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8일 연중 제2주일(일치주간) - 요한 1,35-42
(일치 주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을 통하여,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일치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권장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1월 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인 1월 25일까지를 ‘일치 주간’으로 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특별히 올해 일치 주간에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와 개신교(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가 공동으로 준비한 ‘일치 주간 기도문’을 전 세계 교회가 교파를 초월하여 공동으로 바치게 되어, 한국의 교회 일치 운동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일치 주간을 맞으며, 이 기간(18-25일)에는 ‘오늘의 묵상’에 이어,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에서 제공한 ‘일치 주간의 묵상’도 함께 싣는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3,3ㄴ-10.19
그 무렵 3 사무엘이 하느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자고 있었는데, 4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 그가 “예.” 하고 대답하고는, 5 엘리에게 달려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하였다. 그래서 사무엘은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6 주님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내 아들아,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하였다. 7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8 주님께서 세 번째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 그는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아이를 부르고 계시는 줄 알아차리고, 9 사무엘에게 일렀다. “가서 자라.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은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다.
10 주님께서 찾아와 서시어, 아까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시편 40(39),2ㄱㄴ과 4ㄱㄴ.7-8ㄴ.8ㄷ-9.10(◎ 8ㄴ과 9ㄱ)
◎ 주님,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저는 주님의 뜻을 즐겨 이루나이다.
○ 주님께 바라고 바랐더니, 나에게 몸을 굽히셨도다. 내 입에 새로운 노래를, 우리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을 담아 주셨도다. ◎
○ 주님께서는 희생과 제물을 기꺼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의 귀를 열어 주셨나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주님께서는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 나이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
○ “두루마리에 저에 대하여 쓰여 있나이다. 저의 주 하느님, 저는 주님의 뜻을 즐겨 이루나이다. 제 가슴속에는 주님의 가르침이 새겨져 있나이다.” ◎
○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주님께서는 알고 계시나이다. ◎
<여러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6,13ㄷ-15ㄱ.17-20
형제 여러분, 13 몸은 불륜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몸을 위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14 하느님께서 주님을 다시 일으키셨으니, 우리도 당신의 힘으로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15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 17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 18 불륜을 멀리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몸 밖에서 이루어지지만, 불륜을 저지르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20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5-42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처음 만난 그에게 이름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본래 이름 ‘시몬’ 대신에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십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숨기고 싶을 때 이름을 바꿉니다. 지난날의 모습을 없애고 싶을 때 이름을 바꿉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런 암시를 주셨던 것입니다.
‘시몬은 죽었다. 그러니 너는 이제 베드로로 다시 태어나라.’ 이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은 이렇게 이름을 바꾸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베드로의 운명을 바꿉니다. 바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위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견디어 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모습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흔들리고 있는지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흐느적거리며 살고 있는지요? ‘별것도 아닌 말’에 속상해하고, ‘별일도 아닌 사건’에 격분합니다. 지나고 보면 정말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었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베드로 사도만이 이름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세례명에 걸맞게 살고 있는지 오늘은 돌아봐야겠습니다.
연중 제 2 주일 ; “와서 보아라.”
우리가 살아오면서 만나왔던 사람들을 떠올리려고 하면 그 사람이 한 말이나 행동보다도 그 사람의 모습이 먼저 떠오릅니다. 이는 우리 감각 중에서 가장 원초적인 감각이 ‘시각’이라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눈은 영혼의 문이다.’라고 하며 모든 좋은 것, 안 좋은 것들이 눈을 통해 들어와 영혼에 영향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 안에도 ‘백문이 불여일견’ (百聞不如一見)이라 하여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사들을 제정하실 때도 물과 기름, 안수 등의 눈에 보이는 물질과 행동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강림을 체험하도록 하신 것도 다 보는 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의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교수 신부님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매우 성인처럼 사십니다. 강의 때 언뜻언뜻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 옷도 남이 버린 것을 주워 입고 돈도 가난한 사람에게 모두 나누어주며 밥과 빨래, 청소도 본인이 다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사제관에서 함께 살게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듣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성탄 때 그 분의 본당에 가서 한 번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정말 가서 눈으로 보니 수업시간에 하셨던 말씀들도 사실이고 또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임에도 매우 춥게 지내셔서 우리를 사제관에 재울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오랫동안 추운 곳에서 사시는 것이 습관이 되셔서 괜찮지만 우리들은 그렇지 못하니 여관에 가서 자도록 미리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당신의 가난이나 절제, 극기의 삶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에 더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어떤 신부님도 매우 가난하게 사시지만 신자들에게까지 그 가난을 강요하여 원성을 듣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난을 자랑하는 것은 자신이 부자이고 싶기 때문이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은 사실은 자신의 감추어져있는 자아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며 자신의 감추어진 내면을 비판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를 수 있는데, 그 분은 남이 그렇게 하지 못함을 비판하지 않고 각자의 삶의 방법을 존중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첫 두 명이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다.”