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 루카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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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2,7-10
7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 8 들어 보아라. 너의 파수꾼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다 함께 환성을 올린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심을 그들은 직접 눈으로 본다.
9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 10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세상 끝들이 모두 보았도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를. 주님께서 기적들을 일으키셨도다. 주님의 오른손이, 주님의 거룩한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도다. ◎
○ 주님께서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의 구원을 알리셨도다. 당신의 정의를 드러내 보이셨도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의 자애와 성실을 기억하셨도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세상 끝들이 모두 보았도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 비파와 함께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와 노랫가락과 함께. 나팔과 뿔 나발 소리와 함께,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환성 올려라. ◎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6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2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3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6 또 맏아드님을 저세상에 데리고 들어가실 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1,1-5.9-14>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주님 성탄 대축일-주님의 생환
이사야서의 말씀,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심을 그들은 직접 눈으로 본다.”는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님께서 돌아오신다는 말씀이 왜 하구 많은 말 중에서 내 눈에 꽂혔을까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돌아오심이라는 말에는 그 앞에 선행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오셨다가~ 돌아가셨다가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아오시기 직전의 상태는 돌아가신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오셨다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신다는 말이 더 눈에 들어온 이유는 현재 나의 상태는 주님께서 돌아가신 상태이고 돌아가신 주님께서 이번 성탄에는 다시 돌아오시길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돌아가신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무엇이 꼴 보기 싫어 돌아가셨을까?
오셨지만 오셨는지도 모르는 무관심 때문에? 말씀으로 오셨지만 그 말씀을 탐탁치않게 여겼기 때문에? 빛으로 오셨지만 그 빛을 오히려 증오하였기 때문에? 사랑으로 오셨지만 그 사랑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제는 성탄 밤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과 간단한 다과를 한 다음 형제들끼리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였습니다. 마침 생일 축하 떡이 있어서 여느 생일 잔치하듯이 우리는 촛불도 켜고 축하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2008번째 생일을 축하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의 생일을 우리가 축하합니까? 주님께서 탄생하신 것을 왜 우리가 기뻐합니까? 명동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 의미도 모르고 남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니까 축하하고 기뻐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외면으로 돌아가셨던 주님이 다시 돌아오신 것이 아니라면 우리 안에서 죽으셨던 주님이 우리 안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면 그래서 우리의 비 구원이 주님의 오심으로 구원으로 바뀌지 않았다면 우리의 축하와
우리의 기쁨은 그저 분위기에 휩쓸리는 흥청거림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올해의 성탄은 돌아가셨던 주님의 생환(生還), 즉 부활과 다름 없습니다.
성탄 대축일 - 기뻐하고 기뻐하여라
며칠 전에 기숙사 문지기 아저씨와 잠깐 대화를 나누면서 성탄 인사를 먼저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맛있는 거 많이 드시겠네요?” 했더니 그 분이 “맛있는 거 먹는 것보다 먼저 내적으로 기뻐야지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맞는 말씀이겠지요. 혼인잔치가 있다면 혼인이 먼저이고 이어지는 것이 잔치이니까요. 그런데 가끔은 잔치가 주가 되고 그 잔치에만 너무 머무르려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왜 잔치를 하는지, 즉 왜 기뻐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한 자매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볼 때는 부족한 것 없는 사람입니다. 남편도 성실하고 아이들도 잘 크고 있고 사는 것도 부족하지 않아요. 성당도 열심히 다니고 봉사활동도 하고 나름 잘 살고 있다고 생각은 하는데, 가끔은 밤에 자다 말고 일어나 무언지 모를 공허함에 눈물을 흘리곤 해요. 뭐가 부족한지도 모르겠고 ... 잘 모르겠어요.” 이 자매님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처지를 설명해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남편이 있다고 하지만 남편이 자신 영혼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그 자리는 오로지 예수님으로만 채워집니다. 우리 모두의 유일한 남편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밤에 우리의 신랑이 세상에 탄생한 때입니다. 누구도 외롭지 않게 하기 위해 처녀의 몸에 잉태되고 태어나신 분입니다. 혼인잔치를 하는 이유는 혼인을 했기 때문인 것처럼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한 몸이 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랑은 겨울밤에 태어나셨습니다. 겨울은 춥고 고통스러운 때이고 밤은 빛이 없어 혼란스러운 상황을 나타냅니다. 고통스럽고 어두운 곳에 희망과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사형수 아들을 둔 한 자매님이 당신 아들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제 아들은 사형수였어요. 