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코 6장 45-52절

2009. 1. 7. 오전 6:35:13

글자
 

1월 7일 주님 공현 후 수요일-마르코 6장 45-52절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11-18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7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45-52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45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46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47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48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4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50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하신 겁니다.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도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못한다’고 포기한 일입니다. 주님의 힘과 은총이 함께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용기를 잃어선 안 됩니다. 주님 앞에서까지 ‘무서워해야 할’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온갖 두려움은 선입관일 뿐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힘겨운 일을 만납니다.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는 고통’은 있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애써도 삶의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오늘 복음’을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오. 그래도 느낌이 오지 않는다면 다시 또 읽어 보십시오. 때로는 성경을 읽는 자체가 힘을 줍니다.
하느님의 기운을 느끼면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그러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할 수 없다고 제쳐 놓았던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기적은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달라진 자신’을 체험하는 행위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물 위를 걷습니다. 신앙인은 매일매일 물 위를 걸으며 사는 이들입니다.
 
               기적은 '달라진 자신'을 체험하는 행위입니다
  
*기적은 '달라진 자신'을 체험하는 행위라고 합니다.. 저는 저 자신안에서 기적을 체험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제 삶에 있어서 첫 자리에 놓게 된 것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가지게 된 것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분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제 자신의 모습에서 기적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삶안에서 절망을 희망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과 모든 사람들 안에는 그분 사랑의 존재가 늘 함께 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 삶에는 오직 희망만이 있다는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 제게는 기적입니다....
 묵상 안에서, 기도 안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들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중에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오늘도 저희 모두가 힘겨운 인생에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를 '희망하는 것'의 첫 자리에 놓는 그런 축복의 하루가 되도록 주님의 아름다운 어머니이시며 우리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통해 기도합니다..... 
                                                                                                       이자희(dcjosephine)수녀
 
 
 
 주님과 함께라면
 
 
어느 부자의 집 앞에서 거지 한 명이 벽에 등을 비비고 있었어요. 집 밖에서 나는 소리에 집 주인인 부자가 나와서 보고 “아니, 왜 제 집 담에 등을 비비고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았어요. 그러자 거지는 “등이 가려워서 그랬습니다.”라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부자는 거지를 측은하게 여겨서 집으로 들어오게 한 뒤, 욕실에서 목욕을 하도록 하고, 옷도 새것으로 갈아입게 해주고, 배부르게 한 상 잘 차려준 다음, 이것저것 먹을 것까지 싸서 가게 했어요. 정말 오랜만에 호강을 한 거지는 너무나 기분이 좋았고, 부자가 나눠준 음식을 가지고 친구 거지들에게 돌아갔지요. 그리고 음식을 나눠먹으며 오늘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이야기했고요.
그러자 이 이야기를 들은 한 거지 부부는 자기들도 이러한 호강을 받아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곧바로 그 집에 가서 둘이 나란히 담에 등을 비비기 시작했지요. 그때 마침 밖에 나갔다 돌아오던 부자는 자기 담에 등을 비비는 거지 부부를 보고 또 물어보았어요.
“아니, 당신들은 왜 제 담에 나란히 서서 등을 비빕니까?”
이에 남편 거지가 “등이 가려워서 그렇습니다.”라고 말했지요. 이 말을 듣자마자 부자는 갑자기 안색이 나빠지더니, 집 안으로 들어가서 몽둥이를 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이 부부를 때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 부부는 대접해 주기는커녕 몽둥이찜질을 하는 부자에게 억울하다고 항의를 했죠.
“아니, 제 친구가 와서 비빌 때는 밥도 주고 옷도 주고 하더니, 왜 저희한테는 몽둥이찜질입니까?”
그러자 부자는 말했어요.
“저번 거지는 혼자였으니 등이 가려우면 담에 비빌 수밖에 없지 않소. 그러나 당신들은 둘이 아닙니까? 그것도 가장 가까운 부부고요. 그러니 등이 가려우면 서로 긁어주면 될 것을 뭣 때문에 남의 집 담에다 등을 비비느냐 말이오?”
혼자는 못해도 서로 도우면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단순한 사실을 잊어버린 채 힘들다고만 말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불가능한 것도 가능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말로만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의심하면서 믿음의 길에서 멀어만 갈 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인 제자들의 믿음이 어쩌면 우리들의 믿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함께하신다는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 있으면,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고도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 그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면서 유령인줄 알고 비명을 지릅니다.
제자들의 모습처럼 우리도 삶 안에서 이렇게 믿음의 길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니까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용기를 내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도록 더욱 더 노력하십시오. 주님과 함께라면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큰 일에는 진지하게 대하지만 작은 일에는 손을 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몰락은 언제나 여기에서 시작된다.(헤르만 헤세)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때
 