라고 했지만 그 말만 듣고는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예수님 뒤만을 쫓아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드디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망을 표현합니다. “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와서 보아라.”하시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 날 그분과 함께 묵습니다. 이제 직접 그분이 묵으시는 곳을 보고는 그 분이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고 그 분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을 만난 시간이 오후 네 시쯤이었다고 정확히 시간까지 기록합니다. 이는 그 분을 만난 그 순간이 자신의 온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인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도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시간을 정확히 기억합니다. 교구에서 주최하는 교사 피정 때였고 2005년 2월 4일 저녁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결코 그 결정에 대해 후회하거나 뒤돌아 본 적이 없습니다. 신학교에서 많은 신학생들이 성소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적지 않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중도에 결심을 포기하고 옷을 벗습니다. 저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눈으로 직접 보듯이 명확한 확신을 갖게 하는 경험’이 없어서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소는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지켜나가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결혼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남자와 여자의 찌릿찌릿한 감정은 평균 1년 정도 지속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사랑이 줄어드는 것으로 생각하여 많은 커플들이 일 년이 지나면 위기를 맞습니다. 이 감정은 삼년이 지나면 완전히 사라진다고 합니다. 부부들이 말하는 “니 살이 내 살이고 내 살이 니 살”인 것처럼 서로 살이 닿아도 아무런 느낌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부 각자에게 위기가 오기도 합니다. 남자는 이제 한 사람은 정복하였으니 다른 사람을 찾게 될 수도 있습니다. 본래 동물적으로 남자는 정복하려는 욕망과 자손을 많이 번식시키려는 욕망에 열 여자 마다 않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남성이 정말 자신이 받아들여야하는 사람인지 결혼 전날까지 고민합니다. 언제 더 뛰어난 인물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고 또 종교의 믿음을 통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게 됩니다. 부부간에는 그 둘이 끝까지 사랑을 지속하고 오히려 완성해 갈 수 있는 계기가 있어야합니다. 저는 이것을 ‘부부간의 서약’순간으로 봅니다. 혼인 성사 때 둘은 하느님께서 둘을 맺어주신 것임을 굳게 믿고 끝까지 신의를 지킬 것을 하느님과 이웃들 앞에서 서약합니다. 이 한 순간의 서약이 위기가 올지라도 평생 부부를 지켜줄 수 있는 위대한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이 중요한 순간을 잊어버리는 부부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예수님의 두 제자도 그 결정적 순간을 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살아가면서 우리가 어떻게 사제 성소든, 수도 성소든, 결혼 성소든, 아니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든 간에 그 분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결정적인 순간을 체험할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이 체험만 있으면 믿음에서도, 또 어떤 삶을 살아가든 흔들림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을 보려 해도 그 분은 더 이상 우리 앞에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당신 두 제자들에게만 그런 경험을 허락하시고 우리에게는 허락하시지 않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러 모습으로 지금 우리 안에 현존하십니다. 교회의 모습으로, 성경 말씀으로, 또 구체적으로 성체의 형태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밤을 보냈다는 뜻은 ‘기도했다.’는 뜻과 같습니다. 기도란 바로 그 분을 직접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성체를 통해 밤새 기도하지 않고서는 ‘눈에 보이는 확신’을 얻을 수 없고 그렇게 자주 혼란스러워 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본 것보다 더 확신을 얻고 그 확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칩니다. 사실 우리도 예수님을 계시하는 사람들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와서 보시오.’하며 자신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삶의 확신과 그로인한 삶의 의미와 힘을 주시기 위해 ‘와서 보아라.’하시며 우리를 당신과의 만남에로 초대하십니다. 우리도 우리 삶을 바꾸고 완성할 힘을 얻기 위해 꾸준한 그 분과 머무는 시간을 갖아야 하지 않을까요?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산들바람 같은 주님 음성>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었던 안드레아와 다른 한 제자는 세례자 요한의 안내로 예수님을 소개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여기서 "따라나섬"은 그저 괜히 한번 따라나서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일회성 따라나섬도 아닙니다.
자신의 미래를 송두리째 맡기는 결정적인 선택입니다. 자신의 인생과 목숨을 건 절대적인 추종을 의미합니다. 결국 자신의 삶 전체를 예수님께 맡기겠다는 선택, 결국 예수님만을 추종하겠다는 일생을 건 도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명예, 부, "물 좋은 한 자리"가 절대로 아니겠지요. 예수님의 삶 그 자체, 그분이 한평생 추구했던 가치관, 사고방식, 행동양식, 모든 말씀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똑같이 살겠다는 서원입니다. 이 세상에서 손해 보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남보다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겠다는 약속, 돈도 안 되는 이웃봉사를 하면서 바보처럼 살겠다는 결심입니다.
오늘 복음을 천천히 읽으면서 이런 묵상을 한번 해봤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두 제자는 어찌 그리 일말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 있었는가?" 하는 묵상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봤더니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 제자는 "준비된 제자"였습니다. 평소부터 따라나설 준비를 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제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 있을 때부터 그를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업을 충실히 받아왔던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등장하는 사무엘처럼 "주님 언제든지 불러만 주십시오. 이 몸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는 마음으로 이미 제자로서의 삶을 준비해왔던 것입니다. 출동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도록 완전군장을 갖춘 "5분대기조"처럼 말입니다.
복음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사람, 우상숭배에 젖어 사는 사람, 매일 술과 유흥에 빠져 허우적대며 사는 사람, 매일 자기 한 몸 챙기기에만 바쁜 사람이 어떻게 산들바람처럼 지나가는 주님의 음성, 속삭이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음성조차 듣지 못하니 그분을 따라나서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사무엘 상권 3장 10절).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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