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한 1, 19-28

2009. 1. 2. 오전 9:23:29

글자

1월 2일 금요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요한 1, 19-28

제1독서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22-28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아드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라야 아버지도 모십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속이는 자들과 관련하여 이 글을 씁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 

<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9-28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오늘의 묵상 

많은 사람들은 불확실한 ‘데이터’로 남을 비판합니다. 빈약한 자료로 이웃을 판단합니다. 그러면서도 잘 알고 있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상대가 알려진 사람이라면 더욱 심합니다. ‘잘 모른다는 말’은 여간해서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알게 된 정보이건만 내색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갖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많이 알고 있는 이들이 자신을 낮춥니다. 어설프게 알고 있는 이들은 고개를 듭니다.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못 알아준다고 서운해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습니다. 알이 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설익은 벼’는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숙이고 싶어도 못 숙입니다. 알이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보여 주었습니다. 평소 단식하며 절제했던 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르면 ‘한 발자국’ 물러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송구스러운 분’이 없는지요? 그런 분을 알고 있는 이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 의미가 되는 주님과 우리**

오늘 요한의 편지에는 머문다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 그러 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중에서도 세 번째 말씀,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라는 말씀이  따듯하니 저를 잡아당깁니다.
어렸을 때 요즘같이 추운 날  밖에 나가 손이 꽁꽁 얼어 들어오면 그 언 손을 녹이라고
어머니께서 웃옷을 열고 당신의 가슴과 겨드랑이에 초대하는 듯합니다.
또는 이렇게 추운데 싸돌아다니지 말고 따듯한 곳에 가만히 있으라고  당신 아랫목에로 초대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 안에 머물라는 말은  싸돌아다니지 말고 머물라는 뜻보다는  다른 곳에 머물지 말고 하느님께 머물라는 뜻이겠지요.
더 명확하게 얘기하면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에 머물지 말고  하느님을 더 사랑하여 하느님 안에 머물라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거짓된 세상을 쫓지 말고  진리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라는 뜻이겠지요.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 머물음은 세상을 떠남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영원한 만족을 줄 것 같지만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기에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영원한 생명과 만족을 줄 것처럼 참 생명이요 만족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를 잡아끌어도 그것은 거짓이니  우리는 세상을 떠나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을 완전히 떠나 하느님 사랑에 온전히 머무는 사람은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이란 이제 더 이상 만족이 아니고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는 광야와도 같은 곳이지만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은 생명을 주는 주님의 참된 말씀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실어 나를 도구로  소리인 우리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말씀이신 분이 없으시면 우리 소리들은 아무 의미도 없고  심지어 헛소리, 개소리에 불과한 것들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소리인 우리를 당신 말씀의 전달자로 의미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은 우리의 의미요,  우리는 그분의 의미입니다.
 

 - 확신의 힘-

  간디가 영국의 압제와 폭력에 저항하는 평화 행진을 조직하고 선두에 섰을 때 영국의 한 라디오 방송 기자가 옆을 따라오며 물었습니다.   “당신의 노력은 사실상 성공할 희망이 1%도 안돼 보이는데 어째서 이런 고생스러운 긴 행진을 하십니까?”  간디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습니다.   “반드시 성공할 날이 올 겁니다. 진리가 우리 편인데 진리가 졌다는 역사를 보았습니까?” (디럭스 예화사전)

인류 역사상 큰일을 이루어낸 사람치고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운전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운전을 할 때 초행길과 자주 다닌 길을 운전할 때는 확실히 차이가 납니다. 자주 다니던 길은 길도 잘 알 뿐 아니라 어디가 위험한지도 다 알기 때문에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행길을 갈 때는 항상 돌발 상황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속도를 줄이기 조심조심 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마찬가지로 삶에서도 자신이 가야하는 길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거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큰일을 이루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감에 있어서 사람을 설득 할 때도 내가 먼저 말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굳은 확신이 없다면 상대를 설득시키는 것은 이미 물 건너가고 맙니다.   두 사람이 등산을 갔다가 산 속에서 큰비를 만나 길을 잃고 갇혀버렸습니다. 한 사람은 겁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한 사람은 태연히 기도하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습니다.   “당신은 이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을 찾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소?”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바람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을 감고 기도하면 느낄 수가 있어요.”   아직도 못 미더워하는 사람에게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당신은 불안에 떨고 있지만 난 지금도 마음이 평안해요.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소?” (디럭스 예화사전)  내가 먼저 확실한 믿음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는커녕 다른 사람에게 설득당하기 쉽지만 확신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습니다. 신앙 면에서도 ‘굳은 확신’은 절대적인 가치를 드러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사람들을 보내어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요?”하고 묻게 합니다. 요한은 그들의 의도를 깨닫고 바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자신은 엘리야도, 구약에 예언되어있는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리고는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슨 사명을 띠고 세상에 태어났는지에 대한 굳은 확신을 지닌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포함하여 성모님, 혹은 모든 성인들이 결국 그런 소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됩니다.

