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의 첫 번째 목적> - 마르코 3,13-19

2009. 1. 23. 오전 6:35:50

글자

1월 23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 마르코 3,13-19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계약의 중개자가 되셨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졌던 ‘첫 번째 계약’을 완성하셨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제 모든 이는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의 자비하심을 만나게 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으시어 당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 하신다. 열둘을 뽑으신 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모두 구원하시겠다는 암시다. 제자들 가운데 유명 인사는 한 분도 없다. 모두가 평범한 사람들이다. 훗날 예수님을 배반할 제자도 있다(복음).

그리스도께서는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8,6-13
형제 여러분, 6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7 저 첫째 계약에 결함이 없었다면, 다른 계약을 찾을 까닭이 없었을 것입니다. 8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결함을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으리라. 9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이 내 계약을 지키지 않아 나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10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1 그때에는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제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으리라.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2 나는 그들의 불의를 너그럽게 보아주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13 하느님께서는 “새 계약”이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첫째 계약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함께 지내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3-19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14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15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17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19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오늘의 묵상 

처음부터 주연이 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배우는 조연의 역할을 거친 뒤 주연으로 발탁됩니다. 어떤 조연의 역할이든 확실히 소화할 수 있어야 주연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 과정 없이 돈이나 ‘백그라운드’로 주인공이 된다면 극은 실패하기 쉽습니다.
연극만이 아닙니다. 현실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주연이어야’ 하는데 ‘조연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착각은 자유가 아닙니다. 자신과 이웃을 괴롭히는 행위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착각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열두 사도 역시 모두 조연들입니다. 예수님을 돕기 위해 선택된 분들입니다. 물론 그분들도 언젠가는 주연이 될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그들의 영적 능력을 강화시켜 주십니다.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까지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능력은 아닙니다. 스승님께서 ‘주신 능력’입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진실’입니다. 열두 제자들은 본분을 기억하고 살았기에 사도가 되었고,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위엔 조연인데 ‘주연인 듯’ 행동하고, 주연인데 ‘조연처럼’ 처신하는 이들이 늘어 가고 있습니다. 착각을 깨지 못한 결과입니다.

부르심의 첫 번째 목적

 요즘 저희 교구 한 신부님이 로마에 일이 있으셔서 와 계십니다. 오늘 오전에 바티칸에 일 보실 것이 있어서 제가 차로 여기저기 데려다 주었습니다. 한 곳에 그 분을 내려드렸습니다. 그 분은 금방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있던 경찰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빨리 차를 빼라는 것입니다. 저는 잠깐이면 된다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저를 보고 한 경찰관이 ‘Vatene!’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한다는 것은 욕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뉘앙스 상으로는 “꺼져버려~!”하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가 이태리어를 못 알아들을 것 같아서 그랬는지 외국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저는 집으로 들어오면서 수위아저씨에게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태리 경찰들은 친절하지 않아요.” 저도 모르게 그 한 사람의 잘못을 이태리 경찰 모두에게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나중에 그 중에 몇몇만 좋지 않고 친절한 경찰들도 많다고 말을 했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수위아저씨도 이 일을 하기 전에는 경찰직을 삼십 년 이상 한 분입니다. 아저씨는 저의 말이 맞다고 하면서도 기분은 별로 좋지 않은 눈치였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을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생각해버리는 저의 잘못도 없지는 않지만, 또한 크게는 그리스도인, 작게는 사제의 한 명으로서 전체 그리스도인이나 사제들을 욕 먹이게는 살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근래에 교황 요한바오로 2세나 마더 데레사 성녀가 가톨릭의 인상을 좋게 했었습니다. 성인 몇 명이 전체 종교의 이미지를 좋게 한다면, 반면 몇 명의 성직자나 수도자, 혹은 신자들이 그 이미지를 깎아먹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부르심을 받을 때 주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해야 하는 것이 첫 번째 불러주신 이유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단순한 일꾼을 뽑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을 뽑으실 때 첫 번째 목적은 당신과 함께 머물고 관계를 맺고 또 가르쳐 또 다른 당신의 모습을 지닌 제자들을 만드는데 있었습니다. 그 다음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등의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고민하여 뽑으신 첫 번째 목적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려는 것’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본당에 있다 보면 어떤 때는 너무 바쁜 나머지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보다는 외적인 일에 더 치중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항상 실수를 하고 안 좋은 모습을 신자들에게 보이게 됩니다.  기도가 우선인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지 않고서는 어떤 좋은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한 명의 경찰관을 보면서 다시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은 어떤 일이 있어도 먼저 채우고 활동은 그 다음 소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일반 신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실 ‘저런 신자 때문에 성당 나오기 싫어요!’란 말을 듣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첫 번째 부르심의 이유가 그 분과의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고 다른 것은 이차적인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도록 합시다.

