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꼭 필요한 사람>>-루카 4장 14-22절

2009. 1. 8. 오전 7:22:03

글자

 

-1월 8일 주님 공현 후 목요일-루카 4장 14-22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19 ─ 5,4
사랑하는 여러분, 19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0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21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4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4-22ㄱ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시어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시고는 ‘그 예언’이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희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의 세대에도 전해져야 합니다. 스스로 가난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소유가 넘쳐야’ 가난이 물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더 많은 소유에 매달립니다. 가난의 극복은 소유가 아니라 ‘소유를 가능케 하는 힘’에 있건만 그 힘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듯 ‘좁은 시각’으로 몰아가고 있는지요? 무엇이 우리 삶을 ‘꽁꽁 묶어’ 멀리 보지 못하게 하고 있는지요? ‘자녀’입니까? 미래의 삶과 건강입니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습니까? 주님의 이끄심을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 한마디로 자유와 해방을 주실 분을 우리는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루어집니다. 다만 우리가 긴가민가하기에 저만치 오다가 서 있을 뿐입니다. 희년의 본질은 ‘기쁨’입니다. 금년 한 해, 누가 뭐래도 기쁨으로 산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됩니다.

 

주의 공현 후 목요일 - 훌륭한 항해사

 한 청년이 위대한 항해사가 되는 꿈을 안고 세계를 횡단한 유명한 한 항해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그 항해사에게 많은 질문을 쏟아 부었습니다. 특별히 항해를 잘 하기 위한 방법으로 바람의 원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장님, 저에게 바람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 주십시오.”    “... 바람? 잘 모르겠는데?”     “아니, 위대한 선장님께서 어떻게 바람에 대해 잘 모르실 수가 있습니까? 바람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것은 항해사의 기본이 아닙니까?”     “글쎄, 잘 모르겠네.”  그래도 계속 다그치자 그 항해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난 바람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어떻게 불게 되고 어느 방향에서 불어올지 전혀 예상도 할 수가 없네.... 다만 불어오는 바람을 보고 언제 닻을 올려야 하고 언제 닻을 내려야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바람과 같아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성령의 이끄심에 어떻게 잘 순응하느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다시 돌아오셨고 그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그리고 이사야서에 예언된 당신의 사명을 읽으신 다음 바로 이 자리에서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왜 예수님께서 미리 복음 선포를 하시지 않고 나이가 서른이 되실 때까지 기다리셨을까요? 더 먼저 복음 선포를 시작하셨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즉, 성령님께서 당신에게 내리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성령님이 예수님께 내렸을까요? 바로 세례를 받으실 때입니다. 세례 받으실 때 성령님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은 복음 선포를 시작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위에 임하시고 참으로 ‘그리스도(그리스어로, 기름부음 받은 자: 히브리어로는 ‘메시아’)’가 되신 이후에 바로 복음 선포를 시작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오늘 복음 바로 전에 성령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여 사탄에게 유혹받게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고 돌아오신 뒤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셔서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루카 4,1-2)    이 유혹을 이기시고 오늘 당신의 동네로 돌아오셔서 비로소 복음전파를 시작하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대로 돛을 올리고 내릴 줄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즉, 때를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도 왜 40일간의 단식과 기도와 유혹을 받게 하셨을까요?   이는 성령을 받더라도 육체적 욕망에 휘둘리거나 그래서 죄를 지을 수 있는 약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성령의 오심도 그에게는 큰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란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령님은 당신이 원하시면 언제든 우리에게 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이길 줄 아는 강한 믿음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죄에 떨어지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죄에 떨어지되 그것을 발판으로 다시는 죄짓지 않도록 더 강해지라는 뜻입니다. 우리 하루하루는 좋은 항해사가 되기 위한 연습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길 수 있을 만큼 노련한 행해사가 되었을 때 성령님의 충만한 열매로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리 사랑*~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들의 고백 내용 중에 가끔 듣게 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했다.”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들을 때 경우에 따라 제가 나무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수도자는 깜짝 놀라 어리둥절합니다.
한 번도 이렇게 고백해서 나무람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상 어떻게 보면 나무랄 데가 없는 죄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제가 나무랄 때는 어떤 교만이 느껴질 때입니다.
마치 자기는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듯,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강박감에서 사랑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자의식이 강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할 때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자격도 없는 내가 사랑한다는 자세로 사랑해야 하고,
능력도 없는 내가 사랑한다는 자세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할 자격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랑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귀부인을 마당쇠가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당쇠가 마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마님은 그것을 사랑으로 느끼지 않고 모욕으로 느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당쇠에게 대단한 영광이 될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이웃 사랑한다는 것 참으로 어려운 것이지만
이런 사랑을 해야 하고
이렇게 사랑해야지만 진정한 이웃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 우리는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능력이 있으면 왜 사랑하지 못합니까?
사랑이 없으니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니 우리는 사랑이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이 없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내게 사랑이 없으니 사랑을 받아서 사랑하게 되고
내게 사랑이 없으니 꾸어서 사랑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발광체가 아니면 빛을 받아서 반사해야 하고
자가발전기가 아니면
충전을 받아 발전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에 있어서 우리는 충전기, 배터리와 같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에서 충전을 받지 않으면
사랑이 있는 것 같지만 얼마간 사랑하고 나면 곧 바닥이 나는
충전기와 같습니다.

달리 얘기하면 우리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만이 사랑이시고,
그래서 하느님만이 사랑의 원천이십니다.
우리는 원천으로부터 사랑을 내리받아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없음을 죄스러워하기 전에
하느님 사랑을 잘 받지 못했음을 죄스러워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에 민감하지 못해서 잘 느끼지 못하고
하느님 사랑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
물을 흘려버리듯 낭비하였음을 죄스러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꼭 필요한 사람>


   언젠가 한 고위관료가 소년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전체 아이들이 모두 강당에 모였습니다. 오신 김에 마이크를 잡고 아이들에게 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들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들,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사람, 둘째,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셋째,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사람. 여러분들께 당부 드립니다. 여러분들,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십시오.”


   정말 황당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심한 말씀을 드러내놓고 하실 수 있는지요. 저희 사부이신 돈보스코 성인과는 마인드가 어찌 그리도 다른지요. 돈보스코 성인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여러분들,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꼭 필요한 사람, 둘째, 반드시 필요한 사람, 셋째, 정말 필요한 사람.”


   아무리 못돼먹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완전히 구제불능의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막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가치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들 존재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그냥 무턱대고 보내지는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소중한 이유는 그 누구라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숨 쉬고 있는 한 우리는 하느님께 돌아설 희망이 있습니다.


   생명이 아직 붙어있다는 것, 이것 보통 일이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다는 표시입니다. 살아있다는 것, 이것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도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위에 두 발로 서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중요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함부로 대합니다. 단 한번 뿐인 소중한 인생을 물 쓰듯이 탕진합니다. 금쪽같은 순간들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고, 가장 쓸쓸한 얼굴로, 가장 우울한 모습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 사이에 파견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전력투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또 다른 예수님이 됩니다. 제2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분께서 하셨던 일을 우리도 따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보여주셨던 모범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님에게 하셨던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세상 속으로 파견하십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야겠습니다. 길거리를 떠도는 청소년들과 노숙인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소년원과 교도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시각장애우들의 도우미가 되어드려야겠습니다. 환우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도록 만들어드려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18번 /주님을 부르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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