지금은 이 세상에 있지 않죠. 큰 범죄를 저지르고 사형 집행만 기다리고 있는데 하느님을 알게 되었어요.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같은 수감자들에게도 하느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우리가 그에게 하느님을 전해 준 것이 아니라 그 애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게 했어요. 그래서 우리 가족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형 집행이 결정 되자 다른 사형수들은 울며불며 죽음을 두려워했고 억지로 끌려 들어갔지만 제 아들은 당당했어요. 오히려 신부님께 건강에 해로우니 술과 담배를 줄이시고 운전도 조심하시라고 했고, 눈물을 흘리시는 수녀님을 위로까지 해 주셨어요. 좋은 데 가는데 왜 우시냐고. 그리고는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어요.” 그는 청부살인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정권 교체 때 마지막으로 사형수들을 모조리 사형시킨 때가 있었는데 그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사형집행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의 삶은 당연히 추운 겨울밤이었을 것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그에게 삶의 이유는 없었겠지요. 그저 어둠 속에서 헤매던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삶의 고통도 이만저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고통스러우니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봄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세상엔 따듯함도 있고 빛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세상에 살 때보다 더 큰 자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엔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겨울밤에 태어나신 이유입니다.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겨울밤은 그 분이 태어나심으로 인해 축복의 밤이 되었습니다. 아니 그 분이 태어나신 곳은 찬란한 빛으로 감싸였습니다. 하늘의 별과 천사들이 영광스러운 빛 안에서 춤추고 노래하였습니다. 이제 춥고 어두운 얼어붙은 마음은 사라지고 따듯한 기운과 생명의 빛이 나타났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어서 죽어야 하는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고통이 축복이 된 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이 온 밤에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신랑은 가난한 마구간에 태어나서 가난한 목자들을 먼저 초대하였습니다. 목자들은 세상에서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마구간 역시 사람이 선택하지 않는 냄새나고 추운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장 가난하게 태어나야만 가난한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다가오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궁궐에 태어났다면 가난한 목자들이 어찌 근처에나 갈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신랑은 누구나가 다가가기 편하도록 가장 가난하게 가장 낮은 곳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소외된 이들을 먼저 부르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임마누엘, 즉 항상 너희와 함께 하는 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으며 누구도 혼자 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는 고등학교 때 심한 고독을 체험했습니다. 세상엔 나 혼자라는 생각에 외로움을 넘어선 절대 고독을 느꼈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있었지만 그들은 더욱더 외로움을 가중시켰습니다. 외롭다고 하니까 한 개신교에 다니던 친구가 “너 천주교 다니지? 예수님이 함께 계신데 왜 외로워?”하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누가 그걸 모르나? 느껴지지 않으니까 그렇지.’라고 생각하며 그냥 흘려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머리에 남아서 계속 떠올랐습니다. 사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옆에 계시다고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엔가 고독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런 고독은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증가하면서 더 그분이 나와 함께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랑이 어떻게 신부를 떠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분을 잊어도 그 분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 분을 떠나도 그 분은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그런 신랑이 정말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구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아파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고 실제로 우리 대신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신랑은 멀리 떨어져있는 우리와 무관한 신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시는 분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눈물 흘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기뻐하고 기뻐합시다. 이것이 그분께서 오늘 바라시는 유일한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우리의 결핍 때문에 오신 하느님>
너무나 부당하고 부끄럽지만 소임으로 수도자 양성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양성책임자로서 역할은 솔직히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수도회 내 '3D업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하느님께서 형제들에게 선물로 주신 성소를 잘 키워나가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동반해 줘야 하는데, 역량이 부족해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그들 어려움이나 하소연을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의무입니다. 혹시라도 자신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취약점들이 무엇인지 늘 눈 여겨 보고 일일이 알려줘야 합니다. 제 코도 석 자인데 너무 괴로운 일이지요. 형제들을 만나면서 자주 듣는 이야기는 그렇지 않아도 높은 스트레스 지수를 더욱 가중시킵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십시오, 진정한 영적 스승이 돼 주십시오. 좀 기다려주십시오. 진한 부성애를 느낄 수 있는 아버지가 돼 주십시오.”