어제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시각도 그렇고  오늘 풍랑을 잠재우는 기적에 대한 시각도 그렇고  마르코 복음은 다른 복음에 비해 객관적이고 냉정합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보다는 좀 더 예수님의 입장에서 기술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생각을 다 아시고  제자들의 능력을 다 아시고  제자들의 처지를 다 아시고  제자들의 미래까지 다 아시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 딴청을 피우시고  당신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일부러 한 마디 찔러도 보고 환난을 당하게도 하십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을 먹일 능력이 제자들에게 없음을 다 아시고 그래서 당신이 기적으로 먹일 계획을 갖고 계시면서도  어떤 태도를 보이나 보기 위해 너희가 먹이라고 한 번 떠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벌어질 일을 다 알고 계셨지만 그 밤에 호수를 건너게 하십니다.  그리고 맞바람에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도 그냥 계시다가  새벽녘에야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에는 없는 표현,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라는 표현을 씁니다.  주님께서는 고생하는 제자들을 분명 보셨지만 바로 떠나지 않으시고
새벽녘에야 떠나시어 제자들에게로 가십니다.
그 다음이 또 문제입니다.
가시긴 가셨는데 짐짓 못 본 체 지나치려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이것도 다른 복음에는 없습니다.

어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이 여기시는 분이 오늘 제자들에게는 왜 이러시는 것일까요?
어둔 밤에 떠나게 하시고  풍랑을 만나게 하시고  일부러 늦게 오시고  못 보고 지나쳐 가는 척하시는 그 뜻이 무엇일까요?

우리 인생살이에는 반드시 어둔 밤을 지나야 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어둔 밤이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목적지가 보이지 않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 수단이 보이지 않고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다른 방도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빛이 없기 때문인데  빛이신 주님께서 아니 계시니 제자들은 어둔 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어둠으로 내모십니다.

빛이 없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빛이 없으면 고통이 얼마나 더 고통스러운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빛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하기 위함이고  무엇보다도 빛을 갈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빛을 더욱 갈망하게 하기 위하여 새벽녘에야 나타나십니다.

새벽은 빛이 떠오르기 전이지만  사실은 어둠이 가장 깊을 때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진맥진, 힘이 다 빠져 있을 때입니다.
내 힘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밤새도록 애썼지만 허사가 된 때입니다.
내 힘은 다 빠지고 일은 허사가 되었을 때,  이때가 진정 갈망의 때이고,
갈망만이 있는 때입니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는 것도 이지 작용이 없고  이렇게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려는 의지 작용도 없고  이랬으면 좋겠다는 다른 사치스런 감상도 바람도 없고  오직 구원자만을 갈망하는 갈망의 때입니다.
이 갈망의 때에 빛의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한 배를 타시자 바람이 멎습니다.
 
 

 
 

