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 - 마르코 2,23-28

2009. 1. 20. 오전 7:44:35

글자
 
 
 
 
하느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끝까지 기다린다. “나는 너에게 복을 내리고, 너를 번성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아브라함이었기에 주님의 축복을 계속 받았다(제1독서). 주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면서 밀 이삭을 비벼 먹었다. 무심코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안식일이었기에 ‘해서는 안 될 추수 행위’로 간주되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거슬렀다며 이의를 제기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설득하신다. 그분의 넓은 마음이다(복음).
 
<이 희망은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합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6,10-20
형제 여러분, 10 하느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므로, 여러분이 성도들에게 봉사하였고 지금도 봉사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 준 행위와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11 여러분 ?微?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2 그리하여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당신보다 높은 분이 없어 그러한 분을 두고 맹세하실 수 없었으므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면서, 14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5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끈기 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그 맹세는 모든 논쟁을 그치게 하는 보증이 됩니다.
1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을 이들에게 당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18 하느님께서 이 두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로,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19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20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오늘의 묵상 
 
 

연중 2주간 화요일 - 법치사회에서 가족공동체로

어떤 신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신학생들 사이에서 자꾸 물건이나 돈이 없어지는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하도 그런 일이 자주 발생하자 경찰에게까지 범인을 잡도록 의뢰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도둑은 신학생 중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심지어는 지문조사까지 해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교 분위기가 매우 안 좋았습니다. 외출도 엄중하게 규제되던 때에 네 명의 신학생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밖에서 만두를 먹고 늦게 귀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교수신부님께 걸려서 모두 본보기로 수스펜시오, 즉 1년씩 휴학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나머지는 다음 해에 복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과연 만두 하나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양성하는 공동체가 이런 모습을 가져야만 하는 걸까요?

   법으로 규제되는 사회, 그것은 어찌 보면 안전하고 공정한 것 같지만 사실 비인간적입니다. 가정을 생각해보십시오. 가정에 법이 있어서 몇 시까지 귀가하지 않으면 매를 몇 대 맞아야하고 부모에게 말대꾸하면 외출금지가 며칠로 정해져있다면 그런 가정에서 사랑을 느끼며 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법으로 통제되는 집단을 ‘사회’라 부르고, 사랑으로 이루어진 집단을 우리는 ‘가족공동체’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과연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싶으셨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남의 밀밭 사이를 가며 그 밀 이삭을 뜯어먹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본 법치 주의자들, 즉 바리사이들은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라며 예수님께 따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저지른 죄는 남의 재산에 손을 댄 도둑질과 안식일에 그것을 뜯어먹는 일을 했기 때문에 안식일 법 두 가지를 동시에 어긴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만 가지고 트집을 잡는 것일까요? 그것은 도둑질보다 안식일법이 더 엄중한 벌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모세 법에 의하면 도둑질을 하면 두 배로 갚아주면 되지만 (탈출 22,6) 안식일 법을 어기면 사형에 처해야 했습니다 (탈출 3,14).

예수님은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하시며 제자들을 옹호합니다. 그들이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던 다윗도 모세의 법을 어겼음을 알고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끝맺으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우선이 되어야지 법이 우선이 되면 안 된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법이 우선시되는 집단은 사랑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삭막한 사회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향하셨던 공동체는 법을 넘어서는 가족공동체였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주다보면 어쩔 수 없이 주일을 빠진 분들도 고해하러 자주 들어오는 것을 봅니다. 직장에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가족이 입원하여 간호해야 했기 때문에, 여행 중에 성당을 찾지 못해서 등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오지 못한 것을 왜 고해하느냐고 합니다. 의무감으로 주일을 지켜야하기 때문에 나와서 억지로 앉아있는 것보다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주일을 빠질 수밖에 없었던 신자를 하느님은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향하여 만드신 공동체는 이렇게 법이 사람보다, 사랑보다 우선하는 그런 집단은 아니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교구와 수도회가 서로 법을 놓고 싸우고 재판을 받고 하는 모습을 봅니다. 법을 이야기한다면 이미 그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공동체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한 것입니다. 법대로 하자고 하면 이미 둘 관계는 막장으로 접어든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신앙공동체 안에서만이라도 법이나 규정을 이야기하지 말고, 사람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가족공동체가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복음 묵상+.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해질녘 강가, 과수원에서>


   어린 시절, 주말만 되면 저는 ‘고기잡이 전문가’였던 형을 따라 강으로 계곡으로 따라다녔습니다. 저도 슬슬 재미를 붙여 해지는 줄 모르고 고기를 잡았습니다.   고기를 잡는 방법도 다양했지요. 낚싯대로 잘 안 잡히면, 커다란 해머로 물에 잠긴 바위를 내리칩니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바위 밑에 숨어있던 고기들이 기절을 해서 떠오르지요. 어떤 날, 저는 하루 온 종일 형과 같이 타고 간 자전거의 페달만 열심히 돌린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형은 페달을 돌릴 때 생기는 전기 에너지를 이용해서 고기를 ‘감전’시켜서 잡았습니다. 또 형은 손으로 고기를 잡기도 했는데, 정말 귀신같았습니다.

