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세례자의 탄생> *루카 1장 57-66절

2008. 12. 23. 오전 6:34:39

글자

12월 23일 대림 제4주간 화요일-루카 1장 57-66절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23-2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요한 세례자의 탄생>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7-66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대림 제 4 주간 화요일 - 고통의 은혜  

  재작년 여름에 ‘바오로의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대학 프로그램을 따라 거의 한 달간 터키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헤드폰을 많이 껴서인지 아니면 바이러스가 들어가서인지 여행 중간쯤부터 한쪽 귀가 잘 안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단순한 것으로 여겨 여행을 마친 뒤 로마로 돌아와서 병원에 갔더니 입원을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고 많은 검사와 치료를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로는 바이러스가 들어가서 그렇다고 했지만 아무리 주사를 놓아도 좋아지지가 않았습니다. 한 십일 정도 입원해 있다가 퇴원하였습니다.  입원해 있는 동안에 매우 겸손해짐을 느꼈습니다. 유럽은 병원 치료비가 무료입니다. 대신 간호사들이 자신들이 돈을 대신 내주는 양 입원 환자들을 불친절하게 대합니다. 완전 남의 집에 얹혀사는 느낌이었고 그 와중에 면회를 와 주는 사람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가장 약해졌을 때 제일 겸손해짐을 느꼈습니다. 퇴원하고 나서는 내 자신 스스로도 참 겸손해졌다 싶을 정도로 만나는 사람들을 높였지만 그러면서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또 똑같아질 거라는 생각도 동시에 하였습니다. 역시 시간이 지나자 겸손했던 기억도 사라지고 다시 교만한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이든 청하면 다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마치 솔로몬에게 하신 것처럼 원하는 것을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고통과 멸시를 주소서.”       그리고 죽기까지 고통과 멸시 속에 사시다가 돌아가실 때도 홀로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곳에 가서 쓸쓸하게 돌아가십니다.  

로마에서 함께 공부하던 어떤 수녀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수련할 때 주님께 고통을 청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후회돼요. 너무 힘들어요. 고통은 함부로 청할 게 아닌 것 같아요.”   사실 우리들은 성인들처럼 바로 고통을 청할 처지가 못 됩니다. 다만 하루하루 우리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가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벅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너무 적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더 큰 고통을 청하게 됩니다. 왜 고통을 청하게 될까요?

   오늘 복음에서 즈카리야는 벙어리였다가 입이 풀려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처음엔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가 요한의 할례가 있는 날 천사가 일러준 대로 그 아이에게 요한의 이름을 붙여주라고 하면서 묶였던 혀가 풀리게 됩니다.    즈카리야는 혀가 묶여 있던 기간 동안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실제로 잉태된 아기를 보면서 자신이 믿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반성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믿음이 생겼고 그의 이름을 지어주면서 믿음을 증거합니다.   천사가 즈카리야게게 주었던 것은 벌이 아니고 은총이었습니다. 고민하고 반성하고 더 큰 믿음을 얻게 하는 침묵의 시간을 제공해 준 것입니다.

  살다가 힘들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어떤 어머니도 고통 없이 아기를 낳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인들이 고통을 청하는 것은 고통이 그만큼 영성에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병원에서 고통을 받음으로써 원하지 않아도 스스로 겸손해지는 은총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힘이 든다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누구도 그 분만큼 힘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힘을 내십시오. 이 고통이 나에게 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고통일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오늘의 묵상>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요한의 탄생을 알립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는 의심에 휩싸입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생리적 상황’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의 의심은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요한의 잉태는 주님의 기적입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인간의 계산으로 판단하려 했던 것이 즈카르야의 잘못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사제였습니다. 보속으로 그는 벙어리가 되지요. 처음엔 놀랍고 부끄러웠을 겁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차츰 은총을 느끼게 됩니다. 왜 이런 고통을 주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는 아들의 탄생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기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요한의 탄생을 기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아들을 주셨던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벙어리로 있으면서 이것을 깨치게 됩니다. 그러자 보속은 해제됩니다. 벙어리의 삶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깨달음은 오지 않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에겐 더욱 그렇습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깨끗하게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으면>


   올겨울은 다른 해보다 훨씬 눈이 흔하군요. 호남지방에서는 설상가상(雪上加霜)이란 표현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안 그래도 복잡하고 힘든데, 그 위에 또 눈이 퍼부었으니 눈피해를 입은 이웃들 고초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닙니다.


   어릴 적 산골에서 잠시 지낼 때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때도 눈은 요즘처럼 내리고 또 내렸습니다. 쌓인 눈을 치우기도 전에 또 다른 눈이 쌓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제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눈 내리는 밤은 어찌 그리도 적막했는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 포근했는지 모릅니다.


   유용주님의 설명에 따르면 눈 내리는 밤이 조용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눈은 공기의 예민함을 누그러뜨리고 공기의 흐름을 차단하고 내리기 때문에 조용하다. 먼 마을에 잠든 사람들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길과 들판과 산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작가는 이런 수려한 표현을 통해 눈처럼 깨끗하게 되어 다시 한 번 새롭게 살아가고픈 염원을 이야기합니다.


   “이대로 한 오백년 눈이 내렸으면, 이대로 얼어붙어 모든 생명이 죽고 난 뒤 한 천 년 세월이 흐른 다음 다시 깨어났으면... 깨끗하게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으면...”

   (유용주,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솔 출판사 참조)


   작가의 깨끗하게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은 정말 어려운 일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진 세월, 인고의 세월을 끝까지 잘 견뎌온 두 노인-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오랜 염원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면서 더욱 그렇게 생각합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참으로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이승을 하직해야할 고령의 나이였기에, 이젠 하느님 앞에서 지난 삶을 정리해야할 노년기에 접어든 나이였기에 자식이 생길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포기했어도 벌써 오래 전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이 나이에 무슨’ 하며 기겁을 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미 끝났어’ 하며 지레 꼬리를 내렸을 것입니다. 창피해서라도 쉬쉬하고 사실을 감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끝까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신뢰했습니다.


   두 사람의 육신은 세월의 흐름 앞에 어쩔 수 없이 노쇠해져갔지만, 두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 앞에 언제나 청춘의 젊음을 유지했습니다. 두 사람의 신심은 어린이들처럼 맑고 투명했습니다. 언제나 자녀다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갔습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었지만 자신들의 인생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뜻하시는 바가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 하느님께서는 자신들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라고 열렬히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간절한 바람을 하느님께서 결코 외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라는 고목에서 새하얀 꽃 한 송이를 피어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이젠 끝났다고 여긴 두 노인을 통해서 당신의 구원 역사의 한 장을 새로 쓰기 시작합니다.


   우리 모두 또 다시 추운 겨울 앞에 서있습니다. 늘 걸어도 두렵고 떨리는, 때로 혹독한 삶이라는 겨울 앞에 또 다시 서있습니다.


   깨끗하게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길 바랍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97번 / 구원의 메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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