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밖에도 계시는 성소의 하느님>>-마르코 3,20-21

2009. 1. 24. 오전 8:51:38

글자
 

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 학자 기념일-마르코 3,20-21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는 1567년 이탈리아 사보이아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나이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고,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훗날 스위스 제네바 교구의 교구장 주교가 되어 종교 개혁 시절의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다. 그는 뛰어난 고해 신부였고 해박한 신학자였다. 1665년에 시성된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는 우리나라에서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구약의 대사제는 매년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을 위한 속죄제를 바쳐야 했다. 하지만 신약에선 그럴 이유가 없어졌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류가 구원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영원한 대사제이시다(제1독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만큼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 들린 이들을 낫게 하셨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럴 리가 없다며 찾아왔다. 인간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복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9,2-3.11-14
형제 여러분, 2 첫째 성막이 세워져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제사 빵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을 ‘성소’라고 합니다. 3 둘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라고 하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11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13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14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0-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오늘의 묵상 
갓난아기는 부모가 주는 애정을 듬뿍 받습니다. 부모가 웃으면 아기도 웃습니다. 부모가 신경질을 내면 아기도 찡그립니다. 차츰 아기의 뇌는 부모의 ‘감성적 신호’에 반응하도록 발달됩니다. 느낌이 눈을 뜨는 것이지요.
이렇게 아기들은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바탕으로 감정을 읽는 ‘기본 틀’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훗날 어른이 되어서도 이 기본 틀에 맞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군요. 부모를 닮은 사람을 쉽게 사랑하게 되는 이유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이러한 기본 틀이 있습니다. 처음 믿음을 접했을 때의 느낌일 수 있습니다. 세례성사를 준비할 때의 생활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신앙의 길로 이끌어 준 분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때의 ‘기본 감정’ 위에 ‘믿음의 체험’을 쌓아 갑니다.
그 ‘체험들’을 언젠가는 예수님 안에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의 관점에서만 그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닮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빠지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분을 섬기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성소 밖에도 계시는 성소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성전에는 ‘성소’가 있었고,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구별된 지역입니다. 이방인은 들어갈 수 없는 聖所가 있었고 정해진 사제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至聖所가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인도에 가서 빛의 축제 때 힌두 사원에 들어갔습니다. 힌두 신자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들어간 것입니다.
저는 외국인이기에 괜찮았지만 그 바람에 저를 안내하던 인도 신부님이 무차별 구타를 당했습니다.  참으로 황당하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區別心을 경계하는 그들이 구별 정도가 아니라 차별을 하니 말입니다.

실제 있었던 얘기인지, 지어낸 얘기인지 모르지만 어느 관광객이 인도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바닥을 닦던 더러운 걸레로 식탁을 닦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더러운 걸레로 식탁을 닦느냐고 따졌더니 당신은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구별하느냐고 반문하더랍니다.
실제로 제가 강가(갠지스) 강에 갔을 때 시체가 떠다니는 더러운 물에서 목욕을 하고 이빨을 닦고 성수라 하여 집에 가져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걸레와 물은 더럽고 깨끗하고를 구분하지 않지만 강가 강은 다른 강과 달리 성스러운 강으로 구분하고 사람은 카스트 제도에 따라 철저히 구별하고  더 나아가 차별까지 합니다.

우리의 성당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시는데 굳이 성당이라는 곳을 따로 정해 놓고 하느님을 거기에 가둬야 할까요?
물론 하느님은 성당이라는 장소에 갇혀계실 분은 아니시지요.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 이 산이냐 예루살렘이냐 하고 장소를 따지지 않아도 될 때가 온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히브리서가 얘기하듯 “그리스도께서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실” 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두 가지로 편재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시기에 성당 안에서도 만나고 성당 밖에서도 만납니다. 성당 안에 성체로서 현존하시는 하느님도 만나고 성당 밖에 모든 것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도 만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성당 안에서만 하느님을 만나고 성당만 벗어나면 하느님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당은 또한 우리 신자들의 독점적 장소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특전적 장소라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누구나 이곳에 들어올 수 있도록 개방되어야 합니다. 일본에 갔을 때 신자들이 아닌데도 성당에서 결혼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일본 교회가 허용한 것이고 많은 일본인들이 성당에서 결혼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후 저도 정동 수도원에서 두 차례 비신자 결혼을 주례하였습니다.
친구 결혼식 때 저희 수도원 혼배 미사에 참석했다가 자기도 친구와 똑같이 결혼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입니다.
저는 말씀의 전례 형식으로 결혼을 주례하였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어디에나 계시고 누구에게나 당신을 주시고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 형제회)  -
 
