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1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 마르코 3,1-6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7,1-3.15-17
형제 여러분, 1 멜키체덱은 “살렘 임금”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로서, “여러 임금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그에게 축복하였습니다.” 2 그리고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먼저 그의 이름은 ‘정의의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또한 살렘의 임금 곧 평화의 임금이었습니다. 3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이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닮아, 언제까지나 사제로 남아 있습니다.
15 멜키체덱과 닮은 다른 사제께서 나오시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16 그분께서는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 17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하고 성경에서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4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5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6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려 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실제로 고쳐 주실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언제 예수님을 다시 만날지 모릅니다. 그는 애절하고 비장한 눈빛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실눈을 뜨고 있습니다. 고쳐 주시기만 하면 눈을 크게 뜨고 외칠 겁니다. 안식일에 ‘의료 행위’를 했다고 따질 참입니다. 바리사이 역시 신심 깊은 신앙인들입니다. 그런데도 평생을 ‘오그라든 손’으로 살아야 하는 이웃의 아픔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믿음에 사랑이 빠지면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으로 가기 쉽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웃을 해치는 폭력’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삶의 에너지’를 충족시켜 줍니다. 오그라든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돌아봐야 합니다.
연중 2주간 수요일 - 죽이는 것이 옳으냐?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다보니 두 가지 씁쓸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재판을 받던 한 고등학생이 합의금과 신변문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경찰조사결과 이 학생은 2007년 인터넷 리니지 게임을 하던 중 상대 게이머인 서울의 김모 변호사에게 욕설을 했다는 이유로 서울중앙지법에서 재판을 받다 천만원 정도의 합의금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경찰은 학생이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고민하다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망 원인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용산 철거민 강제진압 중 6명이 사망하고 경찰과 철거민 20여명이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다는 소식입니다. 경찰은 철거민들이 화염병 등을 만들기 위해 건물 안에 두었던 시너에 불이 붙으면서 경찰과 철거민들이 화상을 입었다고 밝혔습니다. 경찰은 그 전날 이미 옥상에 시너통 70여병을 보관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어 그 전날부터 대형 참사가 일어날 것이 예견되어 있으면서도 진압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cyworld 뉴스)
누구나 이런 뉴스들을 접하면서 마음이 아파오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변호사가 더 잘못했다, 혹은 공권력이 더 잘못했다고만은 하지 않습니다. 학생도 어른에게 욕을 했으니 잘못이 있고 무력시위를 한 시민들도 작지 않은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욕을 하는 것도 잘못이고 무력으로 시위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러나 더 큰 잘못은 변호사에게 욕을 했다는 것과 공권력에 저항했다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바위이고 약한 자들은 계란에 불과합니다.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어리석은 행위를 한 것이 더 큰 잘못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나라의 법과 권력에 순종해야 한다고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위를 거역하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고 거스르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로마 13,1-2) 아마 이들은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권위에 복종하지 않았기에 그런 심판을 받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악법도 법이다.’ 하며 스스로 독극물을 마신 소크라테스가 그래서 더 위대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춘기 학생이 욕을 한 번 한 것이 법적으로 따져 천만원에 해당한다면 그것 때문에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아픔은 과연 얼마나 되고 누가 보상해 주어야 할까요? 그것이 과연 평생 법을 공부한 사람의 정의일까요? 또 당장 집을 잃고 살길이 막막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화염병을 준비했던 것이 목숨을 빼앗을 정도로 큰 죄였을까요? 누가 경찰 특공대에게 부모님과 같은 분들을 강제진압하게 만들고 또 그들이 던지는 벽돌에 상처를 입도록 만들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예수님은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 그 분이 병을 고쳐주시는지 안 고쳐주시는지, 즉 안식일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따라서 좋은 일을 하든, 남을 해치는 일을 하든, 목숨을 구하든, 죽이든 관심도 없고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지키는 것보다는, 그래서 세상에서 살아남기 보다는 그 법을 어기면서도 사람을 살리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길을 택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음의 길로 가시게 된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사실 예수님은 참 사랑의 정신을 잃은 법을 바로잡으려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법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완전할 수 없습니다. 법이 참 의미를 잃고 특권층만을 보호하는 것이 되어버렸다면 그 특권을 누리는 이들은 참 정신보다는 법을 더 중요시하게 되어 위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이 때 사람을 살리고 법대로 처리되어 죽는 쪽을 택해야 할 용기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복음 ~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신선하고 통쾌한 말씀>
요즘 복음은 계속해서 바리사이들과 대립각을 세우시며 사사건건 충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충돌의 이유는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악법’이자 ‘두통거리’가 된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점점 구체화되는 바리사이들의 악랄한 음모, 권모술수가 손에 잡힐 듯합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 마다 사람들을 풀어 사사건건 감시합니다. 곧 잡힐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물고기를 따라다니는 사람처럼 초조하게, 집요하게 예수님을 따라 다닙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도 이제는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작정하신 듯 보입니다. 바리사이들의 그 이중성, 그 완고한 마음을 서글픈 눈, 노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더 이상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드셨던지 이젠 바리사이들의 그릇된 신앙, 위선적 행동, 악랄한 수법에 대해 신랄한 어조로 공격하십니다.
오늘 대립각을 세우게 된 발단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 대한 치유’였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어느 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지요. 사고를 당했던지, 아니면 신경계통의 이상으로 인한 마비 증세였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저는 한때 가난했지만 떳떳하게 제 손으로 벌어먹고 살던 기술자였습니다. 고되고 힘든 일이었지만 열심히 일했고, 보람도 컸습니다. 그러나 주님, 지금 제 손을 보십시오. 이런 오그라든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 손을 펴주십시오. 구걸로 연명하는 것, 정말 죽기보다 싫습니다. 남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도록 한번만 기회를 주십시오.”(히브리인의 복음 참조)
그 순간 회당 안에는 이미 여기 저기 스파이들, 프락치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고발할 건수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말 한마디 실수라도 해서 그들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되면 당장이라도 법정으로 끌려갈 위험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점점 당신을 향해 조여 오는 악의 올가미를 강하게 느끼셨을 것입니다. 대립각을 접고 우선 피하고도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회당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많은 다른 양들, 길 잃고 방황하는 양들을 바라보십니다. 어떻게 해서든 바리사이들의 그릇된 신앙에 물들지 않고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고 싶은 소박한 양들입니다. 그들이 선하고 간절한 눈망울을 외면하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 마디 말을 던지십니다. 그 한 마디 말씀은 정녕 지혜로 가득 찬 말씀이었습니다. 사랑으로 무장된 말씀, 생명의 말씀이자 구원의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바리사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리는 신선하고 통쾌한 말씀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안식일 규정이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좋은 일 한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안식일 규정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준수하는 것보다는 죽어가는 사람 한명 살리는 일을 훨씬 기뻐하십니다.
오늘 주변을 한번 둘러보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다른 무엇에 앞서 사람을 살리는 일인데, 그 일에 일조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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