가지 않은 아들’은 누구의 모습일는지요? 문맥으로 보면 바리사이들입니다. 잘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든 “예!” 하고 답하지만 적당히 대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은 오늘에도 많습니다. 행동은 적고 요구는 많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절했다가 ‘일하러 간 아들’을 ‘세리와 창녀’에 비유하십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입니다. 율법에서는 죄인으로 간주되던 이들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큰아들의 모습이라고 하십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세리와 창녀들도 삶을 바꾸는데 ‘왜 바꾸지 못하는가?’ 하는 질책입니다. 바꾸어야 은총이 함께합니다. 맏아들은 싫다고 했지만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러기에 순종하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도움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기쁨과 함께 답을 주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깨트려버려야 할 향유단지>


   여러 명의 자녀들을 두신 부모님들이라면 다 느끼실 것입니다. 자식들, 하나같이 다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좀 더 살펴보면 또 하나같이 다 다릅니다. 각자 나름대로의 특징이나 성향, 기질이나 장단점들이 있지요. 

   어떤 자녀는 그렇게 효자일 수 없습니다. 얼마나 고분고분한지 모릅니다. 부모가 하라는 대로 다 합니다. 공부도 잘 합니다. 동네 사람들 칭찬이 자자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자녀는 엄청 부모 속을 썩입니다. 어찌 그리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마음에 안 드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내 배에서 저런 애가 나왔을까?’하는 의구심이 절로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식도 엄연히 자식이지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달래기도 합니다.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줘보기도 합니다. 그래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을 거듭합니다. 모든 노력이 안 먹혀들어갈 때면 ‘극약처방’도 써봅니다. 

   마음으로는 절대 그렇지 않겠지만 부모들은 너무도 안타까운 심정에 이런 말도 서슴없이 합니다. 

   “당장 짐 싸들고 나가거라!” “너는 오늘부터 내 자식이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끝까지 말 안 듣는 자식들 때문에 엄청 속이 상하십니다. 아무리 차근차근 설명해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목숨과 관련된 일이어서 간곡하게 당부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는 자식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특히 면전에서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잘 도 대답하지만,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죽어도 그릇된 생활을 고치지 않고 옛 악습을 반복하는 자식들의 모습에 강력한 경고를 던지십니다. 

   앞에서는 갖은 감언이설로, 그럴듯한 말들로, 실속이 하나도 없는 말들로, 전혀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말들로 말잔치를 벌이지만 행동이 조금도 따라주지 않는 자식들의 완고함 앞에 발을 동동 구르십니다. 

   가슴을 치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땅까지 쳐가면서 회개를 결심하지만, 그 결심이 단 하루도 지속되지 않는 자식들 앞에서 고민이 크십니다.

 

   이런 사연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연한 의지입니다. 과감한 결단입니다. 

   수백, 수천가지의 좋은 계획보다는 단 한가지의 확실한 실천입니다. 

   회개의 결실로 주님을 위해 시가 수백 만 원이나 나가는 향유단지를 과감히 깨트려버리는 한 죄 많은 여인의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회개의 표시로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의 반을 ‘뚝’ 떼어 주님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헌하는 세관장 자캐오가 보였던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오늘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나를 부자연스럽게 속박하고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내가 깨트려버려야 할 향유단지는 무엇입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내 자신에게 솔직할 때 _ _

          

  저는 성소를 좀 늦게 받은 편입니다. 대학 다니다가 군대 다녀와서 복학을 했는데 성소를 느끼고 신학교로 편입시험을 봐서 들어갔습니다. 사실 그 이전엔 사제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결혼해야 행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 사람들이 물으면 사제가 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수녀님이 계속 사제가 되라고 해서 별 생각 없이 그러겠다고 했더니 굉장히 기뻐하시고 특별히 챙겨주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성당 다니는 아주머니들에게도 앞으로 뭐가 될 거냐고 물으면 신부가 된다고 대답했고 그러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먹을 것이나 용돈도 주시는 적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 새로 만난 담임선생님은 예쁜 여자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분은 수업시간마다 성경 이야기를 해 주셨고 우리는 매우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문제는 그 분은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앞으로의 희망을 쓰라고 할 때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신부님 혹은 목사님!”

아마 그 때부터 세상과 타협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생님이 특별히 저를 남으라고 하더니 따로 신앙에 대해 상담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왕이면 목사님이 되라고 했습니다. 저는 사제건 목사건 상관없다고 대답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렀고 혹시 중, 고등학교 때 저를 이끌어주는 누가 있었다면 바로 신학교에 들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커가면서 그런 마음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25세가 되어 성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1년 심하게 고민하고 주님께 ‘항복’하였습니다. 돌아보면 어렸을 때 사제가 되겠다고 한 것은 나의 진정한 소망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부모님이나 주위 사람에게 떠밀려서, 혹은 싫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나 스스로를 속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전에 사제가 되고 싶었느냐고 물으면 없었다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No!’라는 말을 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고 진정으로 되고 싶었던 적은 정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No!’라는 말을 할 수 없어 신학교 들어오고 사제가 된 신부님들을 압니다. 한 젊은 사제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일 후회되는 건 ‘No!’ 할 수 있었을 때 하지 못한 거야.” 그 신부는 사제가 된 것을 후회하면서도 그래서 힘들어하면서도 옷을 벗지도 못합니다. 정말 그렇게 힘든 삶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줄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내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이고 그런 결정에 생명을 걸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큰 아들은 밭에 나가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No!’ 합니다. 그러나 결국 일을 합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그 반대입니다. ‘Yes!’ 했지만 결국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하기 싫으면 끝까지 ‘No!’ 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솔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No!’ 할 용기가 없어서 결국 자신을 속인 것입니다. 바로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런 부류입니다. 어쩔 수 없이 ‘예!’ 하며 살지만 실제 마음은 아닌 것입니다. 종교와 백성의 지도자로서 겉으로는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주님을 따르는 척하지만 결국 자신을 속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주님의 말씀에 확실히 ‘싫어요!’ 했던 사람들이었기에 솔직한 회개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속이며 억지로 무엇을 하지 맙시다. 그런 사람이 일을 하면서도 불평이 많습니다.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을 아는 사람이고 자신을 알기에 한 번 ‘Yes!’ 하면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Yes!’는 그래서 영원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하는 말에 온 존재를 실어 말했으면 반드시 열매를 맺도록 합시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 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씀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이사 55,10-11)

   

                                           
                                                        가톨릭성가 94번 / 하늘은 이슬비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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