 
 
 
 

연중 2주간 토요일 - 믿는 구석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두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있었습니다. 두 자매인데 언니는 그래도 부모를 무서워해서 야단치면 그것이 먹힌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생은 워낙 당돌해서 부모가 아무리 겁을 줘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한 번은 아빠가 두 아이를 야단치고 있는데 언니는 울먹울먹하며 반성의 기미가 보였지만 막내는 여전히 눈만 말똥말똥 뜨고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겁니다.  아빠는 이번에야말로 버릇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으로 강하게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는 “이제부턴 너 내 딸 아니니까 어서 고아원가게 엄마한테 입을 옷 달라고 그래.” 하며 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딸은 겁도 안 먹고 엄마에게 가서 옷을 달라고 챙겨 입는 것입니다. 아빠와 엄마는 여기서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차로 아이를 데려갔습니다. 아이는 겁도 없이 부모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차에 태워 조금 떨어진 놀이터에 아이를 내려놓았습니다. “이제부턴 네가 알아서 살아!”그래도 아이는 겁을 먹지 않고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차를 타고 떠나는 시늉을 했습니다. 몇 미터쯤 가니까 아이가 차로 막 뛰어오는 것입니다. 아빠는 이제 됐다 싶었지만 창문을 내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아빠 아니라고 하는데 왜 따라와?” 아이는 아빠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아저씨, 고아원까지만 태워주시겠어요?”부모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아이를 태워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는 사연입니다.

저는 이 사연을 들으며 많이 웃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고 해도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아이가 있을까요? 사실은 저도 조금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나가라고 하면 그냥 나왔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나가라고 한다고 그냥 나간다고 어머니가 더 열이 받으셨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부모님이 나를 버리실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연 두 아이 중 부모를 끝까지 신뢰한 아이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막내가 아니었을까요? 막내가 아주 부모가 싫어 정말 고아원에 가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면, 실제로 막내는 부모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어 겁이 없었던 것입니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없다면 그런 당당함이 나올 수 없었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시고 그 집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잡으러 옵니다. 당시엔 지금과 달라 가문의 집결력은 매우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라의 지도층들에 대항하고 모세의 율법을 고쳐가며 새로운 가르침을 선포한다는 말을 듣고 가문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입니다. 가장 믿고 힘을 주어야 할 친척들로부터 예수님은 배척을 받으신 것입니다. 물론 복음에 보면 가문만이 아니라 당신의 동네인 나자렛에서 배척당하고 심지어 재판 받으실 때는 그렇게 믿고 따르던 백성들까지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함께 해 왔던 제자들도 한 명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요한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예수님을 홀로 남겨놓고 모두 도망쳐버립니다.

 세상에 예수님만큼 큰 사랑을 주신 분도 없고 또 예수님만큼 사랑 때문에 실망하셨어야 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은 하시되 실망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와 성모님은 당신을 실망시키시지 않을 것을 굳게 믿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의 힘은 두려움과 사람들에게 기대하고 또 실망하는 일들을 극복하게 해 줍니다.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상처받아 다시 사랑이나 정을 주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신자들에게 상처받은 신부님들은 다시 본당 나가기를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지 말고 영원히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는 하느님께 먼저 모든 희망을 겁시다. 주님께 거는 이 믿음이 나를 실망시키는 사람까지도 사랑하게 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입니다.       + 전삼용 (요셉) 신부+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영양가 만점의 의미 있는 하루>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위해서, 형제들을 위해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날들이 있습니다. 그런 날, 저녁은 기쁨과 보람으로 충만합니다. 잠자리에 들면 마음이 얼마나 뿌듯해지는지 모릅니다. 비록 ‘뒷골이 땡기고’, 삭신이 쑤시지만 의미 있는 하루를 보냈다는 마음에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듭니다.


