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루카 2,16-21

2009. 1. 1. 오전 9:35:36

글자

 

1월 1일 목요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루카 2,16-21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6,22-27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4,4-7
형제 여러분, 4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5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6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7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가 차서,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6-21
그때에 목자들은 베들레헴에 16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17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18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19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0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21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오늘의 묵상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모든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나 기억하고 싶어 합니다. 마리아께서도 이렇게 어머니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러 가십니다. ‘레위기’의 명에 따라 할례 받으러 가신 것입니다. 율법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평범한 ‘아기 엄마’로서의 삶입니다. 마리아께서는 평생을 그렇게 사셨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특별한 삶’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답게’ 사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이렇게 해서 생겨났습니다.
어머니는 누구나 위대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답게 살지 못하면 위대함은 반감됩니다. 때로는 지탄을 받습니다. 모든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 참고 인내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어머니다운’ 모습입니다.
어머니의 삶이 건강하면 그 힘과 은총은 자녀에게 전달됩니다. 하늘의 기운이 그들에게 닿는 것이지요. 위대한 어머니는 이렇게 해서 등장합니다. 마리아께서는 이런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특별한 삶’을 사셨기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천주의 모친 성모 대축일 - 구체적인 사랑

  비가 많이 내리던 날 한 자매님이 비에 젖어 저와 상담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집무실에 들어가 상담을 하는데 자신 안에는 마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길을 지나는데 마귀가 이 성당에 들어가 보좌신부와 상담을 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분의 거주지를 잘못 말했더니 그 분의 얼굴과 목소리가 갑자기 무섭게 변하면서 자신이 언제 그 곳에 산다고 했냐고 겁을 주는 것입니다. 비도 오고 작은 방에 둘이 있는데 그렇게 변하는 모습을 보니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러나 겁먹은 것을 보여주어서는 안 되었기에 오히려 제가 야단을 쳤습니다. “자매님은 한 번 들은 걸 다 기억하세요?” 그랬더니 다시 수그러들었습니다.

제 예상대로 그 자매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이 있었지만 하느님과 만나지 못하고 그러다 결혼도 못 하고 마흔이 다 되었습니다. 보험 설계사를 하고 돈도 어느 정도 번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 그 자매는 남자와 온전한 관계를 한 번도 맺은 적이 없었습니다.   또 그 자매는 마귀와 밤에 몇 번 육체적인 관계를 맺은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모르지만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한 노처녀의 외로운 삶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온전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것들과도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인간의 구조가 관계를 맺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남자만으로 혹은 여자만으로는 온전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게 될 때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 안에서 관계를 맺어 한 몸이 되어야만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본성이 사랑이시고 사랑은 혼자 할 수 없기에 하느님도 본성상 그분 안에서 관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분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들도 하나 되는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 하느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서부터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기도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내가 하느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는데 사실은 방해가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을 되도록 삼가고 내 안에서 주님과 만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습니다. 정말 꽃과 나무와 이야기도 나눌 정도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잘못 가고 있었습니다. 자연이 나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내가 하느님은 물론 인간과도 온전한 관계를 이루고 있지 못했기에 발생하는 현상이었습니다. 즉, 내 자신이 내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위의 자매가 마귀와 관계를 맺게 된 것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분열되어 외로움을 극복해보려는 몸부림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주님과 일치하려고 기도만 하려고 했던 것은 어쩌면 우리 천주교 전통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관계보다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전통이 있어서 성인들의 성화를 보더라도 사람과 있는 장면보다는 홀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그림밖에는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먼저 완성하고 그 다음에 인간관계를 맺어야 옳은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사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반대입니다. 구체적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는 더 불가능해 집니다. 사도 요한도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합니다.  그 이후부터는 기도의 목적을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맺는 것보다는 보이는 사람과 더 나은 관계를 위한 목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기도와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이 겹치면 기도를 포기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지금은 아빌라의 데레사가 왜 성당에만 앉아있던 자매에게 기도를 그만하도록 심부름을 시켰는지 이해가 갑니다.

