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못할 약속 하지 않기>루카 1,5-25

2008. 12. 19. 오전 6:27:10

글자
                         2008년 12월 19일 (자)대림 제3주간 금요일
 
 
<복음>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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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25
5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서 즈카르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으로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6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7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
8 즈카르야가 자기 조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할 때의 일이다. 9 사제직의 관례에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그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기로 결정되었다. 10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다. 11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 제단 오른쪽에 섰다.
12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13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15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16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17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18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19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20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21 한편 즈카르야를 기다리던 백성은 그가 성소 안에서 너무 지체하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22 그런데 그가 밖으로 나와서 말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환시를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몸짓만 할 뿐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23 그러다가 봉직 기간이 차자 집으로 돌아갔다. 24 그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25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오늘의 묵상>
 
 즈카르야는 천사의 모습을 보자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갑작스레 천상의 모습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음성은 뚜렷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순간, 그는 아내를 떠올립니다. 생리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아내를 기억합니다. 그러고는 말을 더듬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는지요? 저와 제 아내는 나이가 많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그를 질책합니다. 그러고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 합니다. 순간, 그는 벙어리가 됩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말은 잃었지만 깨달음의 은총을 얻었던 것입니다. 평생을 제관으로 살아왔던 즈카르야입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천사의 말을 긴가민가했을까요? 현실만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지식이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즈카르야는 모든 시련을 아들을 위해 견디어 냅니다. 그 아들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아버지의 희생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요한은 열매였고, 즈카르야는 뿌리였습니다. 물을 찾아 보이지 않는 땅속으로 내려가는 뿌리였습니다. 즈카르야는 죽을 때까지 요한을 위해 참고 희생했을 것입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 하지 않기

 도산 안창호 선생이 상해 망명시절, 한 동지의 16세 된 아들 생일 축하 자리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전에 왜경들이 이 소식을 듣고 집 주변에 잠복하고 있었습니다. 주위의 독립운동을 함께하던 동지들도 참석을 극구 반대하며 말렸습니다.  “선생님, 이번에 가시면 체포되십니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애들 생일잔치인데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십니까?”   “작은 약속이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그 곳에 가서 왜경에 체포되고 맙니다.  이 어리석으리만큼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았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이 행동은 그 분이 평생 지니고 살았던 4대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알면 바로 이해가 됩니다.

그 첫 번째 정신이 ‘무실(務實)’입니다. 무실은 말 그대로라면 노력해 열매를 맺자는 것이겠지만 實은 ‘진실’이란 뜻도 있습니다. 즉, 무실은 진실이란 뜻이고 그 반대는 거짓입니다. 그 분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

그 두 번째 정신은 ‘역행(力行)’입니다. 알면 행하라는 뜻입니다.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을 알았기에 그 분은 다만 행한 것뿐입니다.

세 번째 정신은 ‘충의(忠義)’입니다. 충성과 신의를 나타내는데, 맡은 일에 대해 충성을 다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동지들이게 이렇게 씁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몸부터, 우리 집부터 고치는 것을 큰 일로 보지 않는 이가 있다고 하면, 우리는 세상을 속이는 사람이요 우리 스스로가 속는 사람이외다.”  그리고 마지막이 ‘용감(勇敢)’입니다. 도산은 ‘용단력과 인내력’이란 글에서 이렇게 씁니다.   “일이 옳은가 그른가, 이 일을 할까 말까 방황하고 주저하면 거기에는 고통이 생깁니다. 또 결국은 낙망합니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어째서 작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분에 대한 짧은 글들을 찾아 읽으면서 지금까지 지키지 못한 많은 약속들이 떠올라 부끄러웠습니다. 그 분은 중학교 학력밖에는 없는 분이셨는데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너무나도 확실한 신념을 지니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예 하지 맙시다. 그리고 했다면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도록 합시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것도 일종의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즈카르야 부부에게 아들이 생기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자신과 아내가 나이가 많고 지금까지도 자녀가 없었다는 말을 하며 잘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즈카리야는 아들이 출생하여 할례를 받을 때까지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만약 즈카리야도 도산 안창호 선생과 같은 신념으로 살았다면 주님의 말을 믿지 못했을까요? 물론 믿기 어려웠을 테지만 ‘나도 거짓말을 안 하는데 하느님이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실 수 있을까?’하며 결국 믿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자주 우리가 믿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믿지 못할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을 더 증가시킵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서부터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거짓이 내 믿음을 갉아먹는 것입니다.

                                                말문이 막혀야!

