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4일 주님 공현 대축일 - 마태오 2,1-12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0,1-6
예루살렘아, 1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2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3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4 네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아라. 그들이 모두 모여 네게로 온다. 너의 아들들이 먼 곳에서 오고, 너의 딸들이 팔에 안겨 온다.
5 그때 이것을 보는 너는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너의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리라. 바다의 보화가 너에게로 흘러들고, 민족들의 재물이 너에게로 들어온다. 6 낙타 무리가 너를 덮고, 미디안과 에파의 수낙타들이 너를 덮으리라. 그들은 모두 스바에서 오면서 금과 유향을 가져와, 주님께서 찬미받으실 일들을 알리리라.
◎ 주님, 세상 모든 민족들이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 주 하느님, 주님의 공정을 임금에게, 주님의 정의를 왕자에게 베푸소서. 그가 주님의 백성을 정의로, 주님의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통치하게 하소서. ◎
○ 그의 시대에 정의가, 큰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게 하소서. ◎
○ 타르시스와 섬나라 임금들이 예물을 가져오고, 세바와 스바의 임금들이 조공을 바치게 하소서. 모든 임금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모든 민족들이 그를 섬기게 하소서. ◎
○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그는 약한 이와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3,2.3ㄴ.5-6
형제 여러분, 2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나에게 주신 은총의 직무를 여러분은 이미 들었을 줄 압니다. 3 나는 계시를 통하여 그 신비를 알게 되었습니다. 5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6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2
1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4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5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6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7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9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11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하지만 별이 있습니다. 박사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했던 별입니다. 그들을 인도했듯이 우리도 인도할 것입니다. 어느 날 ‘예기치 않았던 사람’이 나타납니다. ‘뜻하지 않았던 만남’을 체험합니다. 그리하여 삶의 활력을 발견합니다. 믿음의 기쁨을 되찾는 계기를 만듭니다. 박사들을 인도했던 별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치는 생활’입니다. 동방 박사들처럼 예물을 드리는 일입니다. 첫 예물은 희생입니다. 두 번째는 인내입니다. 세 번째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희생과 인내와 감사를 지니면 아무리 ‘헤로데 같은’ 유혹자를 만나더라도 잘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공평을 원하면 늘 상처 받습니다. 공평한 세상은 ‘주님의 나라’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금년에도 많은 불공평을 체험할 것입니다. ‘헤로데’와의 만남입니다. 그렇더라도 좌절해선 안 됩니다. 별의 인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동방 박사의 한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 - 주님의 초대와 그 합당한 응답
유럽에서 공부하는 저희 교구 사제 신학생들이 이번 연말연시를 독일에서 함께 했습니다. 나눔 주제 중 가장 핵심적이었던 것은 바로 ‘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관계에 있어서 서로를 솔직하게 열어 보이는 것이 먼저 선행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각자 서로에게 숨기고 있는 것들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다 털어놓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이만큼, 어떤 사람에겐 더 많이 내 자신을 열어 보입니다. 이는 열려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경솔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관계 맺기 위해 솔직히 다 열어 보이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상대를 보며 어느 정도는 차별을 둡니다. 사실 그 차이가 바로 관계의 깊이를 말해줍니다. 친한 친구에게 어떤 개인적인 이야기를 솔직히 이야기 했는데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발설해 버렸을 때 그 사람에겐 더 이상 신뢰가 가지 않고 숨겨야 할 것은 숨기게 됩니다. 이는 솔직한 사람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상대가 그만한 것들을 알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각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지만 경솔하게 누구에게나 모든 것을 똑같이 다 열어 보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를 들어 최후의 만찬 때에 누가 배반할 것인지를 사도들이 알고 싶어 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오직 자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던 요한에게만 알려주셨습니다. 만약 모든 사도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셨다면 그 사도들이 유다를 어떻게 했을 것이고 그렇게 모두 죄로 떨어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만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 가까이 있었기에 비밀을 그에게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 가까워질수록 그분은 당신의 비밀을 더 드러내 보이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다른 사도들보다도 요한과 더 깊은 관계를 맺고 계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 차별은 예수님 탓이 아닙니다. 요한만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다른 사도들의 탓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태어나셔서도 모두에게 당신 자신을 똑같이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당신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성모님과 요셉성인, 그리고 목동들, 또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 등에게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합당한 사람에게만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이시고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기를 원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멀리 동방박사들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당신께로 이끄신 방법은 하늘의 별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왜 모두가 볼 수 있는 하늘의 별을 통해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끄시지만 어떤 사람은 그 빛을 따라올 줄 알고 또 어떤 사람은 그 빛에 관심조차 없을까요? 