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9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 마르코 2,18-22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5,1-10
1 모든 대사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지정된 사람입니다. 곧 죄 때문에 예물과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2 그는 자기도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므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3 그리고 연약한 탓에 백성의 죄뿐만 아니라 자기의 죄 때문에도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4 이 영예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아 얻는 것입니다.
5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가 되는 영광을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분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6 또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10 하느님에게서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되셨습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8-22
그때에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경주용 말은 옆에서 지키지 않으면 자꾸 먹는다고 합니다. 배가 터질 때까지 먹는다고 합니다. 채찍을 맞으면서 ‘뛰고 또 뛰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경기에 임할 때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먹는 것으로 해소하려 든다는 겁니다. 화려한 경주용 말이지만 이렇듯 비참한 구석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이루고 싶은 일이 있을 때에는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했습니다. 하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수단입니다. 은총을 얻는 방법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라고 하십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단식에 임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단식 자체’를 맹종하고 강요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니라고 하십니다. 사랑을 위한 믿음이지 고통을 위한 믿음이 되어선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인들은 경주용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연중 2주간 월요일 - 새 술은 새 부대에
저는 가난하게 사시는 한 신부님을 압니다. 그 신부님이 아시는 다른 신부님을 만나려 함께 간 적이 있었습니다. 미사를 함께 드렸는데 성작과 성합이 매우 아름답고 값어치 있게 보였습니다. 저와 함께 간 그 신부님은 미사 도중에도 그 아름다운 성작의 문양을 손으로 만져보는 등 그 화려함에 경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 그 신부님은 저에게 “오늘 좋았지? 근데 내가 오늘 그 신부에게 사는 게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충고를 해 주었어.”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난하게 사시는 그 신부님을 존경하면서도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 각자 삶의 방식이 있으니 당신이 가난하게 사신다고 남에게 뭐라고 하시면 안 돼요. 성인들이 다 가난했던 것은 아니잖아요.” 그랬더니 그 신부님이 “그럼 부자가 성인이 되나?”라고 되묻기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황님들을 생각해 보세요. 많은 성인 교황님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은 가난하게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분들이었잖아요.” 그 신부님은 더 이상 저에게 말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다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부자라고 다 죄인인 것도 아닙니다. 속으로는 행려자가 더 부자일수 있고 재벌이 더 가난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부자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전 어떤 신학생으로부터 이 말을 듣고 충격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너무 우리의 심리를 잘 표현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따르면, 위의 제가 아는 신부님은 겉으로는 가난하게 살지만 사실은 부자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부자로 사는 동료 사제에 대해 화가 났던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억지로 짓누르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다른 이들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들이 나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것이라도 적재적소에 올바르게 적용되어야 함을 말씀하시기 위해 이런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내가 따르고 있는 것들이 항상 상대방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헌옷은 헌옷 조각으로 새 옷은 새 옷 조각으로 기워야 옷이 상하지 않습니다. 술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발효하여 터지고 맙니다. 내가 하는 것들을 남들에게 강요하지 않도록 합시다. 하느님은 그들을 다른 방법으로 부르고 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새벽미사란 잔치, 오늘 하루란 잔치>
단식 한번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언젠가 위장계통에 문제가 생겼을 때, ‘단식이 최고’라는 누군가의 감언이설에 넘어갔습니다. 몸에 문제가 생기면 먼저 병원으로 가서 검진을 받았어야 했는데, 워낙 귀가 얇다보니 ‘단식이 최고’라는 말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식, 그냥 시작하면 되는 것이 아니더군요. 나름대로 절차가 있었습니다. 초보자들을 위한 주의사항도 엄청 많았습니다. 교육도 필요했습니다. 준비해야 할 것도 꽤 많았습니다. ‘오늘부터 단식이다’ 하고 바로 단식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무척이나 까다로운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단 시작을 했었는데, 과정이 진행될수록 너무나도 괴로웠습니다.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더군요. 사흘까지는 이를 악물고 견뎌냈었는데, 사흘이 고비더군요. 사흘이 지나면서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하더니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려 보겠다는 거지? 내 주제에 단식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단식. 그냥 이대로 그냥 살지 뭐. 아프면 아픈 대로. 그러다 안 되면 죽지. 안 그래?”