  오늘 천주의 모친 성모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 이유는 성자께 당신의 몸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몸만 주었는데 왜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를까요? 예수의 어머니, 혹은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될 수 있을 지라도 하느님을 나으신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치 벽돌처럼 신성과 인성이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어 더 이상 나뉠 수 없게 하나 된 분입니다. 마치 사제가 미사 때 포도주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그 물이 포도주에 섞여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하여 나뉠 수 없기 때문에 성모님을 단지 인성의 어머니라 불러선 안 되고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그리스도, 즉 하느님의 어머니라 불러도 틀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예수님은 인간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그 인간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십니다. 인간 예수님과 성자는 다른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즉 보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신성까지도 사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성자를 사랑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 사랑하는 방법은 역사적으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구체적인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하느님을 찬미하고 오래 기도하는 것보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나를 사랑하셨는지 성경부터 읽고 묵상하고 배우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예수님의 인성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결국엔 신성까지 사랑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추상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이라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도록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예수님만 찬미하고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도 오랜 시간 예수님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한 거지가 ‘목마르다!’하는 모습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항상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을 먼저 사랑한다고 해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왔다고 하시면서도 특별히 어머니, 요셉, 열두 사도, 그 중에서도 세 명, 칠십이 제자, 여자들 몇몇, 부활하셔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시는 등 다만 얼마 안 되는 사람들과만 구체적인 관계를 맺고 사랑을 나누셨습니다.

또 그 구체적인 관계는 영원히 지속됩니다. 즉, 어머니는 예수님께서 천상에 가셔서도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체적인 관계와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이 이것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소홀하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이 구체적인 관계를 통해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피자처럼 나뉘는 것이 아니라 빛처럼 퍼지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곧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꽃은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꽃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꽃을 사랑한다고 하느님을 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름다운 꽃을 통해서 그 꽃에게 생명과 아름다움을 넣어주신 온전한 아름다움이신 하느님을 더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올바른 관계와 올바른 사랑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입니다. 처음부터 성체를 영하면서 그 분과 하나 되는 행복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구체적인 관계로부터 사랑과 일치의 신비를 알아간다면 그리스도와의 일치도 더욱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천주의 모친 대축일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음이 신학적으로 결정된 날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중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이란 뜻입니다. 즉, 인간관계 안에서의 구체적인 사랑이 영원한 사랑으로 가는 길이란 뜻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지만 사랑은 환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남자와 여자, 가족, 친구,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새 해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사람, 단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사랑하도록 결심합시다. 한 사람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다면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또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1월 1일-첫날에

기축 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소의 해가 밝았다는 뜻이네요.  우습지 않습니까?
신앙인인 우리가 이런 말을 쓴다는 것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표현해야?  하느님께서 주신 새 해가 밝았다 함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소의 해, 닭의 해가 아니고  늘 언제나 하느님의 해입니다.

이 하느님의 해에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까요?  사뭇 궁금하지 않습니까?  올 한 해가 어떤 한 해가 될지 저는 사뭇 궁금합니다.
설레지 않습니까?
전에는 새해가 되어도 담담했는데 올해는 담담하면서도 왠지 설렘도 있습니다.

예견되는 올해의 상황은 비관적입니다.
무엇보다도 경제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힘의 정치로 계속 가면  정치적으로도 올 봄 큰 저항이 다시 일어날 것 같습니다.
사회적으로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양극화는 더 심해지고  보수와 진보 사이에 갈등도 심해질 것 같습니다.
관구회의 후 새로운 소임과 새로운 환경도 결코 녹녹치 않을 것입니다.
올해는 또 어떤 형제와 살지 모르지만 힘든 형제도 있을 것입니다.
예견되는 외적 상황이 이처럼 모두 비관적인데  새해가 어떻게 될지 궁금할 것은 무엇이며   설렌다는 것은 더더욱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도전하는 자의 설렘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믿는 자의 설렘입니다.

요즘 와서 저는 등산 중독, 마라톤 중독에 빠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많이 하지는 못하고,  마라톤의 경우 지난 해 한 번밖에 뛰지 못했지만
올해 다시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것도 42,195Km를 완주하고 싶습니다.