우리 모두도 빛을 따라가며 그리스도를 만나는 여정에 있습니다. 과연 어떤 마음자세를 지녀야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지 오늘 동방박사들을 통하여 세 가지로 간추려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이들은 영원한 것을 ‘희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것을 추구했다면 그렇게 쓸데없이 하늘만 쳐다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참 진리를 추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보던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이었습니다. 별이 그들에게만 보인 것이 아니었겠지만 그들만이 그 별의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겐 대수롭지 않은 변화일지라도 그들에겐 진리로 이끄는 참 빛이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희망하고 있었는지는 그들이 준비한 선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했습니다. 황금은 제일 귀한 금속으로써 왕이나 하느님께 드리기에 적당합니다. 즉, 세상에 왕이 많지만 그것이 아닌 영원한 왕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유향은 자신을 태움으로써 악취를 중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즉,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 죄의 악취를 중화시킬 구원자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몰약은 죽은 사람에게 발라 부패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미 새로 오실 영원한 임금이 세상의 죄를 씻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죽어야 할 것까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운명을 지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것에 희망을 두는 사람에게 당신의 빛줄기를 던지십니다. 그러나 세상 것에 집착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늘을 볼 여유가 없어 예수님이 던지신 빛을 보지 못하고 맙니다.
둘째는 같은 진리를 바라보며 ‘함께 걸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들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모여서 함께 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서로 다르게 출발한 이들을 한 데 모으셨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이 공동체가 교회이고 작게는 수도회, 혹은 여러 단체, 또 가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개인적으로 왔다면 모두가 예수님을 찾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함께 모여 있었기 때문에 별이 사라졌을 때 헤로데에게 갈 용기도 있었고 함께 예수님을 뵐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영원한 것에 뜻을 두는 이들은 교회 안에 한데 모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만이 예수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과 떨어져 혼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서로 같은 곳을 보며 시기와 질투 없이 ‘함께’ 걸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이름으로 둘이나 셋 이상에 모인 곳에 당신도 함께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분명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홀로 당신께 오는 것보다 ‘함께’ 오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는 뜻입니다.
셋째, 이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광부가 금맥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더 귀한 영원한 진리를 만나기가 그리 쉬울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믿고 따라왔던 인도자별이 사라지자 그들은 실망하고 포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겸손하게 사람들에게 물어볼 줄 알았습니다. 비웃음을 살 수도 있었고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참다운 진리를 확신했고 그것을 위해 겪는 시련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겸손했고 어떠한 어려움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작심삼일의 정신으로는 절대로 영원한 진리를 만날 수 없습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습니다. 매일 5분만 성경을 읽어도 평생 신구약 10번은 통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성경을 통독하지 못한 신자들이 많습니다. ‘꾸준함’만 있으면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을 바라고, 사람들과 관계 맺을 줄 알며, 포기하지 않는 꾸준함을 지녔던 동방박사들은 먼 곳에서 살았음에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주님공현이란 주님께서 공적으로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것은 ‘관계’맺자는 초대입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동방박사들처럼 주님의 초대에 합당한 자세들을 지니고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례 때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보이심,
가나 촌의 혼인 잔치에서 첫 번째 기적으로 능력을 드러내보이심,
오늘 예수님께서 삼왕에게 당신을 보여주심을 기념합니다.
그런데 오늘 아기 예수의 드러내심은 어른 예수의 드러내심과 사뭇 다릅니다.
어른 예수님께서는 장엄하게 드러나십니다. 세례를 받으시면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장엄하게 드러나고 가나 촌 잔치에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큰 능력이 드러납니다. 이에 비해 아기 예수는 장엄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함은 물론 스스로 드러나지도 못하십니다. 삼왕이 찾아왔기에 아기 예수님은 당신을 보여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실 능력이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삼왕처럼 찾아나서는 사람에게만 당신을 보여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기 예수를 보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찾아나서야 합니다.
찾아 나서지 않는 사람은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 자기 삶에 안주하는 사람은 볼 수 없고 새 해가 되어도 전에 살던 대로 살려는 사람은 볼 수 없으며 예수님이 태어나셨어도 상관없이 살려는 사람, 즉 예수님이 없어도 아무 상관없는 사람은 볼 수 없습니다.