 + 전삼용 (요셉)신부+

 

 연중 2주 금요일-새로운 사랑 관계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으리라.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때에는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제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하고 가르치지 않으리라. 그들이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동 수도원에 오기 전 저는 대전 수련소에 있었습니다.
정동 수도원에 비해 수련소 공동체는 작은 공동체였기에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하는 일에 대해서도 서로 잘 알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무엇을 결정하면 수련소에서는 모두가 잘 지켰습니다.  그러다 큰 공동체에 오니 서로가 서로 하는 일에 대해 잘 모르고  결정한 것도 나 하나 빠져도 되겠지 하며 미룹니다.
각자가 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떤 때는 같이 결정해 놓고 하나도 지키지 않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양성을 담당했을 때도 마찬가지 현상을 보았습니다.
전체를 놓고 잘못을 지적하면  그것이 자기에게 하는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지적을 하면 깜짝 놀랍니다.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나 하느님의 말씀도 비슷합니다.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계약을 맺으니 자기와 하느님이 1대1로 맺은 계약이라고 생각지 않고, 전체를 두고 말씀하시니 바로 나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법이 그들 생각과 마음속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겉돕니다.

우리는 종종 그러합니다. 모두를 사랑한다고 얘기하면 그 사랑은 못 느끼고 너만을 사랑한다고 속삭여주길 바랍니다. 자식을 똑같이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은 성이 차지 않아 부모 사랑을 놓고 경쟁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들과 새 계약을 맺으시고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속에 당신의 법을 새겨주시겠답니다. 어떻게? 
옛날의 나에서 새로운 나로 바꾸심으로써. 새 계약에 합당한 새 사람이 되게 하심으로써.  그러니까,  전에는 듣기 좋은 말은 듣고 싫은 말은 흘려들었다면  이제는  듣기 좋든 싫든 하느님의 말씀 앞에 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시는지 거기에 시선과 흐트러뜨리고 귀를 흐트러뜨렸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시든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시선과 귀를 모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싫은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듣기 좋은 하느님 사랑의 말씀은 독점하던 나에서 이제 하느님을 공유하고 하느님의 모든 말씀을 같이 받드는 것이 행복이 되는 내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남편의 아이를 갖기 원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사랑하는 아이를 같이 사랑하고  사글세방살이의 궁핍함도 사랑하는 사람과라면 행복하고
주인집의 모진 소리도 사랑하는 사람과 감내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영화를 같이 보는  그런 행복과 같은 것이지요.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 형제회)   -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 하셨다.”


<이 사람 정도라면>


   예수님에 대한 오랜, 그리고 면밀한 예의주시 결과 바리사이들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을 법정으로 끌고 가기로, 조만간 처형대에 세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그 첫 번째 수순으로 헤로데파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만민의 구원과 세상의 복음화란 사명을 지니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정녕 큰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당신이 시작한 전도 사업이 이제 출발선에 서있을 뿐인데, 그 세력이 만만치 않은 흉악한 적대자들로부터 치명적인 공격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제 막 구원사업을 시작한 예수님인데, 벌써 생명의 위협을 받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고민이 크셨겠지요. 피를 말리는 번민의 순간이었습니다. 하루하루의 고민거리는 이것이었습니다. ‘이 순간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

 

   결국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당신 사업을 계승하고 협조할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사도들의 선발은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 중대한 선발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들어가십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십니다.


   사도들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렬한 기도 끝에 선택하신 사도들의 명단은 사람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 특히 ‘가방끈이 긴’ 사람들, 재력가들, 명망가 출신의 사람들, 공직자들, 전문가들… 그들은 내심 자신의 이름이 사도들의 명단에 포함되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발표되는 이름 하나 하나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많이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열두 사도들은 대부분 소박한 평민 출신이었습니다.


   사도들의 명단에는 당시 잘 나가던 바리사이 사람들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대사제나 율법학자들도 없었습니다.

 

   하나같이 정통 유다신앙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인 면에서나 ‘이 사람 정도라면’ 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이렇게 모든 것을 뒤집는 분이셨습니다. 알량한 인간적 지식이나 하잘 것 없는 지식으로 교만에 들뜬 인간들의 생각을 꺾어놓으십니다. 인간적 야심이나 사리사욕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가장 밑바닥에서 새롭게 시작하십니다. 그 유식하고 잘난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과 함께가 아니라, 그 부족한 사도들을 주추삼아 당신의 사업을 전개하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성격이 좋아서 부르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뛰어나서 부르시지 않습니다. 지식이 많아서 부르시지 않습니다. 부자라서 부르시지 않습니다. 일을 잘한다고 부르시지 않습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세속적 야욕으로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불같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 때문에 부르십니다.

 

   결국 주님만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란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이토록 형편없지만 언젠간 반드시 그분께로 돌아설 사람이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그 옛날 정말 보잘 것 없었던 사도들을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흠도 티도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부족해서, 안쓰러워서, 죄인이어서, 병자여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셔서, 우리 내면 안에 긷든 변화 가능성을 눈여겨보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허세를 부릴 일 하나도 없습니다. 뻐길 일도 없습니다. 자랑할 것도 아닙니다. 어깨 으쓱할 일도 아닙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기쁜 얼굴로 ‘예!’ 하고 따라나서는 일, 주님의 부르심에 지속적으로 응답하는 일, 고달픈 매일의 성소여정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일, 그것이 부름 받은 사람으로서의 합당한 자세일 것입니다.

 

   오늘도 부족한 우리를 생명에로 부르신 자비의 하느님께 찬미 드리는 일. 부족한 우리를 도구삼아 당신 구원사업을 계속하시는 은총의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일이 부르심 받은 사람이 할 일입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403번 / 가난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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