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1일 주님 세례 축일-마르코 1,7-11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2,1-4.6-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2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3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4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0,34-38
그 무렵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35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36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곧 만민의 주님을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을 37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
그때에 요한은 7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1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씻는 것입니까? ‘죄와 연관된 생활’입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악습과 허물입니다. 내 영혼을 어둡게 하는 ‘악하고 나쁜 기운들’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성사의 핵심은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받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우리 몸에 물리적 변화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례 순간부터 우리 삶의 어두운 기운은 약화되기 시작합니다. 세례성사의 은총이 우리의 운명을 밝은 쪽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율법을 어기는 행위입니다. 계명을 위반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사랑이란 말’로 단순화하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죄는 ‘사랑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작은 ‘사랑의 생활’을 말합니다. 내게 속한 ‘모든 인연’을 다시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만큼은 세례 받던 순간을 기억하며 하루를 보내야겠습니다.
주객이 전도됐다고 세례자 요한은 느끼는 것입니다.
관계적으로 부당하다고 요한이 느끼는 것과는 다르지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이 뭔가 부당하다는 느낌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세례는 죄를 씻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인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고 본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이런 부당함을 우리는 이해해야 할까?
오래 전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란 영화를 봤습니다.
아주 잘 만들어진 구도영화였기에 제가 청원장으로 있을 때 포럼을 하느라 여러 차례 봐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게 나는 영화입니다.
달마가 서역 인도에서부터 동쪽 중국에까지 온 까닭은 그때까지 불교 진리를 모르던 중국의 그 無明을 깨치기 위함인 것처럼 이 영화의 주인공도 번뇌를 깨치려 사바 세상을 떠났다가 無明衆生을 깨치기 위해 다시 사바 세상으로 돌아감을 이 영화는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오늘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의 독서에서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전, 또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먼저 요르단 강을 거룩하게 하십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세례의 물을 깨끗하게 하시려고 요르단 강에 들어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늘에 계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오심과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죄 많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세상은 더 이상 아담과 하와의 죄로 낙원에서 추방당한 세상이 아니게 되었고 죄악이 설쳐대는 세상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오심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며 회개를 선포하심으로 정화 작업을 하십니다. 마치 걸레와 같이 되시는 것입니다. 자신은 더러워지면서 남은 깨끗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걸레도 처음부터 걸레는 아니었습니다.
걸레도 자신이 더러워지기를 거부하였다면 깨끗한 채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더러워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걸렙니다.
그럼으로써 깨끗함과 더러움을 초월하여 사랑에 도달한 것입니다.
걸레에겐 자신의 깨끗함, 그것이 중요하지 않고 사랑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걸레이신 주님께서는 이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까지 십자가상 물과 피로 인간의 죄를 다 씻어 주실 때까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을 퍼부어도 더러운 영을 몰아내시고,
세리 자캐오의 집에 유숙하시고. 간음한 여인의 죄를 씻어주시고, 아들을 잃은 과부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나병환자의 고름을 닦아주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고고하고 거룩한 주님을 아들이라 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때 묻어 더럽고 먹보요 술주정꾼으로 취급을 받는 예수님을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고 장엄하게 선포하십니다.
주님 세례 축일 -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오늘은 김수환 추기경님과 최월갑이란 한 사형수의 이야기로 먼저 시작할까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가톨릭 시보사 사장을 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최월갑이란 사형수는 살인강도죄를 짓고 사형선고를 받은 젊은 사형수였습니다. 그는 개신교 신자였는데 천주교로 개종하고 싶다고 해서 추기경님이 (물론 그 때는 추기경님이 아니셨지만) 미사도 드려주고 수녀님께 부탁하여 교리도 받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기 직전에 사형대에 서야 했습니다. 그래서 추기경님은 그에게 급하게 조건부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형수는 매우 평화로웠고 오히려 밝은 햇살을 맞으러 나갈 추기경님이 울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는 천주교 묘지에 묻히게 해 달라는 유언과 함께 사형대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잠시 후 ‘쿵’하는 소리가 났고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해졌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간수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 추기경님 옆에 있던 소장에게 뛰어왔습니다.
“소장님, 월갑이, 월갑이가...”
“왜 그래. 무슨 일인가?”
“월갑이가 저 밑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어요.”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야. 죽은 사람이 웃고 있다니?”
추기경님과 소장이 현장에 가 보니 그는 정말로 밧줄을 목에 걸고 편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나무로 된 낡은 교수대가 그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져 아래로 함께 떨어진 것입니다.
소장은 즉시 ‘사형집행 계속’ 명령을 내렸습니다. 추기경님은 두 번씩이나 교수대에 서야하는 상황이 애처로워 어쩔 줄 몰라 그의 손만 꼭 잡고 있었습니다. 간수들이 사형대를 고치는 것을 태연스레 보고 있던 그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전 괜찮습니다. 지금 죽는 것이 제게는 가장 복된 죽음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믿음이 있으면 제 말을 이해하실 거예요.”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제가 반시간쯤 후면 천당에 가 있겠네요.”라며 추기경님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편안하게 떠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는 하느님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죽이고 하느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나는 신비’를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주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죄가 없는 예수님까지도 죽음과 새로 태어남의 신비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세례의 전형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사건입니다. 또한 여호수아(사실상 ‘예수’와 같은 이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도 세례의 예표입니다.