오늘도 한 무리의 형제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눈 끝에 내린 마지막 결론은 부성애였습니다. 제겐 정말 부담스러운 '부성애'란 단어를 머리에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신부님 한 분이 계십니다.
벌써 꽤 오래 전 일이네요. 한번은 제가 초대형 접촉사고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하느님 도우심으로 신체적 피해는 조금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겨우 밖으로 기어 나와서 사고차량들을 바라보니 기가 차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몰던 차는 폐차장으로 직행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멀쩡하던 차를 한 대 '해먹었다'는 데 따른 자책감이 상당하더군요. 수직상승할 자동차 보험수가를 생각하니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겨우 사고수습을 마무리 짓고 잔뜩 주눅 든 얼굴로 터벅터벅 수도원으로 돌아왔습니다. 나갈 때는 분명히 차를 몰고 나갔는데, 들어올 때는 맨몸이니 미안한 생각에 면목이 없었습니다. 원장 신부님께 단단히 혼날 각오를 하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제 생각과는 달리 신부님은 딱 한 말씀만 하시더군요.
"그만하기 정말 다행이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그러면서 주방으로 들어가셔서 저를 위해 라면을 끓이기 시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제 생애에서 정녕 잊혀 지지 않은 순간입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한 부성애를 느끼게 해주신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저는 단단히 다짐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과속하거나 난폭운전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언제나 사람을 먼저 챙기고 사람을 가장 소중히 여기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또 다시 성탄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진한 부성애를 가장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순간입니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들 각자를 위해 인간 세상으로 들어오신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인간 세상에 개입하신 하느님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우리 각자를 구원하기 위해 강생하셨습니다. 오늘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셨기에 기뻐합니다. 죄로 실추되고 손상된 우리 인간성을 다시금 원상으로 회복시켜주실 메시아, 우리 각자의 존귀함을 다시금 일깨워주시는 메시아이십니다. 대림 기간 내내 성탄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오늘 내게 성탄은 무엇인가? 성탄이 내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강생은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의 결핍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의 심각한 결핍이 당신 보시기에 너무도 안타까우셨던 하느님은 당신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의 결핍을 채워주시기 위해 하나의 중대한 결단을 내리셨는데, 그 결단이 바로 성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크신 분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신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와 고통을 나누기 위해, 슬픔을 나누기 위해, 죽음을 나누기 위해, 영원한 생명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아들아, 지금 네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구나. 그러나 안심하여라. 나 역시 고통을 감내하고 있단다. 아들아, 지금 네가 슬픔에 잠겨 있느냐? 나를 바라 보거라. 내 슬픔은 더욱 크단다. 아들아,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느냐? 그래도 안심하여라. 나 역시 단말마의 고통에 신음하고 있단다."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를 향해 순례여정을 걷는 우리에게 역풍은 필수과목이지요. 거센 풍랑과 세파를 거슬러 힘겹게 항해하는 우리 각자에게 용기를 주시고자, 위로를 베푸시고자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세상 역시 ‘하느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집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1.3). 다음 날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도 ‘말씀’으로 만드십니다. 창세기는 계속해서 ‘하느님의 말씀’과 ‘그대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말씀은 하느님의 ‘창조 능력’입니다. 우주를 만드신 ‘위대한 힘’입니다. 그러기에 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세상을 움직이시고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시는 분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묵상해야 할 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에 계십니다. 기도와 성사 생활을 통해 언제라도 가까이 갈 수 있는 모습으로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과 기쁨으로 살다가 당신께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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