그러나 과연 사람들이 우리 자신에게 “당신은 누구요?” 혹은 “당신은 왜 사는 것이요?”라고 묻는다면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가 누구이고 어떠한 사명을 띠고 태어났는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요즘 운동을 테니스를 하는데, 공을 받아칠 때 여기로 보낼까, 저기로 보낼까 고민하다보면 결국 이도저도 아니게 공을 치게 되어서 상대편에 걸리거나 엄한대로 날아가기 일쑤입니다. 따라서 오는 공을 보면서 미리 보낼 방향을 정확히 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힘 있게 칠 수 있습니다.   고민하는 것이 좋을 때도 있지만 확신을 가져야 할 것에 고민만 하고 있으면 시간만 지나버리고 남는 것이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살고자 원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확신과 힘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론이요, 세례자 요한처럼 당신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우리에게도 주십사고 청하도록 합시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광야에서>


    당시 세례자 요한이 벌인 세례갱신운동은 백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던지는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집중했습니다. 또 열광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례자 요한이 보여주었던 청빈한 생활, 말과 행동의 조화, 호소력 있는 외침,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예언자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세례자 요한에게 홀딱 반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은 날이 갈수록 불어나기만 했습니다.  군중들 사이에서 이런 말조차 퍼져나갔습니다.

 

  “혹시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그 정도 인물에다, 성품에다, 정직함에다, 탁월한 언변… 아마도 가능성이 농후할거야”

 

   사람들의 초점이 온통 세례자 요한에게 쏠리다보니 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찬밥신세가 된 사람들, 갑자기 파리 날리게 된 유다 지도층 인사들, 유다 최고의회 사람들은 은근히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두려움도 느껴졌습니다. ‘혹시라도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라면 우린 어떻게 되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줄을 설려면 확실히 서야지’ 하는 마음에 세례자 요한이 정말 메시아인지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세례자 요한의 메시아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 사절을 보낸 것입니다.

 

   조사관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에게나, 예수님에게나, 그 누군가에게 줄을 서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유다인들에게나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그간 세례자 요한의 위치나 입지는 자신도 모르게 아주 높이 올라가 있었습니다. 추앙과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올라가 있었습니다. 스스로도 무척 부담스러웠겠습니다. 본인은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 메시아가 아니라면 적어도 엘리야 정도 되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단 한 번의 단답식 대답으로 지금까지 자기도 모르게 쌓아올려진, 그리고 꽤나 부풀려진 자신을 일거에 허물어트립니다.“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 엘리야도 아니다.” “예언자도 아니다.” 사람들은 조급한 마음에 재차 묻습니다.  "렇다면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겸손하게도 세례자 요한은 솔직히 자신의 신분을 드러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신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뒤에 오실 메시아에 비교하면 광야에 떠도는 소리, 허공에 맴돌다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절대로 그리스도가 아니요, 단지 그리스도에 앞서서 파견된 ‘소리와도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잘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본의 아니게 사람들로부터 집중적인 시선을 받았지만 그 어떤 환상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스스로를 향해 주인공이 절대로 아님을 명백히 밝히면서 주인공은 오직 예수님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요한이 조금이라도 덕이 덜 닦였더라면, 준비가 좀 덜되었더라면 군중들의 환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덜 닦이고 덜 준비된 수도자나 성직자들이 자신의 삶을 그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따라 사람들의 시선집중을 뒤로 하고 다시금 황량한 광야로 나아가는 세례자 요한의 쓸쓸한 뒷모습이 정말 멋있어 보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광야,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오직 ‘광야에 메아리치는 소리’ 역할에 만족하는 세례자 요한의 바람 같은 삶의 모습이 눈물겹도록 존경스럽습니다.

  

                

                                              
                                                          가톨릭성가 20번 / 어두움을 밝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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