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놀라운 교환-사도행전 7장 54-59절

2008. 12. 26. 오전 7:05:41

글자

 

 

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사도행전 7장 54-59절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이 보입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6,8-10; 7,54-59
그 무렵 8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 9 그때에 이른바 해방민들과 키레네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과 킬리키아와 아시아 출신들의 회당에 속한 사람 몇이 나서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10 그러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7,54 그들은 스테파노의 말을 듣고 마음에 화가 치밀어 그에게 이를 갈았다.
55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56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57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58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59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오늘의 복음>

 혼자라고 생각하기에 삶의 지루함을 느낍니다. 누군가를 위하고, 누군가와 함께한다고 생각하면 인생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사는 이에겐 삶은 언제나 ‘변수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 미래는 주님의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앞날을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면 인생길은 ‘꽃길’이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그런 삶이 될는지요? 두려워하지 않는 삶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만치 오는 비를 미리 뛰어가서 맞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쓸데없는 정보를 너무 많이 접합니다. 몰라도 되는 정보를 너무 많이 알기에 불필요한 걱정을 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외칩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일러 주실 것이다.” 성경 말씀을 한 번이라도 체험해 본 사람이라면 사는 것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정보와 뉴스를 접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물질이 많다고 걱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통장에 수십 억 원이 있다고 불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걱정과 불안은 돈과 재물이 좌우하지 않습니다. 믿고 맡기는 마음이 결정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어떤 두려움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기회가 없었다면 이번 성탄 시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믿고 맡기는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성가정(聖家庭)의 비밀 1 - 순종

  성탄 다음 주일을 항상 ‘성가정 대축일’로 지냅니다. 성가정이란 예수, 마리아, 요셉의 가정을 일컫습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굳이 재차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가정이 가장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가정일까요? 오늘부터 3일간 연속으로 ‘성가정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성가정의 비밀을 복음삼덕을 통해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딸아, 만일 네가 남편을 왕처럼 존경한다면 그는 너를 여왕처럼 우대할 것이고, 네가 계집종처럼 처신한다면 남편은 너를 노예처럼 다루고, 만일 네가 너무 자존심을 내세워 그에게 봉사하기를 싫어하면, 그는 힘으로 너를 하녀같이 부릴 것이다. 만일 남편이 친구 집을 방문하러 갈 때는 목욕도 하게 하여 몸치장을 잘해서 보내도록 할 것이고, 남편의 친구가 놀러 올 때는 극진히 대접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남편으로부터 귀여움을 받게 될 것이다. 언제나 가정에 마음을 쓰고 그의 소지품을 귀중히 여겨라. 남편은 기꺼이 네 머리 위에 관을 씌울 것이다.”

  여성 인권주의자가 이 글을 읽으면 왜 여자의 의무만을 강조하는지, 혹은 왜 아내가 남편을 섬겨야 하는지 강한 반감을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남편보다 아내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면 조금은 다를 것입니다. 아내는 ‘안’과 ‘해’가 결합되어 ‘집안의 해(태양)’이란 뜻입니다.   왜 사탄이 아담이 아니라 하와를 먼저 유혹했을까요? 아내가 가정의 핵심이라 하와만 넘어뜨리면 아담은 저절로 넘어질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가정에서의 아내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내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성가정의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는 ‘순종’입니다. ‘순종’은 ‘질서’가 있다는 뜻입니다. 두 사람 이상이 있는 곳에서 질서가 없다면 그 공동체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느님께로부터 시작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삼위일체로 한 몸을 이루심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고,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께 순종하여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하느님 안에서도 순종과 질서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도 질서가 없다면 하나로 일치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가정을 부를 때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이라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에 가장 높고,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에 두 번째로 높으시고, 요셉성인은 비록 가장 훌륭한 성인이기는 하지만 이 두 분보다는 낮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요셉성인이 가장이셨고, 성모님은 아내였고, 예수님은 아들이셨기 때문에 질서 상으로는 요셉성인이 가장 높고, 성모님이 그 다음, 예수님이 마지막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이 있으셨지만 하느님은 성가정의 중요한 모든 결정사항을 요셉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성모님과 혼인해야 할 때도 천사를 요셉에게 보내어 마리아는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한 것이니 마리아와 혼인하라고 하십니다. 또 아기를 낳고 난 후에도 요셉의 꿈에 나타나 빨리 이집트로 피난하라고 일러줍니다. 그리고 헤로데가 죽었으니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라는 지시도 요셉에게 내리십니다. 이는 하느님께서도 세상에서의 가정의 질서를 존중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가정을 이끌어 가시는 뜻을 가장인 요셉성인께 드러내 보이시는 것을 아시고 요셉과 혼인하고, 베들레헴으로 만삭 중에 올라가고, 추운 겨울에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게 하여도 가장에게 절대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으며, 갑자기 집을 버리고 이국땅으로 가자고 할 때도 군말 없이 따랐고, 아기를 성전에서 잃어버렸을 때도 가장에게 아무런 불만도 갖지 않고 아들을 찾았을 때는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걱정하였는지 아느냐?” 하시며 가장인 요셉을 앞에 놓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질서 상으로는 요셉성인이 가장이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하는 법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지만 부모에게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루카복음 2장 51절에도 “예수는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순종하며 사시게 된 이유는 바로 하느님도 인간의 질서를 존중하고 깨뜨리려 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느님의 뜻을 강하게 느낀다면 자녀도 당연히 부모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합니다. 그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성인식이 끝나고 성전에 그대로 남아있어서 부모들이 애를 태우며 찾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성소의 길로 가려고 하는데 부모가 반대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임을 굳게 믿는다면 부모님께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를 제외하고는 항상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자는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따릅니다. 즉, 자신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당신 모든 것을 그에게 주십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모든 것을 받기 때문에 아버지와 같아집니다.   탈무드에서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일 네가 남편을 왕처럼 존경한다면 그는 너를 여왕처럼 우대할 것이고... 남편은 기꺼이 네 머리 위에 관을 씌울 것이다.) 성자께서 아버지께 왕처럼 순종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성자께 당신과 똑 같은 지위에 있도록 관을 씌워주시는 것입니다. 그 관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자가 아버지께 순종함으로써 결국 아버지와 같아지고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아내도 남편에게 순종함으로써 남편과 한 몸을 이룹니다. 순종하는 것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뜻이고 그 사랑으로 서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질서를 무시하고 아내가 남편 위에 서게 될 때 둘은 정말 둘로 갈라져 싸우게 됩니다.   물론 남편도, 요셉 성인이 하느님의 뜻에 절대 순종한 것처럼 자신 위에 하느님을 두어 그 분의 뜻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남편에 순종함으로써 아내와 자녀도 남편에게 순종하면서 동시에 결국 주님의 뜻에 일치하여 살게 됩니다. 남편이 하느님과 하나이기 때문에 온 가족이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한 가정은 같은 영광을 차지하게 됩니다.