오늘은 주님의 오심을 가까이서 준비하는 또 한사람, 즈카르야의 얘기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요한의 아버지가 됨으로서 즈카르야도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구원의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직접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찌 보면 구원의 역사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있는 객관자입니다.
그런 객관자가 어느 날 느닷없이 자기도 모르게 구원의 역사에 편입이 되고 그 위대한 역사를 뒤늦게 알고 찬미하게 됩니다.
이런 점은 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하느님 구원의 도구가 되고 나중에서야 그것을 깨닫고 하느님을 찬미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성무일도에서  우리를 대표하는 그의 찬미가를 노래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을 목도하고 즈카르야와 마리아 모두 그 의문을 얘기하는데 어찌해서 마리아는 벌을 받지 않고 즈카르야는 오늘 보듯이 말문이 막히는 벌을 받는가 하는 점입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는 즈카르야의 물음이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는 마리아의 물음보다 더 불경스럽기 때문일까요?

‘왜?’라는 물음이 말은 같지만 두 가지 ‘왜?’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 그 의도를 알려고 들지도 않고 이미 한 행위에 대해 비판적으로 따지는 것이 그 하나이고, 왜 그렇게 했는지 그 의도를 모르기에 알기 위해 그 의도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어떻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가 행위의 원인적인 의문이라면 어떻게는 행위의 과정적인 의문이고, 왜가 행위의 의도가 무엇이냐의 의문이라면 어떻게는 그런 행위가 어떻게 가능하냐의 의문입니다.

그러므로 ‘왜?’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가능함을 불신하는 ‘어떻게?’와 그것이 가능한 이치를 알고 싶어 하는 ‘어떻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그 이치를 알고 싶어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물었던 것이고 오늘 복음에서 천사의 응답을 보면 즈카르야는 믿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믿게 될 때까지는 말문이 막힙니다.  불신의 말은 더 이상 꺼내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나의 입에서 불신의 말은 싹둑 잘라내야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불신의 말은 아예 입에 담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 서로 간에 불신이 유포되어서도 아니 되지만 하느님 능력에 대한 불신이 우리 안에서 자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처럼 “I can do it!"이라는 말이 유행인 세상에  “God can do any thing!"
"Impossible is nothing to God"이라는 말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기 위해서  “어찌 그런 일이?”라는,  불신의 말을 토해 내는 말문은 막혀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


<견뎌내기 힘들 때 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의 이미지는 꽤나 경직된 분위기입니다. 징벌의 하느님,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 그래서 다가서기 힘든 엄한 아버지의 냄새가 많이 납니다. 의인들에게는 복주시지만 악인들은 엄중하게 벌하시는 정의의 하느님이 우선적으로 떠오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늘 풀지 못하는 숙제가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죄한 이들의 고통, 의인들이 겪는 시련이었습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그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이 두 사람은 ‘하느님 앞에 한 점 부끄럼 없는’ 의인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조금의 흠도 없이 살아가던 완벽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참된 ‘의인’인 두 사람에게 크나큰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십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형벌보다 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는 자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머리 위해 얹어진 면류관’이란 말이 있습니다. 연세가 들어가실수록 느끼실 것입니다. 잘 장성한 자식들, 제 갈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자식들은 부모의 가장 큰 보람이며 기쁨입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자식 없이 점점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어언 60이 넘어 70이 다되어 갑니다. 친구들은 수많은 손자손녀들을 품에 안고 ‘이제 다 이루었다. 더 이상 여한이 없다’며 감격해했습니다. 큰 소리로 많은 후손을 번성케 하신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반면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어떻습니까? 손자손녀는커녕 아들 하나 없었습니다.

 

   제가 이런 상황 앞에 서있다면 하느님 원망 엄청 했을 것입니다. 대놓고 하느님께 따졌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충실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건 내리지 않건 상관없이 자신들이 해야 할 도리를 다 했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자녀로서의 도리를 다했습니다.


   즈카르야는 자신에게 부여된 사제직에 충실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성전에 나아가 봉사했습니다. 엘리사벳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도 낳지 못하는 여인이란 손가락질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하느님께 매달렸습니다. 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이런 두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늦었지만 아주 큰 축복을 내리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받은 축복의 몇 백배, 몇 천배나 되는 축복을 내리시는데, 바로 구약 시대 마지막을 장식할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잉태입니다.

 

   칠흑같이 어둔 밤을 견뎌내고 계시는 분들,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신 분들, 하느님이 계시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탄식이 절로 나오시는 분들 부디 끝까지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견디기 힘들 때는 즈카리야와 엘리사벳의 일생을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철저하게도 낙관적인 신앙입니다. 목숨 붙어있는 한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다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분, 우리의 불행을 못 본 척 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괴롭히려고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행복에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의 존재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가톨릭성가 96번 / 하느님 약속하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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