공현 후 수요일 - 알아야 두렵지 않다

  신학교에서 건강하기로 유명한 선배가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빨간 동자’라는 아기 귀신을 보고 성소를 포기 한 사람도 있을 정도였는데 그 선배는 빨간 동자가 나온다는 지하 체육관에 밤에 내려가 혼자 운동을 하고 올라오는 겁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도 지하에 내려가 운동을 하고 올라오다가 반 지하 성체조배 실에 잠깐 들렀습니다. 혼자 성체조배를 하고 있자니 갑자기 뒤에서 거친 사람의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렇게 겁이 없던 선배도 무척 겁이 났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방엔 자신 혼자밖에 없었는데 뒤에서 남자의 거친 호흡소리가 계속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 선배의 말에 의하면 뒤를 돌아보는데 한 3분 정도가 걸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선배는 겁에 질려 빨리 그 자리를 떴고 나중에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며칠 뒤 혼자 성체조배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신학생 때부터 기도에 목숨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하여 혼자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제 뒤에서도 그 거친 남자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과 혼동할 수 없는 틀림없는 남자의 거친 숨소리였습니다. 저는 선배가 전에 한 말이 생각 나 아마도 마귀의 짓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역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앞을 보며 묵상을 하려니 이번엔 더 가까이에서 호흡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네 놈이 마귀라면, 나를 무섭게 해서 기도를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겠구나! 네 뜻대로는 안 될 거다.’  하며 정해놓은 기도시간을 채웠습니다. 그 시간 동안 그 거칠고 기분 나쁜 숨소리는 귓가에 계속 들렸습니다.  저는 먼저 방으로 내려가 자리에 누웠습니다. 자리에 누워도 역시 귀에서 계속 그런 숨소리가 났습니다. 저는 마귀가 겁을 주려고 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그냥 무시하고 자버렸습니다. 그 날 이후로 그 소리는 들린 적이 없습니다.    저는 마귀가 그렇게 두려움을 줄 수는 있어도 나를 해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나에게 들어올 수도 없고 하느님께서 지켜주시니 그 분 허락 없이는 나를 해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기에 침착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라고 하며 소리소리 지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직 깨닫고 있지 못했습니다. 알지 못했기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실 정도로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믿었다면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고 그렇게 겁먹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든 미래를 두려워하든 그것은 그 사람이나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잘 알고 있는 자신의 가족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남들은 나의 가족을 두려운 사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모른다면 우리를 그렇게나 사랑하시는 예수님도 두려운 존재가 됩니다. 결국 우리를 심판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혹은 어떤 사람을 두려워한다면 믿음이 없거나 사랑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는 만큼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보고도 두려움에 떠는 일이 없도록 먼저 그리스도를 더 알기 위해 꾸준한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원한다면>


   4세기경 이집트의 사막에서 수도자들의 큰 스승으로 살아가셨던 압바 요셉에게 한 초심자가 찾아가 여쭈었습니다.

 

   “스승님,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성무일도를 바치고 단식을 준수하며 기도하고 묵상하며 고요함을 지키며 생각을 순수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제가 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압바 요셉은 일어서서 두 손을 하늘로 치켜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손가락은 10개의 타오르는 등불과 같이 되었습니다. 초심자를 향해 압바 요셉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원한다면 너는 온통 타오르는 불꽃이 될 수 있다.”(칼리스토스 웨어, 마음에 이르는 길 참조)

 

   우리 모두 비록 역풍 앞에 작은 조각배처럼 흔들리는 유약한 존재이지만, 혼신을 다해 정진한다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기도한다면, 전력투구한다면, 우리 역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딛고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요한1서는 힘주어 강조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사랑은 우리를 일어서게 만듭니다.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용광로처럼 뜨겁게 만듭니다. 사랑은 우리가 세상을 이기도록 만들어줍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를 보십시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습니다. 새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그 사랑의 힘은 얼마나 컸던지 그 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가게 만듭니다. 사랑은 두려움조차 잊게 만듭니다.

 

   사도 요한을 보십시오. 그는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습니다. 그 사랑의 힘이 얼마나 컸던지 다른 제자들은 모두 체포될까봐 두려워 줄행랑을 쳤지만, 그는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 있었습니다. 사랑은 죽음의 공포조차 초월하게 만듭니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을 보십시오. 살아생전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했던 신부님이셨습니다. 그 사랑을 바탕으로 동료 안에 현존해계셨던 예수님을 대신해서 죽음을 자처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들의 모습은 우왕좌왕, 갈팡질팡, 정말 엉망이었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소리칩니다.

 

   그들이 느꼈던 두려움,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들의 내면은 아직도 주님 보다는 세상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아직도 초보단계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선택한 동기는 아직도 정화여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숱한 두려움의 시초, 원인을 종잡을 수 없는 이 공포심의 출발점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각자의 조각배에 주님께서 동승하고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 없이도 충분히 내가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꾸려나갈 수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그분께서 내 배위로 건너오시는 순간, 내 인생의 중심이 되시는 순간, 우리가 체험하게 될 은총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고달픈 우리의 일상들은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꽃길이 될 것입니다. 세상 모든 대상들이 두려움과 극복의 대상이었는데, 이제 찬탄과 사랑의 대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더 이상 그 무엇도 기대할 없을 것 같았는데, 가슴 설레는 나날로 변화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28번 / 불의가 세상을 덮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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