남편이 대통령이 되면 아내는 저절로 영부인이 되는 것처럼 가족은 그 질서 안에서 하나 되어 같은 영광을 나누어 받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듯이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신비를 살지 않는다면 온전한 사람이 됨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 한 몸이 되는 신비의 핵심은 바로 ‘순종’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타는 불속에서도 웃음 짓는>


    초세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한창이던 시절, 마르코,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 때의 일입니다. 가르포라는 그리스도교 신자에 대한 화형이 집행되고 있었습니다. 집행인들은 그를 번쩍 들어 타는 불속에 집어던졌습니다.

 

    둘러서 있던 모든 사람들, 너무나 끔찍한 장면 앞에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그러나 가르포는 타는 불속에서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특별한 모습이어서 집행인 가운데 하나가 웃고 있는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너무 기쁩니다. 그래서 웃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는 스테파노 성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마다 손에 큼지막한 돌 하나씩 들고 달려온 살기등등한 수많은 적대자들 앞에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둘러서있던 적대자들은 스테파노를 성 밖으로 끌고 가 돌로 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던진 돌에 한번 맞아본 적 있으십니까? 어린 시절, 다른 동네 아이들과 ‘살벌한’ 눈싸움을 하던 중, 큼지막한 돌에 맞아 잠깐 정신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단 하나의 돌에 피가 철철 흐르고, 기절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스테파노에게 날아온 돌은 한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수십 개, 수백 개였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사형방법입니다. 하나, 하나 맞을 때 마다 극심한 고통에 비명과 신음이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무수한 돌팔매질을 온몸을 향하는 와중에도 스테파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스테파노가 바쳤던 위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바치셨던 예수님 기도와 거의 흡사합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는 예수님 십자가 죽음의 100% 복사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적대자들의 끔찍한 돌팔매로 인해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인 가운데서도 스테파노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원수까지 사랑하신 그 어이없는 모습을 그대로 빼닮은 스테파노였습니다.

 

    순교자들의 죽음,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어떻게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그처럼 당당하게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죽음을 자초할 수 있단 말입니까?

 

    순교자들의 당당한 죽음, 그 이면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을 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뵙듯이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풍요로운 곳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온 몸과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놀라운 교환
 
성탄 바로 다음 날 교회는 왜 성 스테파노 순교 축일을 지낼까?
잔칫집에서 초상집 얘기를 하는 격이 아닙니까?

어제는 성탄 낮 미사를 봉헌하고 글을 쓰고 있는데  제가 늘 틀어놓는 KBS FM의 국악 방송에서 성탄절이라고  박 동진 명창의 예수 전 판소리를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성탄절에 예수 수난 대목을 들려주는 것이지 뭡니까?.
이 사람들이 뭘 몰라서 이런 것인가 보다 생각도 들고  사려가 깊지 못하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오늘 스테파노 축일을 묵상하면서 생각을 하니  터무니없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지상 탄생과 스테파노의 천상 탄생  예수님께서 지상 탄생하심으로  스테파노가 천상 탄생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살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탄생으로 우리가 하늘에 탄생하고  시소의 한 쪽이 내려올 때 시소의 다른 쪽이 오르듯이  예수님의 내려오심으로 우리가 하늘로 올라갑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지상과 천상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낮추심과 올라감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죽으심과 살아남의 교환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심으로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우리가 참여합니다.
 
 
   
                                                     
                                                                    가톨릭성가 286번 / 순교자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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