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 요한 20,2-8
▥ 요한 1서의 시작입니다. 1,1-4
사랑하는 여러분, 1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2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4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8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2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막달레나의 말을 듣자 한순간에 달려갑니다. 그러고는 빈 무덤을 보고 놀랍니다. 환희와 기쁨의 놀람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애정’과 ‘제자들의 열의’를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후에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발현하셨습니다. 무력감에 젖어 있던 그들을 위로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도 오셨습니다. 용기와 힘을 주시려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며칠 남지 않은 금년입니다. 성탄의 은총을 믿고 밝게 걸어가야 합니다. 평화와 기쁨을 만들며 살아야 합니다.
무덤은 언제든 나타납니다. 신앙이 부담스럽다면 ‘무덤의 시작’입니다. ‘삶의 에너지’인 믿음이 ‘삶의 멍에’로 바뀌기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막달레나의 정성과 요한의 열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부담스러운 믿음’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틈나는 대로 성경을 읽으렴. 그런데 특히 필리비 4,19은 네 인생에 크게 도움이 될 테니 꼭 펴서 읽어 보아라.”
오디오를 사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해 속이 뒤틀린 아들은 성경책에 구석에 처박아 둔 채 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오디오를 사달라고 졸랐고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필리비 4,19은 읽어 보았니?”
그러면서 오디오는 절대로 사주지 않는 것입니다. 4년이 지나고 졸업하는 날, 부모가 축하하러 왔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반갑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오디오를 사달라고 해도 사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대학교를 졸업하는 날이니 만큼 들어주겠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오디오를 사달라고 다시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세요.
“필리비 4,19은 읽어 보았니?”
졸업식이 끝난 후 짐을 꾸릴 때 아버지께서 4년 전에 주셨던 포장도 뜯지 않은 성경책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아들은 생각했지요. 과연 필리비 4,19에 무슨 말씀이 있길래, 만나기만 하면 읽어보라고 하셨을까? 그래서 그 부분을 펼쳐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오디오 한 대에 해당하는 가격의 수표가 들어있었습니다.
만약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에 순명해서 곧바로 성경을 펼쳐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4년 전에 이미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눈에 보이는 오디오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만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은총의 선물을 이미 주셨습니다. 문제는 그 은총의 선물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실천만 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을 나의 자그마한 머리에서 나오는 판단으로 인해서 그 선물을 찾지 못하는 것은 물론 원망만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로 알려져 있지요. 그는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을 듣고는 베드로보다도 먼저 무덤에 다다르지요. 신체적인 조건 때문에 빠를 수도 있는 것이지만 표징의 책이라고도 불리는 요한복음의 특징을 보았을 때, 사랑의 열정 때문에 더 빨리 도착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도착 후에 보이는 요한의 행동입니다. 그는 무덤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베드로에게 가장 첫 번째 자리를 내 주었던 것입니다.
위계질서에 대한 특별한 그의 마음을, 그리고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마음을 볼 수가 있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에 순명했던 요한이기에 예수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있었을까요? 그래서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먼저 내세울수록 주님의 선물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감추어진 주님 은총의 선물을 발견할 수 있도록 철저히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Fr.조명연 마태오]
"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독차지>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사도 요한은 12사도 가운데 아주 특별한 인물이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아에 이어 야고보와 함께 일찌감치 예수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아 핵심 사도단의 일원이 됩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요한은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의 각별한 제자, 핵심 브레인, 최측근으로 활동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자주 이 세 제자만 따로 불러 논의를 하셨고, 이들만을 대상으로 한 특별제자교육도 실시하곤 하셨습니다.
부르심을 받던 초기, 아직 세상물이 덜 빠졌던 시기, 이 세 핵심 제자들은 때로 인간적인 마음에 상대방을 경쟁관계로 설정함으로 인해 서로의 관계가 권력다툼 양상으로 치닫곤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누가 높은가" 하는 문제로 싸우다 예수님께 들켜 호되게 야단맞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에게 있어서 인간적인 약점은 상당했었습니다. 성격이 담대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급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천둥의 아들" 이란 별명까지 얻게 됩니다.
그가 얼마나 성격이 과격했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뿐만 아니라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주님의 나라가 서면 요한에게 중책을 맡겨 달라”고 당부하는 것을 봐서 요한 가족이 은근히 정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예수님을 통해서 한몫 잡아보려는 마음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그 모든 약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장점 한 가지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후 요한은 점점 예수님께 빠져 들어 갔고, 조금씩 그분의 정체를 파악해나가면서 완전히 그분께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독차지하려다가 다는 제자들로부터 눈총도 숱하게 받았습니다. 예수님께 완전히 눈이 멀어버렸다고나 할까요.
복음서에 제시된 요한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그가 얼마나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저술한 복음에서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라고 표현한 반면, 베드로나 야고보 사도에 대해서는 그냥 단순하게 베드로, 야고보와 같이 이름만 거명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해서든 보다 예수님 가까이 머물기를 간절히 열망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예수님의 마음에 들어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한평생 노력했던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자주 예수님으로부터 질책을 듣곤 했지만 베드로 이상으로 목숨 바쳐 예수님을 사랑했던 요한이었습니다.
12사도 가운데 유일하게 끝까지 남아서 예수님의 유언을 마무리 짓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던 사도가 요한이었습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사도 요한 축일-사랑하는 만큼
이것을 보고 깨달은 사람은 사랑으로부터 사랑을 받아본 사람, 사랑을 사랑한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아무나 이것을 보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바로 사도 성 요한 같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요한은 주님의 첫 제자입니다.
요한은 타볼산과 해골산을 주님과 함께 올랐던 제잡니다.
