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2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 마르코 1,14-20
▥ 히브리서의 시작입니다. 1,1-6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2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3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6 또 맏아드님을 저세상에 데리고 들어가실 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만남은 신비입니다.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던 사람이 어느 날 혼인한다는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평범한 모임에서 ‘눈이 확 돌아가는’ 사람을 만났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행복한 부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연은 부르심입니다. 모든 인연을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여긴다면 소홀히 대할 수가 없습니다. 불교에서도 ‘옷깃만 스쳐도 인연’으로 여기라 했습니다. 그만큼 만남을 소중히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하찮은 만남도 정성으로 대하면 은혜로운 만남을 반드시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형제와 요한 형제를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평소 사람들과의 만남에 적극적이었을 겁니다. 이웃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선택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부르심에 즉시 답합니다. 변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복음사가가 표현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부르심에는 “예!” 하고 답해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새로운 삶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누구라도 ‘주어진 인연’에 최선을 다하면 그만큼 새로운 삶을 만나게 됩니다.
연중 제 1 주간 월요일 - 스승의 위로
제가 보좌 신부를 할 때 복자회 본원에서 지,청원, 수련자들에게 성경강의를 해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는 성경을 전공했기 때문에 로마에서 함께 공부하던 수녀님을 통해 부탁을 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첫 해 보좌 생활이 너무 바빴기 때문에 좀체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 사제의 불타는 열정으로 해 드리겠다고 수락했고 결국 쉬는 날인 월요일 아침마다 강의를 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아침에 한 이유는 월요일마다 모임이 많았기에 아침 일찍 하지 않으면 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일까지의 피곤한 일정을 마치고 월요일은 아침미사 하고 한 숨 자는 것이 꿀맛이었는데 그 주간부터는 새벽미사가 끝나자마자 차를 몰고 서울 청파동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매 주 한 시간 반의 강의를 마치고 내려오면 간신히 동기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월요일 날도 쉬지 못하니 정말 피곤할 것 같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제관에서 오전 내내 잠을 자던 때보다 더 힘이 났습니다. 그래서 유학을 다시 나오기 전까지 거의 2년을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그들에게 강의를 하였습니다.
육체적으로는 그렇게 힘들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제게 힘을 주었습니다. 사실 신자들에게 강론시간에 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정말 깊은 부분과 자세한 부분들은 일일이 강론에서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시간도 부족할뿐더러 신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지루해 한다던가, 관심 없어 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강론은 쉽게 핵심적인 것을 삶에 비추어 해야 합니다. 그래도 어려워하거나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녀님이 되겠다고 앉아있는 그 자매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보물을 발견한 것과도 같습니다. 쉬지 않고 한 시간 반을 이야기해도 열심히 받아 적고 질문도 하는 등 가르치는 사람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사실 신자들에게 얻을 수 없는 만족을 그들을 통해 얻었었습니다. 많은 신자들도 힘을 주는 말씀을 많이 해 주셨지만, 그들이 주는 만족은 그 이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전파를 시작하시며 첫 네 명의 직업이 어부였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저는 그 자매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왜 복음 선포를 시작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부르셨는지 이해가 갑니다. 물론 당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아 그들을 온전히 당신의 후계자로 가르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가장 클 것입니다. 당신이 수난하시는 날까지 제자들은 완전하게 되지 못하여 모두 도망쳐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큰 위로가 되었음을 확신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던 것을 제자들에게만 따로 설명해 주시는가 하면 제자들과만 함께 계실 때 특별한 것들을 더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렇게 비유로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따로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 (마르 4,36)
“예수의 일행이 그 곳을 떠나 갈릴래아 지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따로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마르 9,30-3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숨겨진 말씀들을 따로 해 주시며 만족하시고 더 깊은 관계를 형성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실 때 모든 이들은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제자들만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어렵다고 모두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셨지만 끝까지 당신께 남아있는 제자들을 보며 위로를 받으셨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부활하여 나타나신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열심히 배워 제자가 된다는 말은 곧 사랑한다는 말이고 스승에게 커다란 위로를 줍니다.
과연 우리들은 예수님께 위로를 주는 제자들입니까, 아니면 꼭 필요한 것만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반 신앙인들입니까? 우리도 예수님의 깊은 이야기를 들어주고 믿어주고 사랑하여 그 분에게 위로가 되는 제자들이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또 다시 첫 아침에>
한 달 반가량의 대림,성탄 시기가 어제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행복했던 나날들이었습니다. 마치도 잔잔한 은혜의 강가를 주님과 함께 거닐던 꿈결 같던 순간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님과 함께 걸어온 은총의 오솔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출발선상에 서 있습니다. 교회 전례력 안의 여러 전례 시기들 가운데 가장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한 연중시기를 시작합니다. 연중시기가 있기에 사순․부활 시기가 더욱 빛을 발합니다. 연중시기가 있기에 대림․성탄시기가 더욱 풍요롭습니다. 이처럼 연중시기는 다른 전례시기의 배경이자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한 시절을 매듭지을 때 마다, 그리고 새로운 절기를 맞아들일 때 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와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그것은 엄청난 고통일 것입니다. 한번 만개한 꽃이 시들지 않고 계속해서 피어있는 것도 무척 어색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네 사랑에 이별이 있고, 인생에 기승전결이 있다는 것, 시절의 끝자락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입니다. 인생에도 저무는 황혼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황혼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착해지기 때문입니다.
한 절기의 끝자락에 매달려 우여곡절의 지난 순간들을 뒤돌아보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온 나날들은 주님의 자비 안에 행복했던 날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큰 부족함을 끝까지 참아주셨으니 말입니다.
감사하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숱한 죄와 과오, 부끄러움을 끝까지 인내하셨으니 말입니다.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아직 이렇게 살아서 두 발로 서있으니 말입니다.
돌아보니 정녕 우리는 모두 지난 대림,성탄 시기 동안 하느님으로부터 충만한 은총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결국 새롭게 맞이한 연중시기 첫 아침에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는 감사뿐입니다. 오늘은 정녕 은총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묵은 것이 새것과 화해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절망이 희망과 다시금 손을 잡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고통이 축복으로 변화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온 시절에 대한 결론은 항상 감사입니다.
은총의 주님께서는 은혜와 축복으로 충만했던 우리의 지난날들을 봉헌물로 받으시는군요. 그리고 은혜롭게도 우리 앞에 또 다시 빈 들판 같은 희망만으로 가득 찬 새로운 연중시기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감사하면서, 찬미하면서, 다시 한 번 힘차게 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는 삶이 눈물겹게 소중한 축복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부족했던 우리의 지난날들, 이제 하느님께서 모두 거두어가셨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다시 새로운 연중시기란 과분한 은총 앞에 서있습니다. 정녕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의 아침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가장 큰 표시인 은총의 아침입니다.
이 연중시기의 첫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처럼 기쁜 마음으로,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다시 한 번 주님과 함께 힘찬 항해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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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식 로제리오- 나를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