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3-11
사랑하는 여러분, 3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4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6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7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 온 옛 계명입니다. 이 옛 계명은 여러분이 들은 그 말씀입니다. 8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도 또 여러분에게도 참된 사실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이미 참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9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10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11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35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메온을 만납니다. 그는 나이 많은 예언자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시메온은 예수님을 팔에 안고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 이제는 당신 종이 평화로이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눈으로 구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 뵈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할아버지 시메온이 예수님을 안고 있는 모습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욕심이 많아집니다. 그런데 시메온은 달랐습니다.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살아왔기에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사는 것은 이렇듯 사람을 순수하게 합니다.
우리 역시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미구에 맞이할 죽음입니다. ‘빨리 돈을 모으고, 아이들을 혼인시키고 그럴싸한 집도 마련해 줘야 할 터인데! 그러기 전에는 죽어선 안 되는데!’ 이렇게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시메온 할아버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 서간의 첫 말씀은 제가 동의할 수가 없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우리 프란치스칸의 주의주의적(主意主義的)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그래서 하느님의 계명을 잘 알고 있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느님의 계명을 어깁니다.
그 대표가 복음에 나오는 사탄입니다.
그들은 서슴없이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고 얘기하지만 이내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관계를 부정하고 왜 내가 하려는 것에 간섭을 하냐고 하며 자기 좋을 대로 함으로써 계명을 거스릅니다.
그러나 다음 말씀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계명을 거스르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면서도 계명을 거스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하느님과 상관없이 살 수 있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받들며 삽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 온 옛 계명입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한 마디로 자기 형제를 사랑하라는 옛 계명이면서 동시에 새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지킬 때 그는 빛 속에 머물고 그 앞길에 걸림돌이 없지만 어기면 어둠 속에서 살아가며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미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입니다.
색안경을 쓰면 세상이 다 검게 보이듯 미움이 한 번 우리 안에 들어오면 모두가 다 미워집니다.
사람에 따라 누구 한 사람을 더 미워함으로써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미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덜 미워할 뿐이지 미워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빛이 없을 때 어둠이 오듯 사랑이 없을 때 미움이 설치는 것이기에 사랑이 자리하지 않는 한 미움이 모든 것을 밉게 만듭니다.
그래서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미워하지 않으려 애를 쓸 것이 아니라 사랑하려고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랑은 자기 마음을 밝고 훈훈하게 할 뿐 아니라 세상을 밝고 훈훈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다시 사랑하자!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가?
저희 기숙사 문지기 아저씨는 매우 품위가 있어서 책을 읽어도 단테의 신곡 등 고전을 읽고 음악을 들어도 오페라를 듣습니다. 그 분이 오페라를 들으면서 그 내용과 감상법을 설명해 주시지만 전 좀처럼 오페라가 끌리지 않습니다. 제가 노래방 수준이거든요. 어제도 제가 이해한 바로는 ‘노트르담의 꼽추’를 듣고 계셨습니다. 이태리 성악가들이 공연한 테이프였는데 주인공이 노래를 아주 잘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이 주인공은 지금 없다고 했습니다. 자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악가로 최고의 성공을 하고 가질 것은 다 가졌지만 여자와 이별하고 약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우리나라에 유명한 연예인들이나 정치인들도 어려움이 닥칠 때 이겨내지 못하고 많이들 자살한다고 했습니다.