그래서 요한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도 보았고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는 연약한 주님도 보았습니다.
요한은 십자가상의 주님 곁에 있었던 유일한 제자이고 주님께서 당신 어머니를 맡기실 수 있었던 친구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티베리아 호수에서 고기잡이 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많은 고기가 잡히는 기적을 행하셨을 때 주님을 알아채고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고 베드로에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다음 다른 모습을 한 예수님을 다른 제자들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는데 요한은 어떻게 알아챌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사랑하는 것만큼 알고 아는 만큼 알아채기 때문입니다.
사랑할수록 그의 본질을 알고 사랑할수록 그의 진면목을 알고
사랑할수록 그의 전부를 알고 사랑할수록 그를 속속들이 알기에 그가 아무리 다른 모습을 하여도 신발 한 짝을 보고도 그임을 알아채고 숨소리로도 그임을 알아채고 말투로도 그임을 알아챕니다.
그래서 요한만이 고기잡이를 지시하시는 분이 주님임을 알아챘을 뿐 아니라 말씀이 주님이심을, 말씀이 사랑이심을, 말씀이 생명이심을 우리에게 전해 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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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정의 비밀 두 번째는 성모님이 평생 동정이라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즉, 요셉성인과 성모님은 평생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성가정을 이루는데 부부관계를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이 왜 중요하냐?” 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올바르지 않은 부부관계로 죄가 들어오고 사랑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양반집 규수가 결혼하지 않고 동정생활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볼 때 용납이 안 되던 때라 주 신부는 또 다른 동정생활을 결심하고 있던 한 젊은이를 떠올려 둘을 연결시켜줍니다. 그가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 요한입니다. 주 신부는 이 둘이 평생 동정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고 결혼을 허락해 줍니다. 두 사람은 남매처럼 지내며 효성을 다해 시부모를 섬겼고 집안의 많은 노복들에게도 애덕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둘이 순교하기 전 함께 4년을 동거하는 동안 유혹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루갈다는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 내외 처음 만나던 날에 서로 수절하기로 맹세하니, 평생 근심이 일시에 풀려 4년 동안을 형제같이 살며, 그 사이 혹독한 유감이 몇 번 있어 대개 열 번이나 무너질 뻔 했사오나, 공정하올 성혈 공로로 계교를 물리쳤나이다.” 이 한 쌍의 부부의 동정생활의 장한 의지를 보호한 힘은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한 사랑이었습니다. 루갈다는 1802년 휘광이에게 자기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 웃옷을 벗고 조용히 머리를 도끼 밑에 놓았습니다. 현대에 동정부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비웃음을 당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이 부부가 동정으로 살았기에 다른 부부들보다 사랑이 덜 했을까요? 아마 육체적 욕망을 승화하여 더 깊은 사랑을 한 부부는 아니었을까요? 자신들의 사랑을 넘어서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제 우리는 부부관계가 정말 부부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것인지 반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부관계를 가질 수 없는 누워있을 수밖에 없는 할머니를 두고 할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다시 태어나도 이 할머니와 혼인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젊은 부부들도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부부관계는 사랑과 자녀를 출산하려는 의도가 있어야 한다고 교회에서 가르칩니다. 만약에 자녀출산의 의도만으로 부부관계를 하라고 한다면 성당에 나오는 신자가 급격히 줄 것입니다. 따라서 부부끼리의 관계는 자녀출산의 의도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라는 가정 하에 죄라고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죄가 아닐까요? 냉철하게 보자면 자녀를 출산하려는 의도 자체가 있더라도 육적인 욕망의 의도가 전혀 섞이지 않을 수 없기에 죄가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모든 자녀들 또한 죄 중에 잉태되게 됩니다. 시편에서도 “나는 죄 중에 태어났고 내 어미가 나를 죄 중에 배었나이다.” (시편 51,5)하지 않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자 자신들의 음부를 나뭇잎으로 가리게 됩니다. 이는 육체를 지니고 살고 있는 이상 성적인 관계가 부끄러운 것이 되어버렸음을 의미합니다. 성욕은 육체를 지니고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지니고 있고 그렇게 원죄가 자녀들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동물들처럼 성욕도 없이 교배시기에만 부부관계를 맺어야 한다면 인류는 벌써 멸종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자녀출산율만 보아도 그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성욕을 주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부부관계에 죄가 섞여 들어오게 되자 부부관계 자체가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본인은 인식하지 못해도 자신을 죄짓게 하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싫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치의 순간이 오히려 분열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고슴도치 부부가 있었습니다. 날이 추워지자 둘은 서로의 몸을 따듯하게 하기 위해 상대에게 다가갔습니다. 다가갈수록 서로의 몸을 녹여줄 수 있었으나 서로 가시에 찔려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것이 부부의 딜레마입니다.
성모님과 요셉성인은 동정부부였지만 우리가 성가정이라 부르는 가정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이는 부부간의 정결함이 두 사람의 사랑을 감소시키기는커녕 더 완전하게 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어떤 부부도 이 두 부부만큼 사랑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모님과 요셉성인은 가장 순결해지심으로써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까지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죄가 없어서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있었고 그래서 완전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고 그 사랑으로 완전히 한 몸이 될 수 있었던 때였습니다. 부부가 다 동정으로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자매처럼 사랑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 육적인 사랑에서 더 높은 사랑으로 가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결혼하면 육체적인 관계만을 상상하게 되는 이 세대에 이런 것들을 쓰는 것 자체가 많은 반감을 일으킬 것은 짐작하지만 믿는 것을 말하지 못한다면 안 되기에 말씀드려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정결’이 성가정에 감추어져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전삼용 (요셉)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