마라톤을 뛸 때 보면 출발을 앞두고 몸을 풀 때  모두 약간은 들뜨고 설레는 표정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끔찍하게 힘든 상황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앉아서 죽지 않고 나가서 맞이한다는 설렘이고  그 어려움과 고통을 마침내는 이겨낼 것이라는 설렘입니다.
결국 승리하는 자의 기쁨에 대한 설렘입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나의 승리가 아닙니다.
나는 그저 하느님을 믿고   나에게 닥칠 그 무엇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는   도전적 의지를 가질 뿐입니다.  승리의 나머지 몫은 하느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힘든 것을 이겨낼 힘을 주실 것이고  하느님께서 그 참혹한 고통을 감수할 사랑을 주실 것이고   하느님께서 그 모든 걸림돌들을 디딤돌로 바꾸실 것입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묵상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나   힘들지 않고 오르는 것은 없습니다.
힘들지 않고 힘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고통 없이 사랑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걸림돌이라고 치워버리면 디딤돌도 없습니다.  치워버리지 말고 딛고 올라서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해야 할 것은  힘들다고 치워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힘드니 힘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오르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새해의 빛나는 이아침에>


   새해의 빛나는 아침을 다시금 맞이한 형제자매님들께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 중에 하나가 매일 주어지는 우리의 하루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또 다시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자비의 표시로 새해 새 아침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한해 우리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면서, 침묵하면서, 감사하면서, 그렇게 엮어 가면 좋겠습니다.

 

   인생의 역풍을 만나 허우적거릴 때, 문득 삶이 텅 비어 있다고 느끼는 순간, 혹시라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누군가가 계십니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훈훈해지는 사람, 떠올리기만 해도 감사한 사람, 존재 자체로 행복을 주는 사람, 오늘 같은 새해 첫날 찾아뵙지 못하는 것이 늘 송구스러운 사람, 그런 사람이 있는 분들은 삶이 훨씬 풍요롭습니다. 삶이 한결 여유롭습니다.

 

   고맙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는 신자가 됨과 동시에 그런 고마운 분이 자동으로 한분 생깁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극심한 고통 한가운데서 가장 먼저 찾게 되는 분, 우리가 그분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어느새 달려와서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건네시는 분,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으로 인해 산전수전을 다 겪으셨던 분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한 평생 가슴에 깊은 통증을 느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성모님이셨기에 또 다른 아들들인 가슴 아픈 우리들,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탄식하는 우리들의 따뜻한 위로자로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아들 예수님 일생에 여백 같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 탄생 순간부터 갈바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성모님은 언제나 조용히 예수님 뒤에 서 계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커지시도록 한없이 작아지셨던 분, 늘 예수님 그늘에 서계셨던 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평생 쓸쓸하셨던 분이 성모님이셨습니다.

 

   성모님에게 아들 예수님은 한평생에 걸친 '연구 대상'이었습니다.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나는 소년 예수를 바라보면서 성모님은 무척 대견스럽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했을 것입니다. 마치도 신비로운 세계, 하늘나라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일을 마음에 조용히 간직하셨습니다.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기도에 기도를 거듭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인생여정은 칠흑과도 같은 암흑을 홀로 걷는 것과도 같은 힘겨운 삶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인생 안에 펼쳐진 수많은 사건들,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 겪었던 셀 수 없는 고초들을 거의 예견하지 못하셨습니다. 많은 경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어떻게 자신의 삶이 전개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주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신앙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수많은 이해하지 못할 사건들 앞에서 힘들다는 소리 한번 하지 않으시고 그저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꾸준히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낳은 아이, 자신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 애지중지 키웠던 소년 예수를 향한 인간적 사랑이 어찌 마리아에게 없었겠습니까? 그런 인간적 생각이 스며들 때마다 성모님은 다시 한 번 자신을 말끔히 비워야만 했습니다. 아쉽고도 아쉽지만 눈물을 머금고 또 다시 자신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또 다시 따뜻한 인간 세계 둥지를 떠나 거칠고도 황량한 신앙의 사막을 여행해야만 했습니다.


   부족했던 우리의 지난 한해, 이제 하느님께서 모두 거두어가셨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다시 새로운 한 해란 과분한 은총 앞에 서있습니다. 정녕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인 새해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가장 큰 표시인 은총의 새해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다시 한 번 힘찬 항해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가톨릭성가 239번 / 거룩한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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