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쁨과 두려움 중에 무엇을>-루카 1장 46-56절

2008. 12. 22. 오전 10:09:39

글자

 

12월 22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루카 1장 46-56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6-56
그때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의 묵상
 
성모님께서는 찬미의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당신께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천사의 발현을 목격했고, 그에게서 아기를 갖게 되리란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는 보통 아이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교만에 빠질 수 있었지만 마리아께서는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러곤 천사의 귀띔으로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그녀 역시 기적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두 분은 무슨 이야기를 하셨겠습니까? 대화의 내용을 남긴 것이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가난하고 비천한 이를 높이시는 주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생각지 않은 축복’을 체험합니다. 어려운 일이 쉽게 풀렸고, 모르는 이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확실한 실패인데도 예기치 않는 사건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때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우연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는지요? 축복을 ‘우연한 것’으로 여기면 교만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내치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마리아의 노래는 수도자들의 매일 기도에 들어 있습니다. 가난과 겸손을 늘 기억하라는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역시 ‘마리아의 노래’를 매일 읽으면 ‘삶이 곧 축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교만해지지 않고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대림 4 주간 월요일 - 노력하라 

  어렸을 때부터 행복하기를 바랐고 그래서 늦게나마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행복하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불만만 늘어가고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전에도 말했지만, 며칠 굶어보기로 했습니다. 남들은 일주일씩도 단식하던데 저는 이틀 안 먹으니 뱃가죽이 등에 붙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날 성체를 영하면서 제가 얼마나 교만했었나 반성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 자신도 모르게 ‘내가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 하는데 마땅한 행복을 주시겠지!’라고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불러준 것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주셨는데 뭐 대단한 일이나 해드리는 것처럼 잔뜩 교만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침을 먹는데 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맛있는 식사는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밥알 하나하나를 헤아리며 그 하나하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겸손함으로 살면 신학교 삶도 행복하리라 느꼈습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도 이렇게 노래하십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을 찬송합니다. 찬미는 감사드린다는 말과 같습니다. 주님께 기뻐 뛰며 감사하는 이유는 바로 성모님께서 스스로를 ‘비천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모님의 겸손이 바로 하느님께 감사하게 하고 기뻐 뛰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불평하고 우울해지는 것은 반대로 교만 때문이겠지요.    저는 겸손이 바로 행복의 비밀임을 깨닫고 이제 낮추고 사랑하기만 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정은 달랐습니다. 그런 감격은 며칠 내로 사라졌습니다. 다시 기쁘지 않았고 다시 미사와 기도가 찬미가 아니라 의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겸손해지기 위해서 성인들의 책을 읽기로 했습니다. 많은 유명한 영성서적을 읽었지만 겸손 하라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성의 두 대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데레사가 쓴 책을 모조리 읽기로 하고 제 기억엔 다 읽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습니다. 영성에 왕도는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를 괴롭히면 영성이 증가한다고 하였습니다. 며칠 굶으니 겸손해진 저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계속 육체를 죽이다시피 하며 사는 것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도 끊임없이 겸손과 사랑을 강조하지만 결론은 십자가의 성 요한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마지막에 “노력하라.”라고 합니다.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학교에서 성탄 축제를 하였습니다. 각국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신학생들이 장기를 뽐내며 공연을 하였습니다. 여기 살며 처음 참석해 보았지만 매우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각 대륙의 사람들로 구성된 합창단이 노래하는 것을 보고는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각자는 노래를 잘 하겠지만 화음을 맞추는 것은 또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쁜 와중에서도 일주일에 한 시간씩 꾸준히 노래연습을 함께 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 꾸준한 노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화음을 낼 수 있었을까요?

  아오스딩 성인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습관이 덕이 된다는 것입니다. 덕이 겸손이라하면 겸손해서 기쁘고 감사한 것은 알겠지만 그 덕을 갖기 위해서는 습관처럼 겸손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복된 노력이 결국은 몸에 베이고 그것이 덕이 되는 것이지 한 순간의 결심에 의해 겸손이나 사랑, 인내, 친절 등의 덕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미사를 드릴 때나, 또 성무일도를 할 때, 시작 전에 정말 감사와 찬미하는 마음으로 시작하고 있는지 아니면 의무로 그냥 하는지 항상 제 자신에게 물어보고 나쁜 일이 있었더라도 억지로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려고 합니다.   삶에서도 단점이 있으면 몇 년이 걸리더라도 시도하고 또 시도해서 하나라도 고쳐나가려고 합니다. 1년에 자신의 단점 하나씩만 고쳐도 모두 성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노력하지 않고 살면 자신의 단점 하나도 고치기 어렵습니다. 영성은 다름 아닌 ‘노력’에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1데살 5,16-18)

즉, 하느님의 뜻은 기뻐했다가 슬퍼했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는 것이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며, ‘어떤 상황에서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일시적인 감정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하며 나의 일부로 만들어갑시다.

