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오 4장 12-25절

2009. 1. 5. 오전 7:36:16

글자

1월 5일 주님 공현 후 월요일-마태오 4장 12-25절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3,22 ─ 4,6
사랑하는 여러분, 22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23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4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4,1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2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 3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적’의 영입니다. 그 영이 오리라고 여러분이 전에 들었는데, 이제 이미 세상에 와 있습니다.
4 자녀 여러분, 여러분은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거짓 예언자들을 이미 이겼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분께서 세상에 있는 그자보다 더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5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세상에 속한 것을 말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6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진리의 영을 알고 또 사람을 속이는 영을 압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2-17.23-25
그때에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24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25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 자리를 잡습니다. 당시 그곳은 로마 군인들이 주둔하던 곳입니다. 한적하던 시골이 신흥 도시로 바뀐 겁니다.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회개’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복음사가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빛이 떠올랐다.”는 예언서의 대목을 인용합니다. 예수님께서 ‘빛’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가시는 곳엔 언제나 빛이 함께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분께서 등장하시면 ‘삶의 어둠’은 사라졌습니다. 온갖 병자와 갖가지 고통에 시달리던 이들이 기적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분을 믿고 따르면 누구라도 ‘빛’을 만납니다. ‘인생의 어둠’이 힘겹다면 언제라도 ‘그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선교는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알리는 행위입니다.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밝은 믿음’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말로는 선교하면서, 생활은 어둠에 싸여 있다면 힘이 생겨날 리 없습니다. 남에게는 주님을 전하면서 자신은 어둠에 갇혀 있다면 진실한 선교가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빛’을 드러내셨습니다. 기적을 베푸시어 그들의 어둠을 없애 주신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공현 후 월요일 -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 

저의 논문 지도 교수님은 성인처럼 사시기로 유명합니다. 옷도 남이 버린 것을 입고 가난한 아프리카 학생들을 위해 당신 스스로 책을 사 주십니다. 저에게도 여러 권의 책을 사 주셨습니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사비로 책을 사 주는 것은 그 분 외엔 좀체 볼 수 없는 일입니다.

한 번은 수업시간에 교수 신부님께서 주워 입고 온 바지 옆이 뜯어져서 모든 학생들이 그 분의 팬티를 다 본 적이 있습니다. 또 한 번은 앉아서 질문을 하려고 하니 제 옆에 와 눈높이를 맞추려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교수님은 우리나라 나이로 회갑을 맞으신 신부님입니다.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엔 직접 눈으로 그 분이 어떻게 사시는지 확인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성탄 자정 미사를 함께 드리기 위해서 그 분의 본당으로 갔습니다.

역시나 그 분 사시는 것은 가난함과 겸손함 그 자체이셨습니다. 특별히 자신의 사제관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에서는 알코올 중독자, 행려자, 노인 등 갈 곳이 없는 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신자라서 함께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갈 곳이 없다고 해서 자신의 사제관에 방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저는 이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제가 그 사제관에서 함께 자고 싶다고 했더니 방을 다른 곳에 마련해 두었다고 그 곳에서 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난방이 되지 않아 밤엔 매우 춥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곳에 사시는 분들은 낮에도 몇 겹의 옷을 껴입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습관이 되어서 괜찮지만 갑자기 춥게 자는 것이 좋지 않으니 우리들을 위해선 호텔방을 마련해 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군대 혹한기 훈련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자도 된다고 했지만 이미 몸은 따듯하고 좋은 호텔방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가난한 사람을 우선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본당에서도 봉성체를 나가는 것보다는 교사들과 술자리 하는 것이 더 기다려졌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사목회 봉사자들과 훨씬 많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나 쓸 것 다 쓰고 남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복음전파를 시작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방부터 복음 전파를 시작하십니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갈릴래아는 이스라엘로 치면 최북단으로 주님의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과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가장 거룩한 도시이고 그것과 멀어질수록 이방인의 지역, 혹은 어둠의 지역이라 생각하여 소외시키거나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갈릴래아는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의 대명사였습니다. 성경에서도 나타나엘이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요한 1,46)하며 갈릴래아 지방을 무시하는 전통적 생각을 표현합니다.