 

그렇게 잡은 고기는 날걸로 먹기도 하고, 튀겨먹기도 하고, 매운탕도 끓여먹었습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해가 넘어가곤 했습니다.

 

강가에는 큰 과수원이 하나 있었는데, 늦여름 쯤 되면 사과의 크기도 크기지만, 그 빛깔이 너무 고왔습니다. 낮에는 괜찮았는데, 해만 떨어지면 그리도 유혹이 커졌습니다. 때로 유혹을 참지 못해 과수원 담을 타고 넘어갔습니다. 크고 잘 익은 것은 미안해서 손을 못 대고, 떨어진 것들 몇 개씩 주워서 나오곤 했습니다. ‘훔친 사과가 더 맛있다’는 말, 누가 했는지 정말 정답이었습니다. 그 맛이 정말 꿀맛이었습니다. 그러다 가끔씩 주인아저씨에게 들켜서 밤늦게까지 벌도 서고, 거름도 옮기던 기억이 아직 생생합니다.

 

우리 시골 전통 안에 ‘서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별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젊은이들이 혈기를 한번 부려보는 것입니다. 어르신들은 관대한 마음으로 눈감아주는 좀 특별한 전통이지요.

 

대표적인 것이 ‘닭서리’ ‘수박서리’ 인데, 아직도 그 기억이 손에 잡힐 듯합니다. 그러나 적당히 했었지요. 요즘같이 ‘차 때기로’, ‘무자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안해하면서, 닭 한두 마리, 혹은 수박 한 두통, 그 정도였습니다. 어르신들도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허허’ 하고 슬쩍 눈감아주셨지요.

 

요즘같이 경찰에 고소한다든지, 법정에까지 간다든지 하지는 않았습니다. 서리란 것은 적정선의 ‘장난끼’가 발동되는 것이었습니다. 심각하게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호기부리고 싶은 그 마음을 이해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가다 보니,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장난기가 발동되었습니다. 아니면 어린 시절 밀 이삭을 잘라먹던 추억이 떠올랐겠지요. 자연스럽게 밀 이삭 몇 가닥을 뜯었습니다. 비벼먹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웃으면서 따라했겠지요. 장난으로 그랬지, 그것을 ‘노동’한다면서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지금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규정을 깨트리고 있습니다.”

 

기가 치지도 않았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본래 의미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안식일을 정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신체구조, 신체리듬 상, 한 엿새 일하고 나면 지치기 마련입니다. 몸이 지치면 마음도 지칩니다. 스트레스 지수도 높아만 갑니다. 그런 상태에서 계속 일을 하게 되면 일의 능력도 떨어집니다. 그 정도 되면 일이 기쁨이요 보람이 아니라 인간을 힘들게 하는,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괴로움의 원천이 됩니다.

 

노동은 신성한 것입니다. 노동은 삶의 큰 보람입니다. 노동은 기쁨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안식일(혹은 주일)이라도 먹어야 합니다. 안식일이면 오히려 재미있게 지내야지요. 안식일 날 꼼짝 없이 집 안에서만 지내기보다는 산으로 들로 나가 맑은 공기를 쐬는 것은 더욱 의미가 있겠습니다.


안식일 규정에 나와 있는 것처럼 송장처럼 꼼짝없이 지낸다는 것은 너무나도 웃기는 일입니다. 당시 안식일 규정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때로 너무나 사소한 것들에 대한 규정이어서, 너무나 이치에 맞지 않는 규정이어서 배를 쥐고 웃을 정도였습니다. 수많은 안식일의 세부 규정 때문에 안식일이 오히려 더 괴롭고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는 1,392미터 이상 걸으면 안식일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밀 이삭을 한 개 자르는 것 역시 큰 위반이었습니다. 꽃 한 송이 꺾는 것도 일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열매에 손대는 것조차도 위반이었습니다. 나무에 올라가는 것도 위반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쫀쫀하게’ 된 바리사이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되찾아주고 싶으셨습니다. 안식일의 핵심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2번 / 주 하느님 크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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