성탄 자정 미사 때 저의 교수신부님은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분이 어렸을 때 독감에 걸렸었는데 이 침대에 누워 있다가 저 침대에 누워 있다가 했다는 것입니다. 침대를 바꾸면 병이 나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할머니는 “침대를 바꾼다고 안에 있는 것이 사라지지는 않아!”하셨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외적인 것을 바꾼다고 내적인 것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서 불평하는 사람은 다른 곳에 가도 불평거리를 찾아냅니다. 세상 모든 것들로 나를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내가 만족 못하고 있는 이유는 어쩌면 나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만을 희망하고 있어서는 아닐까요?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극에 달했을 때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는 사람들과 링컨 대통령이 서로 대화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한 청년이 “이제 미국이 끝장나는 거 아닙니까?”라며 비통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링컨은 청년의 손을 잡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청년시절, 덕망 높은 노인과 가을밤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때 무수한 별똥이 떨어져내려 두려워했더니 노인이 내게 말했습니다. ‘저 무수한 두려움을 바라보지 말고 더 높은 데서 반짝이는 별들을 보게나.’" (디럭스 예화사전) 결국 떨어져 내릴 것들이 아니라 영원히 반짝이는 것들에 시선을 돌려야겠습니다. 세상 지나가는 것들이 아니라 영원한 것들을 희망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시메온의 평생 희망은 메시아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의 희망이야말로 행복한 죽음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희망의 힘으로 살았고 그 희망의 성취로 행복한 죽음을 맞아합니다. 반면에 세상 모든 영예를 얻었던 솔로몬은 이렇게 외칩니다.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설교자의 말이다.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전도 1,1-3) 세상 것들을 희망하면 결국 절망과 허무만 남지만 시메온과 같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 희망을 두면 세상 시련을 이겨 낼 힘을 줍니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
<고통이 때로 은총이라는 깨달음>
전 세계에 수많은 회원들을 파견한 한 수도회의 최고 책임자였던 어떤 신부님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산적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철주야로 뛰어다니시다가 누적된 과로로 인해 쓰러지신 신부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10년 이상을 꼬박 침상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투병생활 초기의 답답함과 불편함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전 세계에 수많은 회원들의 장상으로서 그가 그간 해왔던 많은 역할들-계속되던 중요한 회의, 방문, 여행, 접견, 강연, 저술 등등-에서 순식간에 물러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전 세계를 주름잡던 분, 30분, 1시간 단위로 빡빡하게 하루 스케줄이 잡혀있어서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 쓰던 분이셨는데, 이제 몇 평 안 되는 병실에 갖혀 하루 온종일을 천장만 바라보고 지내야하니 그 답답함이 오죽 했겠습니까?
아무리 기를 써도 혼자 힘으로는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기 힘드니 그 비참함이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 못 견딜 일은 식사수발을 비롯한 모든 일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니, 참으로 못할 일이었습니다. 차라리 죽고만 싶었겠지요.
그러나 워낙 영적으로 사셨던 분이셨기에, 만사에 있어서 늘 주님의 뜻을 먼저 헤아리던 분이셨기에 오래지 않아 한 ‘깨달음’에 도달하셨고, 마침내 이런 고백을 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장상으로 일할 당시 나는 늘 하느님 품 안에 푹 잠겨 살고 싶었는데, 바로 지금 이 병상에서 내가 그 체험을 하고 있으니 하느님의 뜻은 신비롭기만 합니다.”
그 후로 신부님은 못 다한 활동 사도직을 병실 사도직으로 보충해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루 온 종일을 후배 신부님들을 위한 기도로 할애하셨습니다. 환한 얼굴로 찾아오는 모든 방문객들을 맞이하면서 ‘고통도 때로 은총’ 이란 사실을 온몸으로 전해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고통과 십자가가 때로 영혼에 크나큰 약이 될 수 있음을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온 몸으로 알려주기 시작하셨습니다.
신부님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서도 평화롭고 기쁜 신부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신부님은 병고와 노년이라는 크나큰 십자가 앞에서도 진정 행복한 나날을 지내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반드시 도달해야할 한 가지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야말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가장 큰 은총이란 사실입니다. 고통은 쇄신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진리입니다. 죽음 역시 우리 일생을 잘 정리하고 영원한 하느님의 품안에 완전히 잠기는 일생일대 가장 큰 축복이라는 진리입니다. 이 깨달음이야말로 깨달음 중에 가장 큰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도 십자가도 결국 은총이라는 그 깨달음이 빨리 이루어지면 질수록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다 풍요로워지고 자유로워지리라 확신합니다.
지난 시절, 제게 다가왔던 수많은 십자가를 떠올려봅니다. 참으로 괴로운 것이었지만, 그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내가 얼마나 더 교만하게 살아가겠는가, 그때 그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내가 얼마나 안하무인격으로 살아가겠는가 생각하며 주님께서 주신 제 십자가에 감사를 표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그 모든 실패와 좌절, 고통과 십자가야말로 우리를 보다 기도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하느님의 손길임을 저는 굳게 믿습니다.
우리가 수시로 체험하는 갖은 불행한 사건들은 우리를 보다 영적인 인간, 기도하는 인간으로 거듭나도록 하기 위한 하느님의 선물임을 자각하는 오늘 하루가 되길 빕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메온은 역시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겪어온 고난의 세월이 하느님의 손길임을 굳게 믿었기에, 모진 시련 속에서도 성전 주변을 떠나지 않고 기도 안에서 꾸준한 영적 삶을 영위했습니다. 그 결과 시메온은 구세주 하느님을 자신의 두 팔에 안는 영광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사천년간 고대했던 이스라엘의 구원이 성취 되는 순간을 목격한 것입니다.
십자가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진리, 십자가는 구원에로 건너가는 사다리라는 진리를 깨달은 시메온이었기에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영광이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