  정말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우선으로 선택하고 있을까요? 교황님을 ‘Servus Servorum’, 즉 ‘종들의 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Pater Pauperum’, 즉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교황님부터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가장 낮은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의지적으로라도 낮은 곳, 어두운 곳, 가난한 이들, 아파하는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려는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러 오신 예수님의 뜻을 본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선물에 담긴 의미>


   주님 공현 대축일만 되면 떠오르는 작은 기억 하나가 있습니다. 소년원 아이들과 팀별 성경퀴즈대회를 할 때였습니다. 박빙의 승부가 계속되었는데, 드디어 마지막 한 문제가 남았습니다. 이 문제로 우승팀이 가려지고 푸짐한 상품도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자 그럼 마지막 문제 나갑니다. 세 명의 동방박사가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 드린 선물 세 가지는?”


   한 친구가 재빨리 손을 들었습니다. 정답은? “황금! 유향!”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마지막 한 가지를 말했는데, 다들 뒤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몰약!”


   동방박사들이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께 가져온 선물이 왜 하필 황금, 유향, 몰약이었을까요? 이왕이면 갓난아기에게 당장 필요한 일회용기저귀나 분유, 장난감이 아니었을까요?


   세 가지 선물에는 각각 나름대로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부터 이 세 가지 선물의 의미는 여러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습니다.


   2세기경 리옹의 이레네오가 말하길 황금은 아기 예수님의 왕으로서의 위엄을, 유향은 그분의 신성을, 몰약은 언젠가 맞이하게 될 십자가상 죽음을 예표 한다고 했습니다.


   현대 신학자 칼 라너는 조금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황금은 우리의 사랑을, 유향은 우리의 그리움을, 몰약은 우리의 고통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황금은 여러 광물들 가운데 다이아몬드와 더불어 희소가치가 큰 물질입니다. 이콘을 그리기위해서는 금이 많이 사용되는데, 신분이 고귀한 분일수록 더 많은 금박을 입히기도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황금을 선물로 가져온 것은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 만왕의 왕이시며, 우리 생명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유향은 예로부터 거룩한 성전에서 제사를 올릴 때 태우던 향료였습니다. 요즘도 부활이나 성탄 대미사 때, 서품식 미사 때, 성체강복 때도 분향을 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단을 향해,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는 성경책을 향해, 예수님의 몸이신 성체를 향해 분향합니다. 향은 아무에게나 바치지 않습니다. 부족한 인간이 하느님께 바치는 가장 경건한 봉헌이 향인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유향을 선물로 드린 이유는 아기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몰약(沒藥, Myrrh)은 시신에 바르는 약품으로 죽음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장례식 때 사용되는 몰약을 바치다니요. 그러나 이 행위는 참으로 예언적 행위입니다. 언젠가 아기 예수님께서 성장하셔서 아버지의 때가 오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몰약을 선물로 드린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처형될 어린 양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찬란한 황금은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의 존엄성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이 지닌 고귀한 가치도 가리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위에서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이지만 동시에 영적 인간이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얼굴은 하느님의 금빛 광채를 반영해야 하며,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할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에서 바치는 향기로운 분향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올리는 정성스런 기도이자 그분을 향한 큰 그리움의 표현입니다. 분향의 여운은 참으로 그윽합니다. 우리 매일의 삶이 하느님께 드리는 그윽한 향기가 되길 바랍니다.


   몰약을 아기 예수님께 바치면서 우리의 쓰라린 상처를 하느님께 보여드립니다. 그 상처는 우리 삶을 온통 헝클어놓지만, 결국 그 상처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자비와 만납니다. 매번 힘없이 부서지는 우리들, 상처 입은 마음을 다시금 아기 예수님께 바치겠습니다.

 

                                         
                                                      가톨릭성가 473번 / 세상의 빛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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