   반면 하루 온종일 허송세월할 때가 있습니다. 축 쳐진 몸으로 하루 온 종일을 TV 앞에서 보낸다든지, 쓸 데 없는 대화나 근심걱정으로 ‘영양가 전혀 없는’ 하루를 보낼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날 저녁은 얼마나 마음이 공허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돈보스코 성인께서 후배들에게 이런 강조를 자주 하셨던가봅니다.


   “형제들이여, 일, 일, 일을 하십시오. 휴식은 천국에 가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끊임없이 몰려드는 군중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던 예수님과 제자들 삶의 한 단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즘 보면 만나는 사람마다 다들 바쁘다고 합니다. 연세 지긋한 할머님들께서도 한번 모이자고 하면 바쁘다고 하십니다. 스케줄 확인해봐야 한다며, 서로 시간 맞춰야 한다며, 한번 모이는 것이 여의치 않습니다.


   저 역시 바쁩니다. 때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그러나 과연 무엇 때문에 바쁜지 고민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조용히 제 일상을 관찰해보니 어떤 때 노느라고 바쁩니다. 쓸 데 없는 일, 무가치한 일, 교회나 세상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일에 뛰어들어 헤매느라 바쁩니다. 전혀 아닌 길로 접어들어 다시 빠져나오느라 바쁩니다.


   이제는 보다 의미 있는 일 때문에 바쁘면 좋겠습니다. 보다 사목적인 일로 인해 바쁘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좀 더 밝게 하는 일, 이웃들의 삶을 드높이는 일로 바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목적 열정으로 인해 바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 일행이 얼마나 바빴던지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끼니마저 거르며 예수님과 제자들은 복음 선포에 매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일하셨으면, 얼마나 깊이 투신하셨으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오해까지 했습니다. 자기 몸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식사마저 건너뛰며,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쳐 치유활동에 전념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미쳤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오늘 우리도 주님처럼 미쳤다는 소리까지는 아닐지라도 몸과 마음을 바쳐 복음 선포에 한번 투신해보면 좋겠습니다.


   의미 없는 하루, 영양가 없는 하루, 그저 그런 하루, 그래서 허전하고 슬픈 하루가 아니라 우리의 에너지를 완전히 한번 쏟아 붓는 하루,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29번 / 주 예수 따르기로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
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 루카 12,35-4009.01.26조회 86연중 제3주일(나를 따라오너라) - 마르코 1,14-2009.01.25조회 50-<<성소 밖에도 계시는 성소의 하느님>>-마르코 3,20-2109.01.24조회 52<부르심의 첫 번째 목적> - 마르코 3,13-1909.01.23조회 57<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 왔다>(마르3,7-12) -유 광수신부-09.01.22조회 51[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다] - 마르코 3,7-1209.01.22조회 91<“손을 뻗어라.” > 1월 21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 마르코 3,1-609.01.21조회 50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 - 마르코 2,23-2809.01.20조회 47<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18-22) -유 광수신부-09.01.19조회 49새 술은 새 부대에>>- 마르코 2,18-2209.01.19조회 51연중 제2주일(일치주간) “와서 보아라.”= 요한 1,35-4209.01.18조회 50<레위를 보시고>(마르2,13-17) -유 광수신부-09.01.17조회 48와서 보아라 / 요한1,35-42 -유광수 신부09.01.17조회 52<가장 위대한 발견>마르코 2,13-1709.01.17조회 50<중풍병자>(마르2,1-12) -유 광수신부-09.01.16조회 49<죄를 용서하는 권한> - 마르코 2,1-1209.01.16조회 48<나병환자 한 사람이>(마르1,40-45) -유 광수신부-09.01.15조회 85