세례란 이와 같이 강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갈라진 바다 사이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뒤를 쫓던 이집트 군인들은 자신 안에 있는 ‘악’ 혹은 ‘나쁜 경향들’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죄의 종살이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로 태어나고 죄의 경향들은 바다 속에 묻히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세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그들에겐 나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쁜 경향들은 이미 홍해 사건과 사십년 동안 사막을 걸어오면서 모두 죽었고 이미 새로 태어난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완전한 인간일지라도 하느님 앞에서 낮아지고 자신을 비우는 모습은 ‘사랑의 본질’이기에 꼭 죄나 회개할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 안에서 항상 새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셨지만 아버지 앞에서 자신을 죽이시고 온전히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따라서 죄 사함을 받을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랑’한다면 ‘세례’를 통한 새로 태어남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번만이 아니라 ‘내가 받을 세례가 따로 있다.’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죽이고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의 의미를 알았다면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뜻을 죽이시고 아버지의 뜻을 따름으로서 돌아가셨지만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물은 이렇게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죽이는 우리의 작업을 의미하고 ‘회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예수님께도 성령님이 내려오시면서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례는 이렇게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즉, 세례를 받는 입장에서는 자신을 죽이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고, 하느님의 입장에서는 당신이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시며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한 수녀님께 세례에 대해 말씀해 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수녀원에 들어와서 못난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해 주심을 느꼈어요. 그래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죠. 이것이 세례 같아요.”
그렇습니다. 세례는 한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새로 태어남입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났다는 증거는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구나!’를 느꼈다면 자신도 모르게 그 순간에 또 한 번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한 사제에게도 세례에 대해 말해 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고해성사를 볼 때 세례를 다시 받는 것 같아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새로 태어남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고해하는 작업은 홍해를 건너는 일과 같습니다. 나쁜 것들을 바다에 남겨놓고 주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용서해주시고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시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끼면 그것도 역시 작은 세례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저도 신학교 들어갔을 때 교만하여 주님께서 불러주신 것에 대해 만족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틀 정도를 굶고 나서 성체를 영하는데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틀을 굶어보니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보잘 것 없는 나를 불러주신 것에 대해 한없이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세례 같았습니다.
세례는 결국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 행복에 위의 사형수처럼 죽음 앞에서도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죽음도 이길 수 없는 힘을 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 일상에서도 이런 끊임없는 새로 태어남이 없다면 삶을 살아갈 힘을 얻기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낀다면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그 사랑의 에너지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낮추는 이들에게 이 무한한 사랑을 느끼게 해 주십니다. 그런 힘을 얻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자주 자신을 돌아보며 ‘안 좋은 경향들을 죽여 가는 작업(회개)’일 것입니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향기로운 꽃잎 같은 말>
오후가 되면서 기승을 부리던 혹한의 날씨가 조금 풀리고, 하늘은 또 얼마나 청명하든지요. 등산하기 딱 좋은 날씨였습니다.
하산 길에 배도 출출하고 해서 단골집에 들렀습니다. 이것 저 것 시켜놓으니, 얼마나 잘들 먹는지,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먹는 것이 시원찮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너도 배 고플텐데, 많이 좀 먹지 그래.”
아이가 하는 말 좀 보십시오.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오늘 하루 내내 신부님 사랑을 듬뿍 먹어서 그런지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은데요.”
옆에 있던 아이들이 “와, 먹었던 것 올라오려고 한다. 제발 오버 좀 하지 마라!”며 눈들을 부라렸지만, 순식간에 제 기분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모릅니다.
내려오는 길에 아이들과 노래방에도 들렀습니다. 한 시간 내내, 아이들 노래 부르는 것을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도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들이 어찌나 노래들을 잘 부르는지.
집에서는 숫기 없이 찌들려 지내는 것 같았는데, 다들 한가락씩 하더군요. ‘짜식들, 사고나 칠 줄 알지, 뭘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있어야지’ 하며 그동안 과소평가해온 것이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제일 노래 멋들어지게 불러댔던 아이에게 제가 그랬습니다.
“**야, 정말 감동이다. 너무 아깝다. 어디 오디션이라도 한번 주선해볼까?”
아이는 “이 정도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하면서도 엄청 기분 좋아 하더군요.
올 한해, 이웃들에게 삶의 활력을 주는 말, 기분을 좋게 만드는 말, 그래서 힘차게 살아갈 힘을 주는 말, 향기로운 꽃잎 같은 말을 보다 많이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선택하신 것이 세례였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에서 우리는 또 다시 하느님의 놀라운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겸손하게도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앞에 고개를 숙이십니다. 무릎을 꿇습니다. 한 부족한 인간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십니다. 말구유 탄생에 이은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하느님은 겸손 그 자체란 사실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세례는 악에로 기울어진 거짓된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 세례는 눈물과 고통, 죄와 죽음으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 기쁨과 행복,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로 건너감을 의미합니다.
요한의 세례가 물의 세례, 회개의 세례, 새 출발을 의미하는 세례였다면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세례는 불과 성령의 세례입니다. 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은총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과 형제가 되는 은총을 받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물에 잠깁니다. 침례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세상에 죽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물에서 나옴을 통해 우리는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다시 생을 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세례의 기쁨은 잠시입니다. 즉시 다가오는 것이 고통이요 십자가입니다. 결국 그리스도 신자가 되겠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손해 보겠다는 것, 세상과 거꾸로 살겠다는 의사표명입니다. 세례를 받겠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바보 같은 인생을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이 세상에 전부를 걸지 않겠다는 각오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완전히 깨끗해졌다는 말도 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지속적 회개의 여정을 충실히 걷겠다는 말과도 동일합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말이 아니라 이제 험난한 구원의 여정을 출발한다는 말과도 동일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고뇌의 쓴잔을 받아 마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십자가의 길을 걷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삶의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서 예수님 그분을 지속적으로 선택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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