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대한 발견>마르코 2,13-17

2009. 1. 17. 오전 6:43:00

글자
 
 

1월 17일 토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 마르코 2,13-17

 
 
 
하느님 앞에 감출 수 있는 것은 없다. 어떤 마음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계신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우리를 변호해 주실 분이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리였던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음식을 잡수신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못마땅해한다. 세리는 죄인이라는 선입관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신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복음).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4,12-16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14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오늘의 묵상 
 
사람의 위는 암의 발생률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음식물이 쌓이기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기에 늘 움직이며 살아야 합니다. 활동적인 사람이 건강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암의 발생률이 적은 곳은 심장이라고 합니다. 계속 움직이며 피를 공급하기에 암세포가 들어붙을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베풀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암에 걸리지 않습니다. ‘영혼의 암’에 걸리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트집 잡습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와 함께’ ‘무엇을 먹든’ 시비 걸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먹어서 ‘죄 되는 음식’은 없습니다. 더구나 어떤 사람과 함께 먹었기에 ‘죄가 되는’ 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법이 있다면 하느님을 옹졸한 분으로 만드는 법입니다.
암세포는 서서히 자랍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초기에 발견하면 고약한 암이라도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늦게 발견하면 그만큼 힘들고 어렵다는 말이 됩니다. 영혼의 암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한 마음’과 ‘남을 무시하는 행동’이 영혼의 암입니다.
 
 
 

연중 1주간 토요일 - 가장 위대한 발견

 에딘버러 대학의 제임스 심슨 경은 진통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진통제로 많은 이들이 고통 없이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의학계의 한 획을 긋는 대발견이었습니다.  그의 노년 시절에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한 학생이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생애동안 가장 뜻 깊고 소중한 발견은 무엇입니까?” 교수는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내가 발견한 가장 위대한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나의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진통제를 발견한 것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먼저 발견하지 못한다면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집니다.

 고해를 듣다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해를 자주 보는 사람들은 고해 내용도 매우 다양하고 길지만 오랜만에 고해하는 사람들은 대충 간추려서 한두 가지만 짧게 고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신을 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으라는 말을 하면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믿어야 돼?”하며 어이없어 합니다. 이는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자신이 죄인임을 더 크게 느낀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음식까지 함께 잡수십니다. 세리란 같은 민족 사람으로서 자신 나라 사람들에게 돈을 뜯어내어 로마에 바치고 또 자신들도 배를 불리는 매국노에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그 직업을 버리고 곧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호화생활을 접고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한 생활과 박해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러나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과 어울리고 죄인을 제자로 부르는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말씀 안에는 강한 역설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찾고 구원하시는 이들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로 죄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을 부르신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느끼는 사람에겐 예수님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치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에겐 의사가 필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을 부르시지 않고 죄인 중에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죄인임을 발견한다는 것은 진정 위대한 발견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며칠 전에 신학생이 상담을 하자고 해서 한 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저를 잘 아는 사람에게 했더니 조금은 걱정하는 마음으로 “너무 정답만 말해주지 말아~”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이야기를 들어주기보다는 잘못된 것들을 지적만 해 주지 않았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그 사람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치료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사실 처음엔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자신이 치료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칼을 대고 수술을 해 주는 것은 그 다음 일입니다. 그 수술의 아픔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고치기를 절실하게 요구하기 전까지는 저는 어떤 정답의 말도 해 주지 않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고쳐지기를 절실히 원하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 잘못 되었음을 느낄 때, 그래서 변하고 싶을 때, 바로 그 때 오늘 예수님이 레위를 부르신 것처럼 우리 삶을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인처럼 완전하게 되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저지르는 죄를 인정하지 않고 그 잘못들을 고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해나가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복음 묵상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시집(詩集)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예수님 시대 유럽이나 근동지방에서 세관원들에 대한 이미지는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세계에서는 세리를 공공연하게 ‘도둑’이라고 칭했습니다. 헤론다라는 사람은 세리들에 얼마나 질렸는지 이런 표현을 남겼습니다. “세리들이 가까이 오면 집이 공포에 떤다.”


   유다 세계 안에서 세리들은 더욱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세리들은 자신들이 거둔 세금을 침략자인 로마 제국에 상납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리들에게 매국노, 배신자, 배교자라고 불렀습니다. 유다 문학에서 세리들은 ‘도적’ ‘살인자’와 동등한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세리들은 증인으로 법정에 설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이 얼마나 백성들을 착취했었는지는 성서 상의 기록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 3장 12-13절에서 세례자 요한은 세리들을 향해 이렇게 질책했습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당시 세금을 징수할 때 세율에 대한 명백한 규정이 없었습니다. 객관적인 액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적정한 세율 보다 훨씬 많이 세금을 책정해서 백성들의 원성을 산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라는 세리는 하는 행동을 봐서 하급 세리가 아니라 일정 지역에 대한 세금징수권을 지닌 세리, 총청부인에게 얼마간의 금액을 지급하고 하청을 맡은 세리로 여겨집니다. 레위가 예수님의 부르심 받고 따라 나서면서 상급자의 허락 없이 직장을 떠나는 모습, 또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는 모습을 통해서 세리 사회에서 꽤 잘 나가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 나가던 직장생활을 접고 예수님을 따라나서기로 결심한 레위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아마도 레위가 잔치를 계획한 이유는 새로운 인생길을 열어주신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간 동고동락해왔던 동료 세무관들과의 송별회도 겸했겠지요.


   당대 사람들로부터 공공연하게 손가락질 받던 거물급 세관원들이 속속 도착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유유상종이라고 여러 부류의 많은 죄인들도 몰려왔을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도 호기심에 찬 눈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 공적인 죄인들과 한 식탁에 앉으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세리들과 한 식탁에 앉는다는 것은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정 타는 행위였습니다. 죄인들과의 상종을 금한다는 그들의 법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일이었습니다.


   이토록 유다 전통 안에서 한 식탁에 앉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한 식탁에 앉는다는 것은 너랑 나랑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표시였습니다. 한 식탁에 앉는다는 것은 꽤나 큰 친밀감의 표시였습니다. 같은 식탁에서 빵을 나눈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우정과 존중의 표시였습니다.


   세리들과 한 자리에 앉아 편안하게, 유쾌하게 식사를 즐기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제 개인적으로 얼마나 큰 위안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새해를 맞아서 제발 죄 좀 그만 짓고 살아가자고 얼마나 많이 다짐을 했습니까? 그러나 작심삼일입니다. 어느새 과거의 부끄러운 악습을 또 다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한 평생 죄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인가 봅니다. 생각의 죄, 마음의 죄, 눈을 다스리지 못한 죄, 입을 단속하지 못함으로 인한 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끝까지 좌절해서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아직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는 희망과 가능성으로 충만한 시기입니다. 너무 조금하게 생각하지 말길 바랍니다. 아직 까마득하게 남은 이 한해,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주님을 향한 시집을 준비하듯 그렇게 살길 기원합니다.


   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며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

   새해엔, 아아    가장 고독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    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

   나는 그 하늘 아래    아름다운 글을 쓰며

   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    나날이게 하소서.


   -이성선, ‘새해의 기도’-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399번 / 주님 안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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