성탄 날 새벽, 이 날은 아침 기도를 늦게 하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저는 그 시간까지 혼자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 7시가 되면 저희 집 옆 공사장은 어김없이 국민 체조를 하고 같이 구호를 외치고는 일을 시작하는데 그 날도 혼자 묵상을 하던 중 그 소리를 듣고서 문득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는데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이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 가정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아이가 태어나는 날 다른 일 제쳐놓고 아기 보러 갑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아기 중심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아이의 탄생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은 아기가 탄생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고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돌보지 않을 것이며 돌보지 않으니 그 아이는 결국 죽고 말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되고 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기를 찾아 나서도 아기 예수를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찾아 가는 길이 험난하기 때문입니다. 인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기 예수를 보기 위해서는 두 번째로 좋은 인도자를 만나야 합니다. 삼왕을 아기 예수께로 인도했던 별과 같은 인도자를 만나야 합니다.
진정 캄캄한 밤에는 별이 필요합니다. 요즘같이 어려운 때에도 희망을 주는 별이 필요합니다. IMF의 어려운 때에는 박 찬호라는 야구 스타가 국민에게 희망을 줬고 요즘은 김 연아 같은 빙상 스타가 희망을 줍니다.
별이 빛나는 것은 어둡기 때문이듯 이런 스타들이 우리의 큰 희망이 되는 것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들은 얘기인데 김 연아 선수가 세례를 받은 다음에는 경기를 하러 나올 때 성호경으로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는 스타가 하느님을 향하여 기도드리니 스타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바라보겠지요.
이런 스포츠 스타들도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바라보게 하기에 필요하지만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하는 진정한 영적 스타(Spiritual Star)가 필요합니다.
스포츠 스타를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이런 분들을 바라봐야 하고 이들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대중적 인기를 쫓아 몰려다니지 말고 우리를 진정 주님께로 인도해줄
영적인 스승을 우리는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가 이런 영적인 별이 되어 다른 사람을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길을 떠나자
주의 공현 대축일'을 전에는 '삼왕내조첨례'라고 했습니다. 즉 3명의 왕이 아침에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뵈러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왕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박사라 고 부르며 또한 그들이 주님을 찾아가 경배 드렸다는 사실보다는 아기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셨다는 의미를 더 강조합니다. '공현'이란 공적으로 드러내 보여 주셨다는 말입니다.
메시아는 사실 전 인류를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의 백성'이라고는 하지만 꼭 유대인만을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유대인을 통해서 오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도 먼저 유다의 목동들이 찾아가 경배 드렸으며 이어서 이방인인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여기서 목동은 당시에 천한 수준이었으며 박사는 고상하고 품위 있는 위치였다는 것이 아이러니컬합니다.
독서에 보면 폐허된 예루살렘이 장차 하느님의 은혜로 얻게 될 미래의 영광에 대한 노래가 나옵니다. 그때는 강대국들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혀져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언제고 예루살렘을 일으키시어 만백성들이 보물들과 선물들을 가져오는 위대한 중심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수백 년 뒤에 그대로 적중이 되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태어나시고 이방인의 박사들이 전 인류를 대표해서 보물을 들고 그분을 찾아가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 때문에 그 이름이 빛나게 되었으며 또한 수백 년 동안의 치욕적인 사건들을 다 보상받았습니다. 드디어 믿음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하느님께서 직접 머무르시고 가르치셨던 선택받은 도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실패하고 잘못된 사람이라 해도 예수님 때문에 용서받고 사랑받게 되며, 또한 오랫동안 고통 받아온 모든 아픔들을 다 보상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박사들의 그 용기와 희망과 끈기를 배워야 합니다.
복음에 보면 도대체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뵙고 경배를 드렸는지 모릅니다. 다만 황금과 몰약과 유황이라는 선물을 통해 세 명이라고 추측을 하는 것이며 또한 그런 귀한 물건들이 주로 궁궐에서 사용하던 것들이기 때문에 왕들이 온 것이 아니냐 하고 짐작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라기보다는 박사나 현인, 혹은 학자라는 말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전은 큰 축복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할때 그들이 여행한 거리는 우리나라 남북의 삼천리 보다 더 먼 거리였으며 당시의 사정으론 굉장히 힘들고 위험한 도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확신할 수 도 없는 어떤 만남을 위해서 모든것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생애를 투신합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보물을 품에 간직하고 그분을 뵙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용기와 믿음과 인내 때문에 드디어 주님을 만났습니다. 소원 성취를 한 것입니다.