그 뒤로 단식기도 자주 하시는 분들, 정말 우러러보이더군요. 단식, 그것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독한 사람 아니면 힘든 것입니다. 웬만한 의지력이 아니면 정말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마태오 복음 4장 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단식하시는 광경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일주일 열흘도 아닙니다. 장장 40일간 단식을 하셨습니다. 인간 육체의 한계를 체험하신 단식, 목숨을 건 단식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자주 단식 하셨습니다. 고민거리가 생길 때, 정말 괴로울 때,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싶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주 광야로 가셨습니다. 단식 가운데 기도하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단식의 전문가였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단식은 꽤 일상적인 그 무엇이었습니다. 자연스런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16장 29절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하루를 속죄의 날(10월 1일)로 정해 의무적으로 단식했습니다.
또 기근이나 전쟁, 가뭄, 대형 참사와도 같은 천재지변을 겪을 때, 이웃들의 고통에 대한 동참의 표현으로 단식 일을 선포했습니다. 한 술 더 떠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단식하면 이력이 난 사람들이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스승의 엄격한 생활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단식의 전문가였던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은 정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위선적인 것이었습니다. 지금 자신들이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랐습니다. 내가 지금 단식하느라 이렇게 괴롭다, 이렇게 힘이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기를 원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일단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뭘 물어봐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겨우 대답했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자신이 지금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떠들어댔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그런 꼴을 보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라.”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가슴은 비통함으로 찢어집니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립니다. 그런 상황에서 삼시세끼 챙겨먹기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났기에, 이제 더 이상 그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기에,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듭니다. 안타까움에 할 말을 잃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편안하게 밥을 먹겠습니까?
이처럼 단식은 슬픔의 표현입니다. 애통함의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다들 단식하고 있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 저리도 게걸스럽게 잘들 먹느냐고 대놓고 따집니다.
하수들의 차원 낮은 질문 앞에 고수이신 예수님께서는 약간은 애매모호한 표현, 알쏭달쏭한 표현, 그러나 심오한 표현, 신앙의 진리와 핵심이 담긴 차원 높은 답변을 펼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당장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메시아 성을 넌지시 밝히십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과 더불어 그분의 활동무대가 시작됨으로 인해 이제 구약 시대는 마감된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이 온 것입니다.
그간 메시아 오심을 기다리며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렇게 자주,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목숨 바쳐 해오던 단식도 이제는 그칠 때인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 땅에 오신 메시아께 감사드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초대하신 잔치에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내어주시는 의자에 앉아 행복한 마음으로 잔치를 즐기는 일입니다.
결혼식이나 고희연과도 같은 흥겨운 잔치 주최한 주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보람은 하객들이 기쁜 마음으로 와주는 일입니다. 차린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일입니다. 준비된 여흥에 기꺼이 동참하며 열심히 놀아주는 일입니다.
사흘 밤낮을 두고 준비한 음식 앞에서 열심히 먹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잔치에 온 누군가가 ‘아, 나 지금 단식기도 중이야’ 라면서 물 잔만 들고 있다면, 주인 입장에서 김이 팍 셀 것입니다.
잔치에 온 사람들이 다들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있다든지, 다들 인상을 구기고 있다면 잔치 주인으로서는 정말 괴로운 노릇일 것입니다.
오늘 또 다시 우리 앞에 ‘새벽미사’란 잔치, ‘오늘 하루’란 귀한 잔치가 펼쳐질 것입니다. 감사하면서, 행복해하면서 기쁜 얼굴로 잔치를 만끽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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