 

 
                                   기쁨과 두려움 중에 무엇을
 
내가 마리아라면 어떤 심정일까를 상상해보았습니다.    그러자 미혼모가 즉시 떠올랐습니다.   미혼모의 심정이겠지요.
자기의 행위에 대한 후회,    자기와 아이를 버린 남자에 대한 분노,   이런 것은 없을지라도 인간적인 두려움과 걱정이 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인지 마리아의 수태를 고지하며 천사 가브리엘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과 더불어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기쁨 중에서   마리아는 오늘 자신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렇듯 두려움과 기쁨 중에서 기쁨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군들 두려움을 선택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기쁨을 선택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부정적인 미래를 보는 사람과 밝은 미래를 보는 사람의 차이인데   이것은 순전히
자기 혼자 미래를 맞닥뜨려야 하는 사람과   하느님과 함께 미래를 살아가려는 사람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자기 혼자 감당할 수 없는 큰일을 맞닥뜨릴 때   두렵지 않을 인간은 없습니다.
비록 큰 힘이 못되더라도 옆에 사람이 있으면  두려움이 조금 덜할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셔야만 합니다.

어제는 하나원에 가서 탈북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한국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들었습니다.
모스크바를 통해서 들어온 사람.  3달을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몽골까지 걸어가 거기서 들어온 사람,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태국을 통해 들어온 사람,   배를 타고 직접 넘어왔는데    인천까지 거의 다와 풍랑에 그만 배가 뒤집혀   같이 오던 사람은 죽고 자기만 간신히 살아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왔건 그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은 극도의 두려움이었고  이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배고픔의 고통,  추위의 고통,  가족을 두고 떠나온 고통,
이런 것도 크나큰 고통이었지만  어떤 상황이 자기에게 닥칠지 모르는 두려움,
이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이번 24일이면 그 중의 한 기가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대한민국 사회에 첫발을 디디는데   어떤 앞날이 자기들을 기다릴지 또 다시 두려움 가운데에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저는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여러분 여정에 동행하신 하느님께서   앞으로도 함께 계실 것이라고 얘기해주고  그 표시로 나도 당신들의 여정에 함께 하겠노라며   저의 번호를 알려주니 모두 전화번호를 적습니다.

막상 평양에 평화 봉사소를 여니    내년에 어떤 일이 닥칠지   저에게도 언뜻언뜻 불안과 두려움이 스며듭니다.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빈자리에 불안과 두려움이 스며드는 것이지요.
즉시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나 아닌 다른 곳에 계신 것은 아니지요?’하고 혼자 되뇝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를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선물리스트>


   오늘 복음은 복음서 안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찬가 중 하나인 ‘성모의 노래’입니다. 수도자들은 매일 저녁 기도 때 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성모님께서 지니셨던 ‘겸손의 덕’을 청합니다.

 

   4시기 경 밀라노에서 활동했던 성 암브로시오 교부께서는 ‘성모의 노래’는 성모님의 ‘완벽한 겸손’을 가장 잘 드러내는 찬가라고 강조했습니다.

 

 참된 겸손은 ‘자기비하’ ‘자기혐오’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나약함이나 부족함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참된 겸손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무한한 자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크신 그분 앞에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을 기뻐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모의 노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여종 마리아가 부른 역사상 가장 겸손한 기도였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을 자신의 뱃속에 잉태한 마리아는 사촌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만삭이 다되어가는 엘리사벳을 보는 순간, 마리아의 내면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하느님의 자비를 찬양하는 노래가 터져 나왔는데, 바로 ‘성모의 노래’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찬가를 통해 첫 번째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구세주 잉태’란 대사건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베풀어주신 선물임을 천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는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무한한 사랑과 축복을 받고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밝힙니다.

 

   자기 낮춤, 겸손의 덕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신 덕행이며, 그리스도교 안에서 으뜸가는 덕행입니다. 겸손이야말로 우리가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진리의 길입니다. 참된 겸손은 우리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하느님께서 나를 극진히 사랑한다는 것을 인식함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그 사랑에 힘입어 내가 하루하루 살아감을 고백함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하느님을 떠나있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직시함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나는 매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축복과 은총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함에서 시작합니다.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의 모범에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매일 내게 주어지는 하느님으로부터의 축복과 은총을 한번 헤아려보십시오. 하느님께서 매일 아침 내게 보내주시는 선물 리스트를 한번 만들어보십시오.

 

   ‘선물리스트’ 제일 하단부에 이렇게 적으십시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 사랑합니다.”

 

                                                

                ††

           

 

가톨릭성가 269번 / 마리아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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