믿음이 사실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라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기나긴 나그네 길입니다. 아니, 주님을 만나기 위해 정처없이 떠나는 여행길입니다. 그 길에서는 긴 장마 때문에 태양을 못보는 경우도 있으며 찬바람 때문에 잠 못이루는 아픔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 속에서 하느님을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참고 걷게 되면 결국은 우리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얻으려는 소망보다 우리의 것을 다 드리려는 열린마음을 가질 때 그 감격과 기쁨이 큰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박사들의 행위를 보면 답답하고 어리석습니다. 도대체 바쁜 사람들이 고생스런 먼 길을 걸어서 어떤 아기를 잠깐 보고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선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빈손으로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빈털터리가 됐습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는 모든것을 다 얻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봤다면 세상을 다 얻어 가지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차롑니다.
우리도 '신앙'이라는 먼 길을 용기 있게 걸어가야 합니다. 무엇을 얻으려는 소망보다 오히려 우리의 최고의 것을 바치려는 갸륵한 마음으로 올 한해를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유대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드러내 주신 날입니다. 그래서 동방교회에서는 이 날을 성탄 축일로 지냅니다. 따라서 우리도 박사들처럼 용기있게 걸어가는 지혜를 배웁시다. 아무리 고달파도 희망을 가지고 참고 견뎌내는 믿음을 가집시다. 그러면 우리의 소망도 결국 채워질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 강길웅 세례자 요한 신부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의 감동>
한 형제의 강론이 오늘따라 유난히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별이 유난히도 별이 밝다’라는 표현들을 씁니다. 별이 유난히 밝게 보이는 곳이 어딥니까? 도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바닷가나 산속입니다. 산자락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그야말로 별이 쏟아져 내릴 것만 하늘입니다.
도심에서 올려다보는 하늘과 바닷가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왜 그리도 차이가 날까요? 시골의 하늘은 도심의 하늘보다 별들의 수효가 더 많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심이건 시골이건 별의 숫자와 밝기는 동일합니다. 도심의 밤은 전깃불로 밝혀져 있는 화려한 밤이기에 별들의 수효가 적게 보입니다. 바닷가의 밤은 아무런 빛이 없는 어두운 밤이기에 별들의 수효가 많아 보입니다.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아름다운 밤을 느끼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전깃불이 없는 어두운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찬란한 별이자, 구세주 하느님을 뵙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휘황찬란한 곳, 화려한 곳이 아니라 소박하고 가난한 곳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주변 빛이 화려한 예루살렘에서는 사람들이 구세주의 별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늘 별빛을 예의주시하면서 어둡고 한적한 곳으로 내려간 동방박사들이었기에 구세주의 별빛을 늘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서도 희망을 상징하는 구원의 별이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인도합니다. 그러나 그 별은 우리가 화려한 불빛 속에 머무를 때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싶다면, 정녕 구세주 하느님을 뵙고 싶다면 화려한 불빛을 떠나서 고요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난함을 선택해야 합니다.
휘황찬란한 샹드리에가 드리워진 화려한 연회 홀에서 멋진 음악을 들으면서 식사를 하는 사람은 결코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의 감동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별빛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기 위해 좀 더 내려가고, 좀 더 비우고, 좀 더 겸손해지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아기 예수님의 구유 바로 그 옆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성탄은 빛의 축제입니다. 당연히 기쁨과 환희의 축제입니다. 그러나 그 빛, 기쁨, 환희는 영혼을 위한 것이지 단지 우리의 육체적인 기분을 흥겹게 하기 위한 것이 절대 아닌 것입니다. 일 년에 단 한번 휘황찬란하게 잘 꾸며진 구유 앞에 무릎 꿇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성탄절이 주는 외적인 매력에 휩싸이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이제 성탄의 기쁨을 우리 마음 깊이 간직하고, 또 다시 골고타 언덕이란 신앙의 정점을 향해,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란 우리 인생의 최종의미를 향해 다시금 먼 길을 떠날 순간입니다.
언제까지나, 한없이 구유 앞에서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 구세주를 뵌 기쁨을 가슴에 담고 또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 공현’은 우리에게 또 다른 떠남을 요구합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앙증맞은 작은 두 손을 벌리고 우리의 선물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세주 하느님께 드릴 선물 중에 가장 좋은 선물은 어떤 것일까요?
세속적인 모든 재물에서 벗어난 깨끗한 마음의 순수한 황금, 예수님의 삶과 고난에 참여하기 위한 대가로 지불하게 될 이 세상의 모든 행복에 대한 포기로서의 몰약,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위로 향해 곧게 솟아오르는 의지의 유황…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순수한 마음으로 바치는 사랑의 헌신보다 그분 마음에 드는 봉헌은 다시 또 없습니다. 순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우리 가운데 매일 태어나시는 구세주 하느님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